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4:1-15 ‘하나님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시편 144편은 시편의 제5권에서 “다윗의 시” 단락(138~145편), 일곱 번째 시다. 140~143편의 탄식시가 끝나고, 144~145편은 왕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간구와 찬양시다. 본 시편은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을 간구하는 왕의 기도다(특히 1~11절). 시의 일부 내용은 시편 18편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 내용은 사무엘하 22장에도 기록되었는데, 하나님이 다윗을 모든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한 때에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다윗 왕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구원자시다. 이방인의 침략이 있을 때도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은 친히 하늘에서 강림하여 그의 왕과 백성을 치려는 이방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실 것이다. 왕과 백성을 축복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왕과 그의 백성은 실로 행복하다.
1.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1~4절)
시편 144편은 전쟁에서 왕에게 승리를 주실 여호와를 찬송하며 시작하여(1절),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왕과 백성의 행복을 선언하며 끝내면서(15절) 온 세상의 왕이자 능력의 용사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반석, 사랑, 요새, 산성, 건지시는 이, 방패가 되신다(1~2절; 18:2; 삼하 22:2~3). ‘사랑(헤세드)’은 언약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인애, 충성, 신실함, 사랑, 은혜, 긍휼 등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사랑”으로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고백하며, 하나님도 그의 인애로 응수하시길 바란다.
‘반석, 요새, 산성’은 이스라엘의 여러 산지에서 발견되며, 사람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장소다. 방패는 화살이나 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므로 없어서는 안 될 무기다. 이와 같은 사물들은 다윗의 “피난처”를 지칭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전쟁터에서 이것들은 요긴한 피난처가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용사들의 목숨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요새와 방패로 삼는다면, 누구든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어떻게 시인의 피난처와 구원자가 되어주시는가? 하나님은 전쟁터 시인의 손과 손가락으로 활을 잡아당기고 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대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신다. 또한 그의 방패가 됨으로써 시인을 대적의 창과 활로부터 막아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시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시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 왕을 위해 대적에게 보복하시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국의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것이다(삼하 22:48; 시 18:47).
3~4절에서 피난처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이 하나님이 돌보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님이 짧고 허무한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사랑하심에 송구스러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4절의 ‘헛것(헤벨)’은 원래 ‘숨, 입김’의 뜻으로 ‘허무함, 무상함, 짧음’ 등을 암시한다.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날도 마찬가지 의미다(시 90:9~10). 이런 연약한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으로 신경을 써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시인은 감탄한다. 시편 8편에서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네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라고 외치며, 하나님이 만물 중에 인간의 지위를 존귀하게 높여 생물을 다스릴 수 있게 하심에 감격하며 감사한다(시 8:5~6).
2. 이방인에게서 구원을 간구하며 찬양(5~11절)
5~8절에서 시인은 연약한 인간인 자신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직접 하늘에서 강림하여 이방인에게서 자신 건지시기를 구한다. 이 단락의 내용은 사무엘하 22장과 시편 18편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강림하여 시인을 구할 과거 일을 회상하고 있으며, 본 시에서는 앞으로 그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전능한 용사로서 하나님이 그의 하늘을 열어젖히고(‘드리우고’, 5절) 산 위에 강림하시기를 시인은 바란다. 산을 쳐서 연기가 나게 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강림 때 산이 흔들려 산사태가 나고, 화산이 터져 불과 연기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출 19:18; 시 18:7).
만물이 이같이 요동하는 것은 창조주가 임하신 데에 대한 반응이며, 하나님이 대적에게 진노하셨음을 나타낸다(합 3:6, 10). 시인은 하나님이 이방 원수들에게는 천둥과 번개와 벼락을 활처럼 날려 보내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시기를 요청한다(삼하 22:13; 시 18:14).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의 손을 뻗어 넘실대는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건지시길 간구한다(시 18:16~17, 47~48; 삼하 22:15~16, 46~47). 오늘 시인의 대적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온통 거짓으로 채우고 있다. ‘거짓'(샤브)은 ‘헛된, 속임, 쓸모없음’이라는 뜻이며 이방인들의 배신과 비열함을 나타낸다.
9~10절은 시인의 찬양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왕에게 새로운 간증으로 하나님을 노래할 기회가 된다. 이 새 노래로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후손 왕들을 구원하고 ‘그 해하려는 칼(직역하면 악의 칼, 10절)’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분임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능력의 용사이자 참된 주권자임을 전할 것이다. 시인이 ‘다윗’을 언급하고 또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으로써 하나님께 자신과 다윗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고(삼상 16:13), 그와 언약을 맺으셨음(삼하 7장)을 기억하시길 바란 것이다. 다윗을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게 하고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삼하 7:11, 13, 16)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켜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1절에서 시인은 이방인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거짓과 배반을 일삼는 자들이므로, 언약의 하나님은 불의한 그들에게서 시인을 건지셔야 한다. 이 내용은 이미 7b~8절에 나온 구원의 간구와 건지심의 이유를 그대로 반복한다. 이들 중간(9~10절)에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및 그분이 다윗과 후손 왕들의 구원자이심을 기술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즉, 현재 왕을 대적에게서 구하심으로써, 그분만이 진정 다윗 왕조의 구원자이며 다윗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지킨 하나님임을 증명하시도록 촉구하는 의도로 볼 수 있다.
3.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의 행복(12~15절)
이제 시인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에게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한다. 12~14절에서는 ‘우리’라는 인칭 소유격이 계속 반복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소유를 부각한다. 이들이 가진 소유는 언약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으로 얻은 것임을 암시한다. 먼저, 12절은 자녀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묘사한다. 아들들은 유년기나 청년기에도 이미 장성한 나무같이 번성하고 형통할 것이며, 딸들은 궁전의 문양으로 장식된 다듬어진 모퉁잇돌과 같이 아름답고 위엄 있게 장성할 것이다.
13~14a절은 토지와 산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한다. 각 집의 곳간에 거둬들인 각종 양식의 모습은 결실의 풍요로움, 만족, 기쁨만 아니라 뿌린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필요한 물과 빛을 주시고, 좋은 수확을 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바깥 들판의 양들이 크게 번성하고, 수소가 짐을 가득 실어 나를 모습 역시 풍요와 만족을 나타낸다. 곡식과 우양의 풍성함은 단순히 경제적인 풍요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곡식과 우양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도 필수적이므로(호 2:22; 민 28:1~8), 이스라엘의 삶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풍성하고 기쁨과 만족이 있을 것을 함축한다.
14절 후반은 전쟁과 포로의 위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평안을 기원한다. ‘우리를 침노하는 일’은 이방의 침공을 가리키고,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은 직역하면, ‘우리가 나가는 일’이다. 이것은 포로가 되어 놔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거리에서 슬피 부르짖음’은 전쟁의 패망이나 나라의 멸망으로 인한 참혹함과 비참함을 암시한다. 전쟁과 포로의 위험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과 축복을 누리는 왕과 백성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해 주신다. 자상하셔서 시인에게 칼 쓰는 법과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노래한다. 또한 친히 방패가 되고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그리하여 백성이 왕의 권위 앞에 순종하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주신다. 이 모든 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이다. 주께서 알아주시고 생각해 주셔야 의미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 자체로는 헛것이고 그의 날은 그림자처럼 덧없이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주셔야만 기억되는 존재들이다. 그걸 고백하는 자가 가장 쓰기 편리한 하나님의 병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덧없고 무가치한 존재인 시인이 할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시인은 화평의 악수를 청하고도 배반한 대적 때문에 큰물에 휩쓸려 가는 신세지만, 그는 하늘과 산과 큰물과 번개를 주장하시는 창조주를 신뢰했다. 그분이 나서시면 자신은 구원받을 것이고, 자기 날이 그림자 같은 줄 모르는 악인은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천하를 자신의 무기로 삼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세상에 속아 시달리는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지켜주실 것이다. 나아가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자기 백성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한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존귀하게 자라기를 구한다.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평화가 있는 나라를 구한다. 하지만 시인은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복이며, 모든 복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기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시인은 연약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전투를 가르치셨다. 또 승리케 하시려고 때로는 인애(사랑)로, 요새로, 산성으로, 구원으로, 방패로, 피난처로 온갖 역할을 다하시며 항상 모든 일에 함께해 주셨다(1~2절). 나도 시시각각 치러야 할 영적인 싸움에서 내 자신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견고한 산성인 하나님을 의지하리라.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이기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삶 속에서 진정한 샬롬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는다.
*인간은 한낱 숨결과도 같고,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런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각별하게 배려해 주신다. (3~4절). 이스라엘이 얻은 승리와 왕이 누리는 안정된 통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호의 때문이다. 하나님이 작고 연약한 인간의 형편을 헤아려 주시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신 것이다. 오늘도 이 작은 나를 알아주시고, 깊이 헤아려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리라.
*시인의 확신이 대단하다. 그는 곤경에 처해 있지만, 하늘과 산과 큰물과 번개를 주장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때 웃는 얼굴로 화평의 악수를 청하고 오른손을 들어 맹세했지만, 이내 거짓을 일삼는 원수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이 공의로 행동해 주시기를 간구한다(5~8절). 믿고 의지하던 세상과 사람에게 속았거나 괴로운 일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때다.
*시인은 신의를 저버린 나라 때문에 겪는 곤경에서 건지실 날에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양하겠다고 약속한다(9~11절). 구한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고 있다(막 11:24). 무엇을 구하든지 주의 뜻대로 꼭 이루실 줄 믿고 기도하는가?
*시인은 현재의 구원뿐 아니라 미래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며, 이 모든 것이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삼는 자가 누리는 복임을 고백한다. 나와 우리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 그 자체”임을 깨닫는다. 먼저 “하나님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삶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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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무것도 아닌 저를 생각해 주시고, 제 인생을 의미 있게 하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