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1-21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
시편 145편은 제5권의 ‘다윗의 시’ 단락(138~145편)에서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시다. 시편 전체에서 ‘다윗의 시’라는 표제는 3편에서 처음 나오고, 본 시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또한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는 146~150편을 시편의 결론 단락으로 볼 때, 제5권의 마지막 시가 된다. 본 시는 찬양시로서 특히 ‘알파벳 시’로서 각 절의 첫 자음이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순서를 따른다. 다만 시가 21절로 끝나는 것은 순서상 14절에 나와야 할 히브리어 알파벳 “눈”이 빠졌다. 특이한 것은 ‘눈’이 빠진 바로 앞 세 구절(11~13절)의 첫 자음을 거꾸로 묶으면(13, 12, 11절), “왕(멜레크)”이라는 단어가 되어, 왕이신 하나님을 연상시킨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다! 그의 다스리심과 하시는 일을 통해 권능과 위대하심이 드러난다. 이 하나님이 영원히 왕이 되심과 그의 왕국의 영원함이 대대에 선포될 것이다. 또한 그가 만든 만물과 그의 성도를 사랑으로 보살피시므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할 것이다.
1.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3절)
시인은 하나님을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의 왕 되심과 다스림을 찬양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지만, 그를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찬양하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5회 사용되며, 본 시편 전체(특히 1~12절)에는 ‘찬양하다, 선포하다’와 관련된 동사가 총 20회(1~7, 10~12, 21절) 등장하여 하나님이 왕이심에 대한 찬양과 선포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1~3절에서 시인의 하나님 찬양이 집중되는데, 시인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높임으로써 그의 뛰어남을 드높인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날마다 영원히 송축할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왕이시므로, 그의 이름도 영원히 기억되며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을 암시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그의 위대하심은 측량조차 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행사와 속성(4~9절)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가 행하신 일에 나타나 모든 이의 찬양이 된다. 4~7절에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능한 일(업적)’, ‘기이한 일’, ‘두려운 일’로 바꾸어 표현하여, 그의 행사가 단순한 행위나 사건이 아니라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임을 강조한다. 또한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 존귀, 위엄, 권능, 위대하심, 은혜, 공의 등이 함께 나타난다. 몇몇 시편(104; 105; 106; 135; 136편 등) 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구원과 기사를 집중적으로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와 같은 역사 회고와 찬양은 다가올 미래에도 찬양과 선포의 목적이 될 것이다(4절).
찬양의 주체로는 세대(4절), 대중(6, 7절), 개인(5, 6절)을 가리지 않으며, 백성이든 왕이든 구별이 없다. 그들의 반응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 세대는 그의 행하신 일을 칭송하고, 이를 선포할 것이다(4절).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선포를 통해 대대에 전달될 것을 암시한다. 대중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많은 선(‘크신 은혜’, 7절)에 대한 기념을 말하고 공의를 노래할 것이다. ‘기념을 말하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사를 기억한다는 의미다. 이 기념의 행위는 예배로 이어져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 속성을 선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므로 각자 하나님께 화답하게 된다. 또한 동사 ‘말하다’는 시내가 거품을 내며 흐르거나 물이 끓어 넘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선과 공의가 사람들의 입에서 선포되고 찬양하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하나님 찬양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이 무리에는 시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행사와 속성을 집중하여 묵상할 것이다(5절). 지도자와 왕으로서,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상술하고 그들과 함께 노래할 것이다(6절; 시 22:25). 왕, 대중, 세대의 선포와 찬양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땅의 모든 끝까지 전달되어(시 98:2~3), 종국에는 열방의 모든 민족이 경배할 것이다(시 18:49; 22:27). 한편, 하나님의 행사와 속성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8절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인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는 출애굽기 34장 6절의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인자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가 지은 만물에까지 닿는다.
3.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10~16절)
하나님의 행사에 드러난 위대하심에 대한 선포와 찬양(4~9절)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에 나타난 위대함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10~13절). 만물이 하나님의 선과 긍휼을 입었으므로 만물이 하나님께 감사로 화답한다. 하나님의 성도들도 함께 송축한다. 이들의 감사와 송축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다. 11~13절에는 ‘주의 나라’가 매 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그의 나라는 영광과 그의 업적이 표출되는 나라이며, 그 속에서 영광과 위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업적과 위엄의 영광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는 영원히 지속되고 변치 않는다.
14~16절에서는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영원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 모두를 다스리신다. 그가 세상의 모든 사람과 생물을 만드셨으므로 그들의 본성과 필요를 다 아신다. 이 놀라운 지식으로 백성과 모든 생물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는 돌보심과 공급하시는 사랑이 넘친다. 14절은 돌보심과 보호를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심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자를 다 붙잡아주시고 비굴한 모든 자를 일으켜주신다(14절). ‘비굴한 자’는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남에게 쉽게 굴복하는 자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숙이는 자”를 번역한 것으로 겸손한 자, 낮아진 자를 뜻한다(잠 16:9). 하나님이 돌보시는 ‘넘어지는 자’와 ‘숙이는 자’는 15절의 ‘주를 기다리는 자’의 다른 표현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15~16절은 공급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심을 묘사한다. 15절의 ‘모든 사람의 눈’은 원문에 ‘모두의 눈’으로 나와, 사람의 눈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눈을 가리킨다. 이들은 16절의 ‘모든 생물’과 연결된다. 만물의 눈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기다리므로, 하나님은 때에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욥 38:39~41). 16절의 하나님이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낌없이 베푸심과, 그의 베푸심의 질과 양과 방법 등 모든 것으로 만물에 기쁨과 만족을 주심을 뜻한다.
4. 하나님의 의와 은혜,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7~21절)
하나님의 통치에 나타나는 모든 일이 다 의롭고 은혜롭다(17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성품은 따로 뗄 수 없다. 18~20절에서는 정의와 은혜의 하나님 앞에 어떤 자들이 의인이며 악인인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려준다. 먼저 첫째, 하나님에게 의인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 모두를 가까이하신다. 하나님의 성도 또한 그를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바짝 다가갈 수 있다(시 148:14). 둘째, 의인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그의 실체와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을 때, 그들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 의인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지키신다(샤마르).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악인들은 다 멸하신다(샤마드). 시인은 이렇게 유사한 발음의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인에 대한 보호와 악인에 대한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21절은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1~3절에서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 것을 다짐했다. 이제 시를 마치며, 이를 다시금 선언하며 자신의 찬양 의지를 굳힌다. 1~3절에서는 송축의 주체가 ‘나’였다면, 21절에서는 시인을 포함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부각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예를 선언할 것이며, 이에 대한 화답으로 만물이 하나님을 송축하게 될 것이다. 이는 10절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모두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송축하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나는?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날마다 높여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위대하신 왕이시다. 지으신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 지으신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 주의 영광을 말하고 주의 능력을 선전한다. 주님 나라의 위엄과 영광을 사람들이 알게 해준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통치를 선전한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크신 분이다. 그 놀라운 사랑이 나를 구원하셨다. 다윗이 노래하는 하나님을 나는 얼마나 동의하고 알고 있을까? 내가 믿는 의의 하나님이 누구시며, 나는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답할 때, 그것 자체가 찬양이 되리라!
-하나님은 넘어지고 비천한 자들의 구원자가 되신다.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 양식을 공급하시고 그 소원을 만족케 해주신다. 인간의 탐욕이 그 유일한 보급로를 끊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공평한 복을 가로챘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스스로 걷어차지만, 오늘도 하나님은 그 놀라운 자비와 긍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놀라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를 가까이해주신다.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저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해 주신다. 그러나 악인은 다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든든한 성이 없고 방패가 없고 피난처가 없다. 하나님보다 더 위험한 신은 없다. 하나님보다 더 안전한 신도 없다. 하나님과 나의 거리가 그것을 결정한다.
*다윗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전체가 경험한 구원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 그분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다. 바쁜 일상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이 창조하신 내 존재의 신비로움을 잊고 살기 쉽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정기적으로 “잠시 멈춤”의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영혼의 생기가 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얻은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않으시고 분노에 더디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십자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역사한다. 그 은혜가 오늘을 이어간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온 피조물의 필요에 민감하시다. 쓰러지는 자를 붙드시고, 거꾸러지는 자를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약자를 보호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자라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존재 아니겠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을 부르는 이에게 가까이 계셔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뜻을 채우시며, 악인을 멸하셔서 백성을 보호하신다.
*다윗은 오늘 당장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했다면, 언제까지나 찬양하겠다는 내일의 약속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은 성경책 속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찬양할 “나의 하나님”이시다. 아멘!
*주님,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나라 백성임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주시고, 그때마다 찬양의 고백이 이어지는 삶을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