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9:1-9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 149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단락(146~150편)중 네 번 째 시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여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 새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열방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데 있다. 공의로운 심판자 하나님은 대적에게는 징벌을 내리시나, 그들의 성도들에게는 기쁨과 영광을 주신다.
1. 성도들의 새 노래(1~4절)
시인은 할렐루야를 외친 후새 노래를 여화께 노래하라고 선포한다.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는 하나님이 새로운 기적과 구원을 베푸셨을 때(시 40:1~3; 98:1)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후(시 33:3~4) 등이다. 새 노래는 다른 사람들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시 40:3). 하나님께 드리는 새 노래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들린다.
본 시에서 ‘성도’는 ‘이스라엘, 주민(시온의 아들들, 2절), 하나님이 기뻐하는 백성, 겸손한 자(4절)’로 소개되었다(시편 148:14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백성’으로 정의되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왕이며, 그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언약 백성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온을 사랑하고 선택하신 것은 다른 열방을 배척하거나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과 시온을 선택하여 이방의 빛을 삼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온 열방에 베풀고 열방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이다(창 12:3; 사 49:6; 갈 3:8~9). 이를 깊이 묵상하는 백성이라면 창조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시온의 주민에게 즐거움이 넘치고, 춤과 찬양이 쉬지 않는다(2~3절).
춤추며, 소고를 두드리고, 수금을 타며, 목소리로 찬양하는 모습은 홍해를 건넌 후(출 15:1, 20)나 다윗 때 예루살렘에 법궤를 들려올 때(대하 15:28~29; 16:4~6) 등 하나님의 놀라운 일, 전쟁의 승리, 절기 등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공동체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에 등장한다(렘 31:13).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기뻐하시고,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셨다(4절)’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위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선택하고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상기시킨다. 이 백성은 ‘겸손한 자(낮은 자)’로 표현된 언약 백성이며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들이다()4절).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는 말은 ‘구원으로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을 의미한다.
성도가 기쁨으로 찬양하는 데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각, 자발적인 헌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시편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즐거이 외칠 것을 당부한다(시 32:11; 95:1~2).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라면 찬양과 기쁨의 소리가 넘친다.
2. 열방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5~9절)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기뻐하고 구원허시므로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환호할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에 나타난 은혜, 주권, 임재 등을 뜻하며, 본시에서는 4절과 9절에서 설명되듯, 성도들도 이 영광을 공유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침상’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며 가장 솔직한 감정이 표출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며, 이전에 흘렸던 눈물이나 한숨이 사라지고 웃음이 생겨났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의 목구멍(입, 6절)에는 찬양이 가득 찼으나, 손에는 양날(문자적으로는 ‘두 입’)의 검이 쥐여 있다. ‘양날의 검’은 전쟁, 공격, 심판 등을 상징하며, 한쪽이 아닌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은 전쟁이나 심판에 있어 단호한 대처와 대적을 완전하 물리치려는 결의를 암시한다 할 수 있다. 한편 6절에서 갑자기 양날의 칼로 시작하여 7~9절의 열방에 대한 보복과 심판을 기술하는 것이 갑작스럽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하나님이 시온의 왕일뿐 아니라 온 세계의 왕으로서 열방의 심판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다만 7~9절의 열방에 대한 심판이 6절과 문법적으로 연결되어, 심판의 주체로서 하나님보다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에 그의 백성이 동참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최종적인 심판자이나 성도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열방 심판은 7~9절을 통해 세 가지로 묘사되었다. 첫째, 심판은 열방과 민족들에게 보복을 행하는 것이다. ‘보복’이라는 말은 열방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불의와 강포가 있었음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다(나 1:2). 하나님의 ‘질투’란 감정적인 시기와 미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외에 다른 대상을 용납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적 헌신과 사랑을 뜻한다(출 20:5; 수 24:19). 보복은 하나님께 속했으므로(신 32:35), 열방에게 하나님의 합당한 보복이 행해질 것이다.
둘째, 열방에 대한 심판으로 왕들과 귀인들이 사슬과 철고랑으로 묶임을 받는다. 왕과 권세자들이 처벌 받는 것은 그 나라와 백성 전체의 처벌을 뜻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 ‘사슬, 철고랑’은 패배와 징벌의 상징이다. 은유적으로는 환난이나 고통에 처한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사슬에 묶인 열방은 승리자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시 2:11). 셋째, 열방은 기록한 판결대로 심판 받는다. ‘기록한 판결’이란 공정한 심리를 통해 정당하게 판결되었음을 함축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내용은 하나님이 열국을 심판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할 때, 열국을 심판의 골짜기로 다 모으고, 그의 용사들도 오게 하여, 그들로 열국을 치도록 하는 장면과 흡사하다(욜 3:11~14). 이 본문들을 종말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그 왕국을 세우실 때, 메시아와 백성을 동참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열방을 심판하려고 모을 때, 시온 백성이 얼어나 열방을 깨뜨리고 탈취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미 4:11~13).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실 때, 메시아와 함께한 자들을 이슬과 단비같이 축복의 도구로도 사용하시며, 열국과 여러 민족 중에 두려운 사자같이 원수를 진멸하는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하실 것이다(미 5:1~9).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어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스릴 것을 예고한다(계 20:4, 6). 열방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므로 그 구원의 영광이 심판에 참여한 성도에게도 공유된다(9절).
나는?
-성도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할 이유가 있는 자들이다. 그것도 옛 노래를 되풀이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세롭게 노래를 지어서 부르고 찬양할 만한 이유가 있는 자들이다. 옛 노래로는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창조를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놀랍고 느닷없는 사랑과 용서, 다 표현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새” 노래를 지어서라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스려주셨고, 자격 없는 자를 당신 백성으로 불로 과분한 언약을 맺어주셨다. 이제 그 백성은 “의무”로 사는 자가 아니라 기쁨으로 “만끽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백성들이 춤추어 찬양하고 각종 악기들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곤궁에 처한(“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아름답게 장식해주시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포로 중에 있지만, 지난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그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고대하면서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자들이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로로 삼았던 자들이 이제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날에 아무도 하나님이 무기력하여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음을 지킨 의인들을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칼(두 날 가진 칼)로 적들을 심판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눈물과 쓰라림의 장소인 침상이 내일은 찬양의 장소가 되게 해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자.
*성도의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당연히 새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가 된다. 나의 삶에서도 새 노래가 삶의 변곡점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방향을 결정했을 때, 그 길에서 예기치 못한 큰 일들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목회의 여정에서 직면하는 크고 작은 영적인 전투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자연스레 흥얼거리는 찬양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만족함의 표현들이었다.
*나의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를 부른 기억을 잊지 않고, 새록새록 인생의 판에 새겨주신 구원의 흔적들을 되돌아 볼 때마다 노래하리라.
*주님, 새 노래를 부를 만큼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시인의 모습이 도전됩니다. 늘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밀접하게 동행하기를 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