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6:1-16 예배와 일상에서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라
6장은 “언약 소송”의 형태로 되어있다. 1~8절과 9~16절로 나누어 각각 변론하는 형식으로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일반적인 문제를 고발하고 후반부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사회악을 고발한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재판이 벌어진다. 자연을 배심원 삼아 하나님이 변론하신다. 그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셨지만, 백성들은 폭력과 속임수로 성읍을 채우는 악을 저질렀다. 그래서 땅은 황폐해지고 그들은 충분한 수확물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1. 일반적인 언약 소송(1~8절)
본 단락은 선지서에서 자주 사용되는(사 1:2~3; 3:13~15; 렘 2:4~13) 언약 소송의 형식을 취한다. 언약 당사자들이 모여 언약을 맺듯이, 언약을 어긴 사항에 대해 증인과 피고인을 소환하고,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고발과 반론이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논고가 선포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2절에서는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부르고 변론할 기회를 주는데, 그 증인들로서 “산”, “작은 산”과 “따으이 견고한 지대”를 부른다. 이들은 이전에 언약을 맺을 때 증인들로 소환됐었다(신 31:28; 32:1). 이런 언약 소송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진행되는데, 소송의 결과에 따라 언약을 어겼다고 판결이 나오면, 원래 언약에서 규정했던 조항에 근거하여 징벌을 받게 된다. 대표적으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 언약의 순종 여부에 따른 언약적 저주와 축복을 기록하고 있다.
3~5절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고발이 이어진다. 3절의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에서 하나님이 고발하게 된 계기를 밝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괴롭혔다고 항변한다. ‘괴롭게 한다’는 의미는 ‘짐이 되었다’는 의미도 되는데, 짐이 된다는 것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일반적인 율법의 요구사항을 가리킨다. 미가서의 상당 부분이 지도자들에게 공의를 행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특히 선지자를 통해 비판하는 공의과 관련된 율법, 곧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의가 자신들에게 짐이 되었을 것이다. 4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먼저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5절에서는 발람 왕과 발락의 사건에서도 인간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싯딤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에 머물렀던 곳이고(수 3:1), 길갈은 요단을 건넌 후 진을 친 첫 장소다(수 4:19). “싯딤에서 길갈까지의 일”은 요단을 건너는 모든 과정 가운데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공의롭게 행하셨음을 강조한다. 먼저 속량하고 공의를 베푼 하나님께서 율법의 실천을 통해 공의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 무슨 짐이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6~7절은 이스라엘이 반론하는 내용을 다룬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율법에 규정한 제사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오해했다. 이런 제사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절차를 따라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주술적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바로 발락 왕이 발람에게서 얻으려 했던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제사와 제물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겨야 하며, 또한 언약 백성으로서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와 제물이라는 절차와 과정에만 주목하고, 그 절차의 의미와 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시했다.
8절에서 제사라는 형식의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그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서, 공동체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정의와 인자를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전혀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공의가 무너졌고 인자를 행하는 삶이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영역을 예배당에서의 예배에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실제 삶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 혜택을 누린다면 은혜로 살아가는 자답게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가 희생한 것처럼 경제적인 놀리로만 살아간느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구체적인 언약 소송(9~15절)
1~8절에서는 언약 소송에서 일반적인 문제를 다뤘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다룰 때, 일반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공의와 안자를 행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이제 9~16절에서는 언약 소송의 형식을 이어가면서서도,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9절의 ‘성읍’은 백성들 전체를 가리킨다. 온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것을 강조한다.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지혜라기 보다는 얕은 잔꾀에 불고하다는 의미다. 궁극적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한느 데서 오며, 이스라엘의 복은 그 경외함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혜롭다고 하나 어리석게 행동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인자를 행하지 않으면 지혜롭게 행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10~12절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부정한 에바와 저울과 저울추를 사용했다. 율법에서도 분명히 금하고 있으며(레 19:36; 신 25:15), 이런 행위는 명백히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다. 강포와 거짓을 행하였다. 이는 가난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는 행위다.
13~15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13절의 “그러므로 나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공동체에서 행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며, 따라서 너희가 그런데로 나 여호와도 너희에게 보응하겠다는 의미다. 13~15절의 심판의 내용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드러나는 대로, 보통 언약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의 언약적 저주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대표적으로 질병과 기근 그리고 칼에 의한 고통(전쟁) 등이 언약적 저주로 등장하는데, 본문의 심판 내용도 동일하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이 명백히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16절은 1~8절의 일반적인 언약 소송과 9~15절의 구체적인 언약 소송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선고한다. 16a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16b절은 그 죄악에 따라 판결한다.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은 이스라엘이 잘못 따른 선례를 가리킨다.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라고 평가받았던 인물이다(왕상 16:25).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아내 이세벨과 더불어 바알 숭배로 유명하며, 그 역시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더욱 악을 행하여’라고 평가 받은 인물이다(왕상 16:30). 오므리와 아합은 악의 대명사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고 한다. 수치를 당하는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이는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과 가장 잘 어울린다.
나는?
-하나님은 공의롭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기 가는 길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걸어온 길들 위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앞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자취들을 기억해야 한다. 공의로운 삶에 대란 요구는 우리응 공의롭게 대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반응이다.
-하나님 앞에 성도의 삶은 정의, 인자, 겸손한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표현은 때로 너무 종교적인 형식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가는 정의를 행하는 삶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삶,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선한 삶이라고 가르쳐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예배 영역보다는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더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의 악한 행실이 황폐함을 가져왔다. 오므리와 아합의 행실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우상숭배를 따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속이는 저울추를 사용한다면, 그것이 오므리와 아합을 따르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는 힘과 부를 이용해서 이웃에게 폭력을 행한다면, 그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신앙고백을 하든 그것은 오므리와 아합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는 메마름과 황폐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통치 방식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예배 없는 삶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며 그것은 죽은 삶이다.
*하나님은 삶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인자를 행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제사를 요구하시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명백한 것은 제물보다 제사자 자신을 더 강조하신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자기 백성과 변론하여 공의로움을 상기시켜 주신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보호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도 늘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불평하며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다(1~5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순간 우상의 유혹은 시작된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드림”과 공동체를 향한 “나눔”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진실한 마음과 행동이 결여된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예배는 “주를 향한 겸손”과 “언약에 대한 충성”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이 담겨있는 예배다. 매 주일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늘 돌아보고 보완해야 할 부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수납하는 것이 온전한 지혜다(9절). 고난을 당할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고난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회초리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도에 순응하는 것이 겸손이며, 영적 성숙이다. 나의 삶의 영역에서 지금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악인의 불의와 거짓을 지적하신다.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부정한 거래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백성의 불의한 삶을 고발하신다(10~12절). 하나님은 우리 신앙고백이 삶의 열매와 얼마나 부합한지 따져보신다. 혹시 하나님이 나에게 대해 고발하시는 것은 없는가?
*탐욕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결과를 헛되게 하신다(13~16절). 거짓과 불의로 이웃의 소유를 ㅃ앗은 자들에게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아무리 모아도 남지 않게 하신다. 탐욕스러운 인생의 수고는 헛될 것이며, 오직 수치만 남을 뿐이다.
*주님, 마음의 생각과 행위가 일치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이고 싶습니다.
*주님, 예배와 일상에서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