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1:1-16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로 시작하는 세 단락(1~2장, 3~5장, 6~7장) 가운데 첫 단락에 해당한다. 선지자 미가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한다. 북이스라엘의 죄악 된 모습을 남 유다는 그대로 답습한다. 미가는 이를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예루살렘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미가가 예언하던 시기는 주전 8세기경으로, 북 왕국과 남 왕국 모두 상당한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8세기 말로 가면서 북 왕국은 강력한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주전 722년) 남 왕국 역시 명맥을 유지하지만, 예루살렘과 유대 인근으로 그 힘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만다. 역사적으로 보면 앗수르 이래, 초강대국들이 등장했고, 팔레스타인은 주전 8세기 중엽부터 실질적인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이 상황이 로마제국 시대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전 8세기는 이 지역 역사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본문은 언약소송의 형식으로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한다. 소송의 증인과 피고인을 소환하고, 또한 언약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도 등장한다(2~4절). 그리고 본격적으로 죄악에 대한 고발(5절)과 죗값에 대한 징벌이 이어진다(6~16절).
1. 표제(1절)
원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가장 먼저 나오면서 미가서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 이 말씀이 구체적인 시대에 선지자 미가에게 임했으며, 또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임을 밝힌다. 이는 미가서가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므로 말씀에 대해 반응하라고 촉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과 3:1, 6:1에서 각각 “들으라”로 시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순종하라는 것을 시사한다.
2. 언약소송, 언약적 저주(2~7절)
언약을 맺을 때 일련의 절차를 거친다. 언약 당사자를 확인하고, 직접 대면하고 언약을 맺는다. 이때 그 언약의 조건으로 법을 선포하는데, 여기에 언약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른 축복과 저주 역시 포함하여 언약식을 체결하게 된다. 선지서에는 이렇게 언약을 맺은 것에 근거하여,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법에 근거하여 심판 곧 언약적 저주를 선포하는데, 2~5절은 이런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먼저 언약 당사자인 백성을 소환한다(2절). 그리고 소송에 필요한 증인들, 곧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2절)” 역시 소환한다. 여호와는 백성의 죄악에 대해 증언(고발)한다(2절). 이 소송은 ‘성전(2절)’과 ‘그의 처소(3절)’라는 법정에서 이뤄지며, 여호와가 위엄 있게 등장하는 장면도 묘사된다(3~4절).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해 등장하는 모습(출 19:16~18; 20:18)과 비슷하게 등장한다.
5절은 북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도 확장한다. 6~7절에서 언약소송의 결과 언약적 저주가 북이스라엘을 향하지만, 결국 남 유다에게도 향할 것을 암시한다. 10~15절은 유다의 여러 마을을 언급하며 구체적으로 임할 심판을 알리며 언약적 저주를 선포한다. 먼저 5절에서는 “허물과 죄”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하나님 백성의 죄악을 지적한다. 그런데 7절은 “우상”, “음행” 등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죄악된 모습을 지적한다.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법에서 언약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다. 본문은 그 언약법에 근거하여 북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앗수르에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한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남 유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지 강대국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에 따른 언약적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 유다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스라엘에게 권고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여전히 북이스라엘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 언약적 축복을 누릴 것인가?
3. 남 유다에 대한 경고와 예루살렘 주변 성읍들에 대한 심판(8~1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며 제시된 언약법에 근거하여 언약적 저주를 선포하셨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이제 남 유다에게도 분명한 경고가 된다. 남 유다가 북이스라엘처럼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가? 미가 선지자는 남 유다의 운명을 생각하며 처절한 애통을 감출 수 없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라는 표현에서 미가의 애통을 그대로 표현해 준다.
9절의 표현은 실질적으로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남 유다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북이스라엘의 죄악과 남 유다의 죄악이 너무나 비슷하며, 따라서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미 5절에서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라는 표현에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악이 비슷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라는 표현과 “유다까지도 이르고”라는 표현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도하고 있으면서 남 유다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너무나 비슷한 죄악을 범하고 있기에 남 유다의 운명이 북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15절에서는 예루살렘 주변 성읍들에 대한 심판을 이어간다. 여기에 언급된 도시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하며, 미가가 거주했던 ‘모레셋’과 가깝다. 이 지역들이 북이스라엘처럼 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교훈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게 한다. 특히 여기 등장하는 성읍들의 이름은 언어유희를 통해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한다.
10절의 ‘가드에 알리지 말며’는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애통해하는 노래의 한 대목을 차용하는데(삼하 2:10), 본문은 반대로 다윗 후손들의 멸망을 가리킴으로써, 다윗의 애통함이 곧 다윗 후손들에게 대한 애통으로 뒤바뀐 아이러니를 묘사한다. “베들레에브라”는 티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파르’의 음가가 담겨있다. 비슷한 소리를 사용하여 잿더미와 베들레아브라의 심판을 이미지적으로 극대화했다.
11절의 “샤빌(샤파르)”은 “빛나다, 아름답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비롯된 샤빌은 ‘아름다운 성읍’의 의미다. 그런데 그들의 아름다움이 지금은 ‘벗은 몸에 수치’가 된다. “사아난 주민’의 사아난은 “나오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차와 비슷한 음가를 갖고 있다. 즉, “나오다”라는 의미를 성읍이 포위되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빗댄 언어유희다. “벧에셀이 애곡하여…”에서 벧에셀은 “제쳐둔 사람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언어유희를 통해 버려질 성읍의 암담함을 이중적으로 드러낸다.
12절의 마룻은 “씀, 고통”을 의미하는 마라에서 나왔다. 14절의 가드모레셋은 “상속하다, 소유하다”를 의미하는데, “상속과 소유, 작별”의 아이러니가 표현되었다.
이와같은 언어유희뿐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 장소들도 있다. “라기스”는 르호보암이 요새를 건설한 곳으로(대하 11:5~12), 이런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자만하고 죄를 짓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죄의 근본”이라고까지 했던 곳이다. 그 강력한 요새가 후퇴하는 병거들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말 것이다. “아둘람”은 회석벽의 굴이 많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했던 지역이다(삼상 22:1~2). 르호보암은 이곳에 요새를 구축하였다(대하 11:7). 백성들은 요새 때문에 안전한 곳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들의 소유주가 아둘람까지 이르러 다윗에게 구원의 장소였던 곳이 멸망의 장소가 될 것이다.
16절은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사로잡혀 가기 때문에 애통함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머리를 깎는 것은 그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미가에게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친히 강림하셔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 그분은 죄를 못 본 체하시거나,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임하셔서 심판하신다. 혹,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죄에 대해 단호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사마리아는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전면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사마리아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에도 미치게 된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있기에 안전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친히 성전에서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증언하신다(2절). 우리의 안전은 예루살렘이나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다.
-유다 곳곳의 도시들이 짓밟히게 되고 슬픔과 애통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전쟁을 많이 치른 이 도시들은 자신들의 병거와 준마를 의지하였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시온을 타락시킨 원인이었다. 하나님 대신 무력을 의지하였던 이스라엘은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스스로 수치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한시한 채 기대고 의지하는 헛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특권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특히 북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성전만 있으면 안전할 거로 생각하는 유다의 그릇된 “성전 불패”의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1~2절). 마찬가지로 그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으로 지나치게 안심하고 있다면, 그럴수록 주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들어야 할 때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기초를 파괴하시고, 음란한 자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신다(5~7절).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이유는 야곱의 음행, 즉 우상 숭배를 심판하시기 위해서다. 우상 숭배의 땅을 훼파하며 사마리아 신전의 창녀들을 통해 벌어들인 화대를 적군에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처럼 우상 숭배의 끝은 수치이며, 멸망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 여전히 자리를 잡은 마음의 우상들은 없는가?
*죄 때문에 받는 징계는 대적에게도 조롱거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내린 징계를, 대적들이 자기들의 승전보처럼 여길까 염려하여 블레셋 가드에는 슬픔을 고하지 말라고 하신다(8~12절). 슬픔의 애곡조차 동정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절대 심판이 예루살렘 문 앞까지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가 문 앞에 이르렀음에도, 영적으로 둔감하여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징계는 철저하고 총체적이며 또한 비극적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작은 도시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라기스 같은 대도시도 파괴되고, 심지어 선지자의 고향 모레셋도 멸망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모든 이들이 정들었던 땅을 떠나냐 하며, 순례자의 길이 아닌 도망자의 길을 나서야 한다. 마치 대머리독수리처럼 머리를 밀고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미가 선지자의 외침이 확연하게 들린다.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자세히 들을지어다(2절)” 스스로 나는 듣지 않아도 존재라고 여기는 남 유다에게 북이스라엘의 처절한 심판을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절규한다. 나는 괜찮겠지 스스로 안주하는 이들에게 절규의 외침이 들려올 때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소리가 내가 들어야 할 소리가 나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가정 먼저 듣고, 가장 끝까지 순종하려고 몸부림칠 때 능력이 나타난다.
*주님, 백성의 죄악 때문에 절규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시는 애통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삶의 모든 자리, 모든 순간에 주님을 의식하며 죄와 구별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음성을 잘 듣겠습니다. 죄와 구별되기 위해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