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6:1-10 나의 소망이요, 도움이신 하나님
시편 146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단락(146~150편) 중 첫 번째 시이며, 이 단락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두며 그를 온전히 신뢰하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이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왕이시다. 그가 그의 정의와 사랑으로 백성들을 먹이고, 살피고, 보호하신다. 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대대에 영원할 것이며, 이에 따라 그를 찬양하는 노래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 하나님 찬양에 초대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의 행복(1~5절)
1~2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향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친다. 이때 시인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2절)’으로 부르는 데서 그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늘 하나님을 찬양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평생 하나님만이 자신의 찬양의 대상이심이 암시되었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섬기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들어 있다.
3~5절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의 행복을 노래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시인은 ‘사람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권유를 먼저 표현한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보통 ‘귀인들(또는 고관들, 방백들, 3절)’, 즉, 지위, 권세, 부를 가진 자에게 가서 도움을 구하고, 이들을 의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을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이는 그들이 힘과 권세가 있는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구원이 자기에게 없는 인생”이라는 뜻이며, 그들이 가진 돈과 권세로 남을 한두 번 도울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남을 온전히 구할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구원조차 스스로 보장하지 못하는 자들이란 의미다.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요청받는 자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므로, 설령 남을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다 할지라도 다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난처 삼는 것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다(시 118:8~9).
시인은 또한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의 도움이며 소망인 자가 얼마나 행복한가(시 144:15)’라고 외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촉구한다. 5절의 ‘복이 있도다’는 원문의 직접적인 의미는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감탄이다. 이 단어는 상대에 대한 부러움과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를 표현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방랑과 환난의 삶에서도 함께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창 28:13~15; 48:15~16)을 상기시켜 청중에게 하나님 신뢰를 종용한다고 볼 수 있으며, 10절의 ‘네 하나님’과 연결된다.
2. 백성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6~9절),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0절)
사람들의 찬양(1~2절)과 신뢰의 대상(3~5절)이 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그의 통찰을 통해, 하나님이 다양한 모습으로 백성과 만물을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온 세상의 왕이심을 드러난다. 시인은 이를 열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시다(6a절).
둘째,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6b절). ‘진실함을 여원히 지키신다’는 말은 그의 신실함과 변화없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고 약속한 것을 그의 인애로 지키고 성취하신다(왕상 8:23~24). 그의 시간과 그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 가신다.
셋째, 하나님은 정의 재판관이시다(7a절). 세상의 불공정과 편협함과 다르다. 하나님은 온 세상 백성에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재판관이 되어 주신다.
넷째, 하나님은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다(7b절). ‘주린 자’란 돈, 건강, 자녀, 지위, 관계 등 어떤 부분에서든지 결핍된 것이 있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뜻한다(시 113:7~9).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급하시되, 기도한 것 이상으로 채워주시는 관대하신 분이시다.
다섯째, 하나님은 해방자와 구원자시다(7c절). 그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셨다(출 20:2). 사사 시대에는 열왕들의 침략과 박해와 지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여 평안을 주셨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혀간 왕들을 옥에서 꺼내 주셨다. 그들에게 잡혀간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다(스 1장). 하나님은 무엇보다 육적인 해방만이 아니라 영적 해방도 이루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그의 대속으로 모든 인간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마 1:21; 요일 2:2).
여섯째, 하나님은 치료자시다(8a절; 출 15:26).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요 9:6~7), 병든 자를 고치시고(왕하 5:14; 20:1, 7), 죽은 자를 살리신다(왕하 4:32~35; 요 11:43~44). 그는 육체적 질병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시고(시 147:3),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다(눅 4:41). 또한 개인만이 아니라 동성이나 나라가 겪는 어려움을 돌아보아 낫게 하고 풍성한 평안과 진실함으로 채우신다(렘 33:6). 종말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고통과 아픔이 사라지고, 사망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일곱째, 하나님은 낮아진 자를 붙드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8b절). 8절의 ‘비굴한 자’는 원래 ‘숙이는 자’의 뜻으로 겸손하여 낮아진 자를 가리킨다(잠 16:19). 이 단어는 145편에도 나오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둘 다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덟째,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시는 분이다(8c절).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서기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말 3:18). 하나님은 이들의 인생 여정을 아시며, 이들을 돌보신다(시 1:6). 그를 찾는 자들을 붙드시고 버리지 않으신다(시 9:10; 37:17).
아홉째, 하나님은 사회의 소외된 자의 보호자이시다(9b절). 나그네, 고아, 과부 이 세 부류는 사회에서 따뜻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자들의 대표로 소개된다. 이들은 그들의 잘못이 없을 때에도, 그들이 단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억압받으며, 합법적인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들을 특별히 학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보라고 명령하셨다(신 24:17). 하나님 스스로도 이들을 보호하며 붙들어주신다(9b절; 신 10:18).
열째, 하나님은 악인의 심판자시다(9c절). 하나님은 의인만 살피고 의인만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다(8c절). 높은 하늘에서 의인의 길도 아시며, 악인의 길도 다 살피신다(시 11:4; 138:6). 그는 정직하고 의로운 자들을 사랑하며(8c절), 환난 속에서라도 소생하고 구원하신다(시 138:7; 145:20). 그러나 강포한 악인들은 미워하고,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몫이 되게 하신다(시 11:6).
10절은 온 우주의 창조주와 왕이 되신 하나님은 시온의 영광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다스릴 것이다. 시온 백성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영원히 찬양함으로써 화답할 것이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임하여(시 145:11~13).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의 수많은 무리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세세토록 찬양할 것이다(계 7:9~12).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인은 타인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요청하기 전에 자기 영혼을 향해서 먼저 찬양하도록 외치고있다. 살아 있는 한 내내 찬양하겠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유력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고 소망을 두는 복된 자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을 항상 지킬 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을 보여준다.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로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의미다. 힘 있는 듯 보이는 인생(‘사람의 아들’)이 실제로는 힘이 없고 언제든 하나님이 호흡을 끊으시면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 영혼을 향해서도 찬양할 이유를 찾으라고 할 때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을까?
-목숨이 끊어지면 한낱 흙에 지나지 않는 인간(5절)과 달리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힘이 없고 믿을 수 없는 인간과는 달리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자기를 의지하는 겸손한 백성을 보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이다. 당장에는 세상의 힘 있는 나라나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듯 보이지만 다 헛것이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다. 그들은 죽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원하신다. 어그러진 재판을 바로잡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억울하게 갇힌 자를 풀어주고, 장애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신다. 악인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게 하지만 의인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공의가 뒤틀어진 세상을 향해 냉소하기보다는 오늘 내 주위에 내가 섬기고 일으키고 같이 고통을 나누어야 할 약자는 누구인지 돌아보아야 할 연말 아닌가….
*나의 하나님은 약한 자의 하나님이시다. 세상 신들은 대개 강하고 부요한 자들을 위한 신들이다. 역사속의 종교의 변천은 이를 증명한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신정일치 기반의 왕조들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 억눌린 자의 권익을 보호하시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묶인 자들을 풀어주시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다. 나그네와 과부를 돌보신다. 이런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이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단지 복을 주셔서 부요함을 채워주는 하나님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약한자의 하나님처럼 약자들을 대변하기 보다 기득권을 대변한다고들 한다. 어찌하면 좋을까…
*시인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고 요청하기 전에 먼저 자기 영혼을 향해서 찬양하라고 외친다. 살아 있는 한 내내 찬양하겠다며,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을 항상 받쳐 주실 거라고 확신한다(1~2절).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찾는 연습을 해야겠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더 풍성해지도록 찬양해야 할 이유, 하나님 자체를 더욱 구하고 찾으리라.
*눈에 보이는 유력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아 그분께 소망을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힘 있는 듯 보이는 인생은 실제로는 힘이 없고, 언제든 하나님이 호흡을 끊으시면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진정한 도움과 소망은 누구일까?
*주님,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기 원합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제게 행하신 것처럼, 그 은혜를 따라 저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를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소망, 나의 도움이심을 진실로 고백하기를 결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