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미 5:1-15]
 – 2025년 12월 25일
– 2025년 12월 25일 –
미 5:1-15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
    
5장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선포한 4장에 대한 응답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더불어 ‘새로운 왕’과 ‘남은 자’의 개념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언약 백성들의 반응이 주목할 만하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메시아는 남은 자와 함께 대적들을 무찌르며 평화의 시대를 가져온다. 포로로 끌려간 남은 자는 그곳에서 생명의 단비로, 적들을 심판하는 사자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와의 관계가 이방의 운명을 결정한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의존했던 군사력도, 우상도, 거짓 선지자도, 이방 세력도 모두 파괴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여신다.
    
5장은 대부분의 학자가 주전 701년 산헤립의 유다 침공을 배경으로 한다고 추정한다.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2년)을 본 남 유다에도 멸망과 쇠락에 대한 위기감이 무르익었다. 5~6절에서 ‘앗수르 사람’의 언급은 남 유다의 이런 급박한 상황과 고조된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1. 이스라엘의 심판과 새로운 왕을 통한 회복(1~6절)
1절의 “딸 군대”는 시온을 가리킨다. 위기의 상황에 처한 시온을 향한 애처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뺨을 치리로다”는 수치를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힘이 없어서도, 강대국 사이에 끼어 국제정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징계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다. 회복을 위한 경고이며, 여전히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이 있다.
    
2~6절은 심판의 메시지 후에 종종 회복의 메시지가 반복된다. 이는 심판이 최종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징계이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단락은 새로운 왕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데, 2절은 이 새로운 왕의 근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3~6절은 그 왕이 행할 일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과 동일시되기도 하는(창 35:19; 48:7) 지역인데, 에브라다(에브랏)는 베들레헴의 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보아스와 이새와 다윗의 고향으로(룻 4:11; 삼상 17:12) 다윗 가문을 가리키며, 다윗 가문에서 새로운 왕의 출현에 대한 약속은 소위 다윗 언약을 떠올리게 한다(삼하 7:16). 이처럼 2절은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새로운 왕의 근원에 대해 말한다(이 왕은 메시아를 암시한다). 이 근원은 우연히 오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계획한 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장차 당할 고난과 고통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그 고통에서의 구원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그 고통에서의 구원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베들레헴이 유다 중에 작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며 현재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신실한 남은 자가 되도록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
    
3절은 회복하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다.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라는 표현은 새로운 왕을 통한 구원 이전에 고통의 시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4절에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는 새로운 왕이 돌아온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평안하게 되는 것을 묘사한다.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는 새로운 왕의 통치 범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약속한 바를 이 새로운 왕(곧 메시아)을 통해 이룰 것임을 보여준다. 5~6절은 새로운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대적을 물리치고 온전히 구원하는 사건들을 묘사한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친 사람들을 “앗수르 사람”이라고 명시하는데, 아마도 히스기야 왕 당시 주전 701년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사건과 관련되었거나,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이미 경험한 자들에게 주어진 생생한 메시지를 언급했을 수 있다. “앗수르 사람”은 남 유다의 운명과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이라기보다는 유다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릴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온은 앗수르의 공격 앞에 무력한 모습의 참담한 현실에 놓여 있다. 앗수르와 맞서기 위해 군대가 소집되지만, 도무지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소규모 군대이며, 그마저도 적에게 베일 위기에 처해 있다. 적군은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지팡이로 이스라엘 재판관의 뺨을 칠 정도로 강력하다. 시온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히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진정한 지도자(메시아)가 예고되는 것이다. 그 메시아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성읍에서 태어나 예전 통치권의 회복이 성취될 것이다. 미가는, 이 선포를 통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내비친다. 특징적인 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성읍에서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다윗이 태어나 자란 베들레헴을 통해 현재 타락한 지도자들로 가득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기대하고 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유다 지파에서 별것 없는 장소이지만, 이곳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나오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든 작고 미약하다 싶은 데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베들레헴은 엄밀하게 다윗보다는 이새와 연관된 장소다. 베들레헴에서 나올 메시아는 엄밀하게 다윗의 후예이기보다는 새로운 다윗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다윗의 후예인 왕들에 대한 강력한 부정임과 동시에 1절에서 묘사한 뺨을 맞은 이스라엘의 재판자에 대한 언급과 3장의 불의한 통치자들과 상통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가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사야 11장은 새롭게 등장하게 될 메시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사 11:1, 10)으로 언급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가와 이사야는 다윗의 후손이 아닌 새로운 다윗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에 따르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싹의 통치로 인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평화의 왕국이 이루어짐을 선포한다(사 11:6~9). 미가에 따르면 새로이 등장하는 통치자의 이름은 아예 “평화(샬롬)”다. 이는 4:1~5과 연결하여 보면 새로운 통치자, 새로운 메시아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평화(샬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남은 자에 대한 희망과 그들의 역할(7~9절)
이 단락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은 2:12~13, 그리고 4:6~8에 이어 세 번째가 되는데, 단순히 내용을 반복하기보다는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이 진행될수록 점차 그 내용이 발전되어 소개된다. 2:12~13에서 처음 “남은 자”에 대해 예언하면서, 멸망의 메시지에 이어 전혀 희망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처음으로 ‘남은 자’에 대한 계획을 보여준다. 4:6~8에서 여호와의 통치가 온전하게 되어 남은 자가 돌아오는 회복의 확실성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은 5:2~6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새로운 왕의 출현과 그가 할 역할에 이어, 남은 자의 구원과 그들의 역할을 드러내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또한 남은 자의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9절).
    
7~9절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은 이전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과 마찬가지로, 2~6절에서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예언한 것과 더불어 현재 고통당하거나 장차 고통당할 하나님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며, 동시에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하라는 권고의 메시지가 된다. 현재 처한 상황이나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서 암울하고 미래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새로운 왕 곧 메시아를 통한 회복과 구원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남은 자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는 근거와 희망을 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7절에서 ‘남은 자가 여러 곳에 흩어져 많다’는 언급은 용기와 확신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 흩어져 있어 자신들을 볼 때에는 소수인 것 같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많은 수가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또 ‘이슬’은 강수량이 적거나 건기가 오래 지속되는 기후의 특성상 비를 대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촉촉이 내리는 이슬만으로도 풀이 자라며 비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비’는 시기적절하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며, 이 역시 이스라엘의 기후에서 복된 소식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 손길은 이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들이다.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는 표현은 “기다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바”와 “야할”을 사용하여 강한 열망과 기대를 표현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각각 “희망”과 “소망”이다. 이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의 손길로 남은 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통해 역사할 것이기 때문에(8절) 스스로 의기소침해져 있는 하나님께 신실한 남은 자들은 확신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9절에서 “손을 든다”는 표현은 적을 격파한다는 의미다(시 89:13). 남은 자들이 원수를 진멸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구체적으로 권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암울한 나라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의미일 것이다.
    
    
    
3. 심판을 통한 정화(10~15절)
4~5장의 중반부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실 회복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본 단락 이하는(5~10~7:6까지) 다시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을 소개한다. 본문의 심판에 대한 말씀들이 4~5장의 회복에 대한 말씀들 이후에 놓여서, 하나님의 심판이 심판 자체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심판을 통한 회복, 즉 이스라엘을 단련하고 정련하심에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제거하시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군마와 병거, 견고한 성읍이다. 이스라엘이 열방처럼 왕을 원했던 것은 강력한 군대가 지키는 나라를 기대했기 때문이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것들로 지켜질 나라가 아니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번성기에 군마와 병거, 견고한 성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부숴버리신다. 이방 민족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되는 것이지만, 미가는 이 모든 파괴와 제거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이스라엘은 군사력이 약하여 패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들이 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패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이스라엘 가운데 가득한 복술, 우상, 주상, 아세라 목상 등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나, 여호와가 아닌 다른 것들에 굽신거리고, 다른 것에 빌고, 손으로 만든 우상들에 제사하였다. 그러나 그런 우상과 복술은 결코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아니며, 병거와 군마를 의지하는 나라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단락은 병거와 군마, 견고한 성 등과 우상과 목상, 주상 등을 나란히 평행 시키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상숭배와 군사력 숭배가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니다. 여기에 2장과 3장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만연한 사회적 불의들이 고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며 제거하신다. 그를 통해 무엇이 이스라엘에 있어야 하며, 어떤 것들이 없어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신다.
    
    
    
나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정하신 통치자가 임하게 될 것이다. 그의 통치는 평화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이는 새로운 메시아를 식별하는 기준이다. 참된 메시아는 평화를 가져오신다.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증거는 그가 가져오는 평화다. 예수께서 구약 약속의 성취라는 점은 단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에 맞춘 것이 아니라, 평화로 대표되는 구약 예언자들이 증거하고 기대하였던 새로운 미래가 오시는 주님을 통해 성취된다.
    
*평화의 통치자는 제국 바벨론도 아니고 수도 예루살렘도 아니라, 작은 마을 베들레헴으로 오실 것이다.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세계관을 정복하러 오는 평화의 메시아는 세상이 환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 힘에 짓눌린 자들이 가장 먼저 환영하도록 오실 분이시다.
    
-평화의 통치자로 인해 야곱의 남은 자들은 세상에서 이슬과 단비 같은 존재로 거하게 된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열방이 복을 받게 되었듯, 야곱의 남은 자로 말미암아 세상에 풍성함과 넉넉함이 임하게 될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는 그 스스로 복을 넘치게 받아 누리기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복이 임하게 하고, 풍성함이 임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우상숭배는 함께 갈 수 없다.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과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신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다른 종교를 가리켜서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은 쉽게 하면서, 국력이 강해지는 것과 서구 열강들과 동맹 관계를 견고히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정치 외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일관적이지 않다. 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임은 종교 영역과 일상 영역 모두에서 일관되게 고백 되어야 한다.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 평화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늘 백성이 생명을 받아 누리며 하늘 군사로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백성은 각자의 삶 속에 배어 있는 우상을 척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삶을 망가뜨린 지도자들을 벌하기 위해 이방 군대를 회초리로 사용하신다(1, 3절). 중요한 사실은 이방 군대가 유다를 공격할 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그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망은 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 쓰시는 회초리가 무엇일까?
    
*낮은 백성을 높이시기 위해 하늘 보좌 대신 낮은 땅을 선택하신다. 약하고 궁핍한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해, 몸소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의 이름은 “평화”다(2, 4~6절). 우리가 더 이상 대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을 제거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도록 말과 병거를 정리하시고, 요새를 파괴하시고, 점치는 사술과 우상들을 제거하신다(10~15절). 그의 백성에게 새로운 나라를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삶을 정결하게 하신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기 위해 당장 정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하늘 백성은 생명의 풍성함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풀 위의 이슬처럼 하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또 한편으로 사자처럼 대적을 이길 수 있다.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을 이웃에게 전달하는 자가 바로 하늘 백성들이다. 생명력이 넘쳐야 할 내가 혹시 사탄의 공격 앞에 너무 무기력하지는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의 말씀을 통해 이슬처럼 새로워지길 원하신다.
    
    
    
*주님, 하늘의 이슬처럼 생명력 넘치게, 하늘 생명을 전하는 삶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가장 연약한 베들레헴을 들어 말씀 약속을 성취하여 다윗과 같은 새로운 왕,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압니다. 늘 예수님만 바라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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