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미 7:1-13]
 – 2025년 12월 27일
– 2025년 12월 27일 –
미 7:1-13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미가는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사라진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깊이 탄식한다. 계속 이어지는 지도자들의 만행은 가족 구성원까지 믿을 수 없는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미가는 남은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지경을 넓혀주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반면에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일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어느 한 부분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극심한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은 “재앙이로다 나여”라고 시작하는 탄식시(1~6절)가 7장의 서두를 열고 있다. 7~13절에서 이스라엘의 결단을 촉구하고, 8~13절은 회중 찬양 형식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권고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세상에 죄악과 폭력이 가득해지자, 경건한 사람들과 정직한 사람들은 넘어지고 쓰러지게 된다.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해지고, 모든 관계가 파괴되고 만다. 그럴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으며, 그는 그를 옳게 다루시며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하실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에게로 열방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아무리 죄가 가득하여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이에게 열방이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1. 재앙이로다(1~6절)
6장의 언약 소송 형식까지 빌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돌아오기를 권고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는다. 이에 미가는 듣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재앙이로다”라고 탄식하기에 이른다. 1절의 포도송이가 없고 무화과가 없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4절에서는 1절의 비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이미 2~3장과 6장의 언약 소송 고발에서도 드러났지만, 본문은 탄식시의 형태를 빌려 선지자 개인의 죄악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이 안타까움은 미가의 선포 목적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데 있다기 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1절의 과일나무에 열매가 없듯, 2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를 행하는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없다고 탄식한다. 이 탄식은 “매복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우연한 일이거나 비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된 일이고 의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는 마음의 악한 계획을 드러내놓고 말하고 서로 공모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더 이상 마음의 거리낌이 되거나 부끄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4절에서는 그 없는 정도가 심각하여,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같고 가장 정직한ㅇ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다고 표현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자가 없기에 ‘형벌의 날(심판의 날)’이 임할 수밖에 없다(4절).
 
5~6절은 그 죄악의 심각성이 깊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이웃, 친구, 가족)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의 깊이가 더해가는 상황을 지적한다.
 
 
 
2. 징벌에서 구원과 회복으로(7~10절)
이 단락은 제사 때에 노래하는 제의시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운명을 구언과 회복으로 바꿀 것이라는 확신에서 제사 가운데 드리는 예언적 제의시로 본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탄식하지만, 7절 이후부터는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을 예언하기 시작한다. 8절에 대적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므로 조롱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조롱은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10절)”로도 표현된다. 고대에서 한 나라의 멸망은 그 나라를 보호했던 신 혹은 신들의 패배로 인식됐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너희를 지키던 신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조롱을 듣게 된 것이다.
 
10절의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라는 표현 역시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롱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나 히스기야 시대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을 경험하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과 멸망을 경험하더라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8절의 “어둠”이 암울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상징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 다시 회복되고,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될 것이다.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이겨 의기양양해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했던 그 행동 그대로 짓밟히며 상황이 역전될 것이다(10절). 9절의 “공의를 보리로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따라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그들이 돌아올 때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도 되실 것이라는 고백의 표현이다.
 
 
 
3. 성벽과 경계의 회복(11~13절)
이 단락의 시작 세 문장은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지경을 넓히는 날, 네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곧 이 날에 성벽이 건축되고 지경이 넓혀지며 백성이 돌아오면서 점차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벽의 재건은 안전함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한다(시 51:18). 12절에서는 온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의미보다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백성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
 
13절에서 그 땅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은 각처에 흩어져 있던 땅과 이스라엘의회복을 대조하는 표현이다.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는 그 땅이 황폐하게 된 원인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해우이에 따라 멸망을 당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다시 한 번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미가 시대는 지도층들로부터 모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경건과 정직이 사라지고, 오직 욕심이 지배하게 된다. 욕심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고 짓밟으며, 욕심을 위해 힘을 모으고 합치고 결합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이 경제를 살리고 ‘대박’을 약속하는 현실도 이와 거리가 멀지 않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여기는 시대이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마다 서로를 이용하고 욕망의 충족이 최선의 미덕인 양 살아가는 시대이지 않은가? 우리 공동체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이러한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가?
 
-범죄하여 넘어졌을지라도 끝은 아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침내 광명으로 이끄시며, 주의 공의를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대적들이 조롱하고 우리의 넘어짐을 기뻐하겠지만, 우리는 엎드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넓다.
 
-범죄한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 가운데 가득한 죄악을 바라보기만 하면 절망할 수 있지만,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진심으로 돌이키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시고 도리어 우리에게 열방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열방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매개체, 제사장으로 쓰실 것이다. 우리의 돌이킴에 열방이 달려 있다. 증거가 없는 증인이 되지 말고, 빛이 아닌데 빛을 비추려 하지 말자. 죄악 가운데 사는 삶을 당연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빛으로 나아와야 하리라. 하나님께로 돌이키자.
 
*미가 시대의 진정한 위기는 그 위기가 지도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지도자에 의해 확장되었다는 데 있었다. 양심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자들부터 앞서서 기준과 원칙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사적인 욕망을 위해서 남용하고 있었다. 교회는 다를까?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 손해보더라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사는 삶을 강조하고 모델이 되고 있을까?
 
*탐욕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어떤 선한 열매도 찾아볼 수 없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재판장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며,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런 타락한 사회에 파수꾼의 날,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다(1~4절). 말씀이 없는 사회에서는 친구도, 심지어 함께 사는 배우자도 믿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으면 각자의 주장이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5~6절).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세워주고 있는가?
 
*아무리 타락한 사회라 할지라도 주님과 교제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회에는 아직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성도가 바라봐야 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소망의 통로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대적을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기뻐하는 대적을 향해 “내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쓰러진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세우실 것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기 떄문이다. 성도는 함부로 지체의 아픔을 즐거워해서도, 대적의 조롱에 주눅 들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기필코 백성의 삶을 회복하시고, 대적의 악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벽과 경계를 회복하실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의 땅은 황무지로 만드실 것이다. 대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회복하길 바라시는 선과 허물고자 하는 악은 무엇인지 분별하며 나아가야 하리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주님, 타락하고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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