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3:1-12 지도자들과 선지자들을 향한 심판
3~5장은 1~2장의 주제를 반복하며 심화해 나간다. 특히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대해 도입하며, 먼저 이스라엘의 실패를 고발한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해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미가 선지자는 공의가 있어야 할 곳마다 죄악으로 대신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한다. 통치자들과 선지자들이 이익을 따라 정의를 굽게 하는 현실을 고발하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한다.
정의로 행하는 것이 통치자들의 기본 덕목이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백성들을 착취하고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릴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할 선지자들이었지만, 이들 역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이득만 구할 따름이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폐허 무더기가 될 시온이다.
1.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고발과 심판 선포(1~4절)
1절은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2~3절에서는 그들의 구체적인 죄를 묘사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선포한다. 본 단락에서는 주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는데, ‘우두머리들’과 ‘통치자들’은 지파를 정의로 다스리고 재판해야 할 자들이다. 이들은 정의를 알고 실천해야 할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압제하는 자들이 되었다.
지도자의 본분은 정의(미쉬파트)를 아는 것이지만, 이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지도자일수록 자신이 기준이 되거나 백성들의 의견이 기준이 되면 안 된다. 지도자는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나라의 질서를 세워서 하나님을 참 왕으로 뫼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 인간 지도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는 그 본문을 잊고 말았다. 자기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기준을 마련했다.
2~3절이 그 실상을 고발한다. 이들에게 백성은 한낱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에 불과했다. 갖은 착취와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광경을 짐승을 도살하여 먹을거리로 만드는 것에 비교하는 광경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백성들을 낱낱이 뜯어먹는 왕들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미가의 선포는 매우 과격하다. 하지만 이렇게 과격하게 표현한 의도는 분명하다. 그들이 백성을 뜯어먹으면서도 이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일상과 완전히 분리된 종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웃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고, 그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도록 착취하면서도 하나님께는 기도하는 그들의 이중성은, “선민 이스라엘은 무조건 안전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죽신 아=ㅓㄴ약대로 항상 자기편에 서실 것이라고 믿는 그릇된 신학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었다.
미가는 이들을 일러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는 이들이라고 표현한다. 선을 행하지는 않지만, 신앙적인 행위는 여전히 행하며 여호와께 나가 부르짖어 기도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행하는 대로 보응하실 것이다. 언약의 약속 때문에 악을 묵인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죄에 눈 감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은혜다. 그 은혜를 거절하면 남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멸망뿐이다.
2. 선지자들에 대한 고발과 심판 선포(5~8절)
지도자들이 백성을 착취하고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응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들을 돕는 중재자들이 있었음을 전제한다. 5절부터 언급되는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는 예언자들이며, 먹을 것을 주면 평화를 외치나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외치는 이들로 소개된다. 백성을 착취하는 지도자들로부터 재물을 공급받고, 그들을 향해 평화를 선포한다. 한편 이들에게 갖다 바칠 제물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다가올 재앙과 전쟁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악한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악이나 백성들에 대한 착취에는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
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들 예언자들로 캄캄한 밤을 만나게 하신다. 아무런 이상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짐작도 할 수 없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명백한 계시에 눈 감은 그들을 영원히 영적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이 세상 사람들의 욕망의 대변자로 살 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당하는 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의 심령을 깨뜨려주지 않을 때 영적인 적신호로 여겨야 한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말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 때가 바로 영적인 밤임을 알아야 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8절을 통해 보여주는 거짓 예언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참 예언자로서 살아내는 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미가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신다. ‘오직 나는’은 7절까지 등장하는 예언자들과 미가를 선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차이는 미가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미가는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정확하게 드러내고 보이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3. 고발과 심판 선포(9~12절)
미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을 싸잡아서 고발하며 책망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시온을 건축하지만, 그것은 피로 건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올바른 재판을 행해야 할 통치자들은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을 내리며,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 돈을 주는 이들이 원하는 말씀만 들려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호와를 의뢰하여”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없이, 자신들의 탐욕 충족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은 말에 있지 않고, 그 살ㄴㅁ에 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은 오직 평화이니,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그들에게는 없으리라는 평화의 약속이다. 미가는 이러한 현실을 향해 단호하게 외친다. 오직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갈아엎은 밭으로,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드실 것이며, 성전이 있는 산은 수풀로 가득한 곳으로 바꾸어버리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당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자리라는 점에서, 미가의 선포는 당시 신앙의 충심적인 토대를 뒤흔든다는 말씀이다.
다윗의 후손이 여전히 다스리고 있는 시대에,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는 이가 어찌 그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성전이 번성하고 제사장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성전산이 수풀로 바뀌리라는 예언하는 이가 어떻게 제사장들의 핍박과 박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미가의 선포는 그만큼 강렬하고 의미가 있었다. 훗날 백여 년이 지나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미가의 사역과 선포의 내용이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렘 26:17~19).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당시 주류 종교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그대로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 그것이 곧 능력이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정의를 알아야 하지만,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었고, 마가는 그 정의가 충만하였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나는?
-정의(미쉬파트)와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하여 미가가 요구하는 것은 정의를 알고 선을 기뻐하는 것, 그리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여호와를 의뢰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럴 듯한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며, 정의를 아는 것이다.
-미가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고 그로 인해 용기와 정의, 능력으로 통치자들의 죄를 드러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미가처럼 행하는 이는 드물다. 죄를 드러내기는커녕 덮으려고만 하고, 그저 평화를 전하려고만 하기 쉽다. 회개를 외친다고 해도 기도나 성경읽기나 예배 참석만을 그 열매로 강조할 뿐이다. 그 죄악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지도자를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부유한 자들의 패악을 지적하는 말씀도 듣기 어려운 시대다.
-미가는 당시 백성들이 시온을 피로 건축한다고 고발한다. 시온의 융성함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의 대가가 치러졌음을 의미한다. 지도자들이 폭압적인 방식으로 백성들의 세금과 노동력을 취하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건축하였다. 결국 그들은 파괴되고 말 성전을 지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무엇으로 짓는가?
*자기 이익을 위해 악을 즐겨 행하는 지도자들을 외면하신다. 유다의 재판관들은 말씀을 지식으로 알 뿐,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정의를 구현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 백성의 삶을 파괴한다. 이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침묵”이다(1~4절). 하나님은 이들에게 얼굴을 가리며 응답조차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떤 음성도 들려주지 않는다. 복채를 바치는 자에게는 평안을 전하고, 돈을 내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을 빙자하여 협박을 일삼는 거짓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오늘 내게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전한다.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8절). 성령에 붙들려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거룩한 말씀을 불의한 세상에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가슴이 있다. 나도 언제까지나 하나님 말씀을 먼저 잘 듣고, 그 말씀을 용기 있게 전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말씀이 왜곡된 공동체는 평화를 잃는다.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고, 제사장은 돈을 받고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 선지자들은 복채를 받고 점을 봐주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재앙 같은 것은 아예 없을 거라고 거짓 메시지를 전한다. 돈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을 저속한 사람의 말로 쉽게 바꾸면 시온을 하나님은 마치 밭을 갈듯 갈아엎으실 것이다.
*누구나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허물을 사랑으로 만져주는 말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물질적인 복이기 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분별력이 아닐까? 또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도들의 귀만 즐겁게 해주는 “포도주와 독주(2:11)”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평강이 아닌,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정의가 전해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모든 교회 사역은 그 일도, 그 사람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만 탓하지 말고, 스스로 미혹당하지 않도록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도 혹시 미가 시대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안전하다”는 믿음이 영적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지 않은가? 성도 각자의 삶에 신앙의 전통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고민하는 걸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정한 재판장이심을 압니다. 주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으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제게 맡기신 목사의 직임을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담대하게, 말씀을 자기 합리화로 해석하지 않는 날 선 말씀을 가장 먼저 제게 적용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전하도록 늘 성령님의 도움과 용기를 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