시편 142:1-7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 나의 분깃
시편 142편은 제5권의 ‘다윗의 시(138~145편)’에서 다섯 번째 등장하는 시로, 탄식시다. 140~143편까지 탄식시가 이어진다. 표제인 ‘다윗이 굴에 있을 때’란 내용은 시편 57편의 표제인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를 연상하게 한다. 이와 관련한 굴로는 아둘람 굴이나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던 엔게디 황무지의 굴을 생각할 수 있겠다. ‘마스길’은 ‘지혜의 시, 교훈적인 시’로 알려졌고, 시편에는 총 열세 편이 나온다.
시인은 자신을 좇는 원수들로 인해, 고통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시인에게 피난처는 오로지 하나님뿐이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개입만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시인 개인과 그의 상황을 다 아시므로 그를 건져내실 것이다. 시인은 이를 확신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공동체와 함께 그의 이름에 감사할 날을 고대한다.
1. 하나님께 부르짖음과 시인의 처한 상황(1~4절)
이 시의 시작은 “부르짖음”이다. 다윗이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목소리가 상상될 정도다. 소리 내 여호와를 부르며 악인에게서 건져달라고 간구한다. 시인은 자신의 원통함과 무고함을 토로하고 고충을 낱낱이 진술한다(1~2절).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을 온 세상의 주인이자, 자기 주인으로 여길 때 가능한 것이다.
3~4절은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를 밝힌다. 먼저 그를 쫓는 원수와 그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어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먼저,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3a절)’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알고 계심을 부각한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서 ‘상하다’는 ‘쇠약해지다’는 뜻이다(3절). 시편 143편에서도 시인이 원수의 핍박으로 극한 절망에 빠졌을 때 이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깊은 내면의 마음마저 끔찍한 자기의 상황을 토로한다(시 143:4).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시인의 “길”을 아신다. “길”로 언급된 표현에는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태어날 때부터 준비한 길, 시인이 선택한 의의 길, 또는 현재 시인 앞에 펼쳐진 핍박의 갈등을 의미할 수 있다.
시인은 악인이 자신에게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 고소함으로써 악인의 죄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한다(3b절). 악인들은 시인이 가는 ‘길’에 그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다(시 57:6; 140:5; 141:9; 142:3). 시인 앞에 놓인 길은 올무와 함정이 가득한 위험한 길이다. 올무를 숨기는 행동은 비겁하고 악하여 악인들의 죄를 더 드러내지만, 반대로 시인의 잘못이 없음을 같이 나타낸다. 시인에게 죄가 있다면 공정하게 재판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이들은 법정에 가는 대신 올무를 숨겨 짐승을 잡듯 시인을 잡으려고 하는 상황인 것이다. 표제를 고려하며 추측해 보기로는 사울과 그의 부하들이 도망 다니는 다윗을 어떻게 해서든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음을 가늠할 수 있겠다.
4절에서 시인은 이제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알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란다. 시인은 자신의 ‘오른쪽’을 살피시라고 청한다. 오른쪽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는 호의적인 의미와 적대적인 의미가 각각 존재한다. 본문은 호의적인 의미로 법정의 경우라면 시인을 변호하기 위함이고(시 109:31), 보통 때에는 힘을 북돋기 위함이며(시 16:8), 왕좌의 경우라면 시인을 돕기 위함이다(왕상 2:10; 시 11:5; 마 20:23). 지금 시인의 오른쪽에는 아무도 없다. 시인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 원수들은 무리 지어 악을 행하고 다니지만(3절), 시인 주변에는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 뿐 지지해 줄 사람이 없다.
2.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고백과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한다(5~7절).
무수한 악인들의 핍박 속에서 ‘홀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시인을 지켜줄 분은 하나님이시다. 인간 세상에는 시인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만이 피난처와 분깃이 되신다. ‘피난처’는 표제에 언급하는 ‘동굴’ 또는 ‘요새’나 ‘산성’처럼 전쟁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곳이다. ‘분깃’은 ‘기업’의 다른 표현이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지칭하지만, 물리적인 땅의 개념을 넘어 관계적인 의미와 대물림의 의미가 있다. 시인이 하나님을 분깃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의 친밀함을 상기시켜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려는 의도다. 또한 시인의 후손들까지도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시인을 먼저 건져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다.
6~7절은 피난처와 분깃인 하나님께 시인이 다시 기도로 매달리는 모습이다. 하나님께 소리 내어 간구하고 원통함을 토로했는데(1~2절), 이제는 하나님이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실 때다. 6절의 ‘들으소서’는 ‘주목하소서’라는 뜻이자, 궁극적으로는 ‘구하소서’, ‘응답하소서’라는 뜻이다. 시인은 자신이 심히 비천하다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비천하다(6절)’는 말은 작고 보잘것없다는 의미다. 이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내려달라는 간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자기 원수들을 언급하며 구원을 간청한다. 이들은 시인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핍박하다’는 원래 ‘뒤쫓다’의 뜻이므로, 이 표현은 전쟁터에서 군인이 대적을 죽이려고 마구 쫓아가듯 시인의 목숨을 뒤쫓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더구나 시인을 쫓아오는 자들은 시인보다 강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악한 계획을 실행하는 일에 자신들이 가진 것을 휘두른다(미 2:1).
7절에서는 다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소서’라고 간구한다. “옥”이라는 표현은 실제 감옥을 가리키며, 시인이 현재 감옥에 갇혔거나 포로가 되었음을 뜻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시인이 옥에 갇혔다는 직접적인 실마리가 없기에 이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할 수 있도록 옥에서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하나님이 시인을 구원하시면 시인은 이스라엘 중에서만이 아니라 열방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시 57:9). 그럴 때 의인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갚아주셨기에(7절) 시인의 주변에 몰려들 것이다. 이전에는 시인을 돌봐주거나 도울 자가 없었고(4절), 악인들만이 시인의 목숨을 노렸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인을 건지시면, 의인의 무리가 시인에게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의 주변을 두를 것이다. ‘갚아주다(7절)’는 ‘선하게(혹은 약하게) 대하다’, ‘보답하다’의 뜻이며, 하나님이 시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의인들은 그 구원의 응답에 감사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건지심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이에 대한 감사는 그와 함께한 공동체에 간접적인 경험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의 감사와 예배의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시인은 부르짖고 은총을 구하고 원통함을 쏟고 호소한다.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자신의 처지를 “내 원통함”과 “내 우환”이라고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가슴을 쥐어짤 만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목 놓아 울부짖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렇게 목 놓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던 것이 언제던가!
-시인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친구로 여길 자도, 피난처도, 돌아보아 줄 자도 없다.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사방엔 시인을 잡으려고 쳐 놓은 올무와 함정이 널려 있었다. 마음이 상할 만큼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과 고독은 시인이 평생에 믿을 분이 누구이며, 또 자신의 길을 알아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더 깊게, 그리고 더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방황이 분깃인 하나님의 존재를 또렷하게 해주었다.
-시인의 처지는 심히 비참했다.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대적은 시인보다 강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대적보다 더 강한 하나님이 계셨다. 죽음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가망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길이 있음을 믿었다. 기어이 시인의 입에서 감사의 찬양이 쏟아지도록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어 악인들에 의해 둘러싸였던 시인이 의인들에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실 것을 믿었다. 절망적인 상황이 도리어 더 큰 희망으로 자신을 밀어 올렸다. 절망하지 않는 자는 희망할 수 없다. 아니 희망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분깃이시다.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다 들으실 뿐 아니라, 부르짖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까지 다 알고 계신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기가 막히고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목 놓아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 통곡 소리만으로도 시인의 사정은 물론이고 마음의 상처까지 다 알아차리셨다(1~3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 토해 낸다. 다 말하지 못해도 주님은 아시고 다 들어주신다.
*세상에서 당하는 원통한 일보다 시인을 더 괴롭히는 것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처지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비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기댈 피난처도 없고 위로의 말 한마디 전해줄 사람도 없게 되었다. 끝까지 자신의 신실함을 믿어 줄 이 하나 없다. 그것이 더 아팠다(4~5절). 그러나 참담한 고독의 끝자락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 변치 않는 자신의 참된 피난처와 버팀목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나의 영원한 피난처와 분깃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시인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위협 속에 홀로 남아 감옥에 갇힌 듯 오도 가도 못하는 비참한 처지임을 보게 된다(3, 6, 7절). 아무도 도움 구할 사람 없기에 피난처시요, 분깃 되신 하나님께 목 놓아 외친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삶의 터전이요, 희망임을 확신하며 절망 속에서 소리 내 부르짖는다. 환난이 밀려올 때 나는 어디로 피하는가?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때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구원의 소망 속에서 이 감사의 제사를 의인들과 함께 드릴 것을 내다본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면, 오해하고 떠났던 의인들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형제들이 다 떠났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됨을 안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제대로 관계를 맺어야 할 때이다.
*주님, 나의 피난처시요, 분깃 되신 주님 앞에 목 놓아 외치겠습니다. 세상, 인간, 환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주님만이 유일한 제 삶의 버팀목 되심을 고백하며 주님께 기대어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