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6-2:3 창조의 완성과 매우 만족하심
여섯째 날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무리적 의미의 형태나 실체를 의미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곧 속성과 본질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거룩함의 속성을 사람에게 부여하셨다. 이것은 역시 인격적 존재들인 하나님을 시중하는 천상 존재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1.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26~27절)
여섯째 날의 마지막 창조는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난제다. 먼저 복수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해석을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본문의 문맥과 기록될 당시 이런 신학적인 개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이사야와 같은 예언서에도 등장하는 천상 회의(어전회의)에서 어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모세 시대의 세계관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물론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이해 아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라는 진술과도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선언은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일방적인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별다른 의미의 차이는 없다. 창세기 5:3에서는 이 두 전치사가 “모양을 따라”와 “형상대로”로 뒤바뀌어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이는 강조를 위한 중복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27절에서 형상과 모양은 자주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9:6을 제외하고 창세기 1장에서만 나타난다. 이 표현은 명백히 인간이 다른 모든 짐승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9:6을 제외하고 창세기 1장에서만 나타난다. 이 표현은 명백히 인간이 다른 모든 짐승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가리킨다.
“우리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26절 마지막의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과 28절을 이어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도 타당하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은 왕을 신의 형상을 지닌 대리 통치자로 간주했다. 이러한 개념과 유사하게 하나님이 천상의 왕이신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속성을 부여받은 지상의 왕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지상의 특정 제국만의 왕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임명받았음을 분명히 한다. 창세기의 인간론은 고대 근동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든 인간은 왕처럼 존엄하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적 왕으로 임명된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왕국의 인구가 늘고 영토가 확장되면서 왕의 통치권이 온 사방에 미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해야 한다(시편 8편).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 다른 생물들처럼 ‘종류별로’ 창조하지 않으셨다(1:11). 인종적인 다양성은 분명히 단일한 한 종 내에서의 아종인 다른 종족들일 뿐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이 “인류 과”나 “인류 속”의 원숭이 부류의 한 종류로 창조되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인간은 오직 한 종류로만 창조되었기 때문에, 지구상의 숱한 인종들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동등한 존재이며, 인간의 기질적, 신체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적 능력과 감정, 도덕관념에 있어서는 인종 간의 우열과 격차란 존재할 수 없다.
28절은 기독교 조직신학과 생태 신학에서 ‘문화 명령’이라 일컫는 인간의 사명에 대한 진술이다. 인간이 마지막에 창조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기독교가 생태계의 파괴를 부른 지나친 자연 착취와 무분별한 개발, 그로 인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비난받는 근거이기도 하다. 특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인간의 무한한 자연의 정복과 개발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관한 관리의 책임을 포함하는 명령이지 무분별한 착취와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2. 인간과 짐승을 위한 식물(29~31절)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전에 창조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부여하신다. 인간은 그것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며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에게는 모든 식물류가 먹거리로 주어진다. 또한 자연계의 모든 동물에게도 채식이 허용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태초에는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채식만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물학적 상식으로는 먹이사슬이 존재하지 않는 생태계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 창조된 세상은 먹이사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짐승이 초식하면서 약육강식의 먹이 경쟁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생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이사야가 바라본 미래의 새로운 종말론적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사 11:6~7; 65:25).
육식은 3장에서 최초의 죄와 더불어 시작되었을 수 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 이러한 뒤틀어진 창조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동물들도 생태적 특징이 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동물의 육식과 더불어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목축을 했다는 것은 인간 역시 고기를 섭취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홍수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고 짐승의 육식이 시작되었음이 암시되고 있는 것을 볼 때(창 9:3~5), 처음 세상은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아니었고 타락 이후에도 육식이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상위 포식자의 육식이 이미 홍수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단지 홍수 이후에 ‘피 금지’의 계명과 더불어 육식이 재해석되면서 공식화되었을 것이다. 무지개가 처음 뜬 것처럼 묘사되면서 무지개가 재해석된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3. 창조의 완료와 안식(2장 1~3절)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료되었다. 하늘과 땅(천지)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다양한 구성물들(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셨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고 안식하신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다.
나는?
-인간 창조는 특별했다. “~이 있으라” 했던 다른 창조와 달리 인간 창조는 손수 하셨고(우리가… 만들자), “그 종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처럼 신성하다. 사람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형벌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의 뜻과 성품대로 다스리게 하신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여 존재하시는 방식대로 남녀가 조화와 연합을 통해 온전한 존재다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 또한 복을 주셔서 번성의 축복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릴 책임을 주신다. 자애로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연과 다른 생명들을 동반자로 여기며 관리하고 보살필 때 자신도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제사장처럼 이웃과 생명을 품고, 왕처럼 다스리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잘 구현하는 모습이다.
-안식, 창조의 절정이다. 창조가 마칠 때에 혼돈 세상(1:2)은 군대처럼 질서정연해지고(2:1), 일곱째 날 “쉼”을 통해 전(全) 창조가 완성된다. 이날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피조물에 창조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누릴 수 있도록 “복” 주시는 날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막 2:27)”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안식을 누릴 때 창조의 온전한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 안식의 나라로의 초대이며, 안식의 존재로의 새 창조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 안식(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특별한 축복과 사명을 주셨다(26~28절).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게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인간에게만 주신 고유한 속성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나는 하나님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별한 복을 누리고 있는가? 또한 나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물을 잘 보살피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을 외모와 학벌, 그가 소유한 경제력으로 평가하는 ‘비인간화’의 위기가 심각하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런 상황이나 인간이 가진 능력이 그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늘 선포해야 한다. 존중하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창조의 때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부여하신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따라, 자연 만물을 위임하신 ‘청지기적 사명’을 따라 살아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에게 먹을거리를 주셨다(28~29절). 만약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랐다면 사람과 동물, 동물과 동물은 서로 죽이지 않고 함께 사이좋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사 11:6~7). 나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의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가? 혹시 더 많은, 더 맛있는 먹거리를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과 다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무한 경쟁이다. 각박하기만한 생존 경쟁은 늘 피곤하다.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이 삶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공급자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족함”의 비결을 신뢰해야 한다. 불안이 점차 일상이 되도록 만드는 불안사회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은혜들을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심을 신뢰하며 자족할 때,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로 감사하며 살아낼 수 있으리라.
*점차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깨닫고 알아가는 성장의 걸음은 마땅히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함으로 각자의 삶을 영글게 하실 것이다. 세상 가치 기준에 마음을 빼앗겨 불안사회의 씁쓸한 구성원으로 남을 것인지,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고, 정하신 뜻을 따라 이루시는 섭리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감사와 자족의 삶을 사는 하늘시민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는 오롯이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은혜다.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심히 만족하셨다(31절~2:1).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는 식물과 동물, 물고기와 새들, 그리고 인간 모두에게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렇게 아름답고 완전하게 마무리된다. 죄와 저주에 빠진 인간과 우주를 구원하시는 일도 그렇게 완벽하게 완성될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다(2:1~3).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힘들거나 피곤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가르치고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일을 멈추고 하루 쉬는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열심이라기 보다는 탐욕에 가깝다. 쉬지 않고 일하려는 이들과 쉬지 못하고 일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리라.
*피로사회에 진입하고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는 한국사회속의 삶에서 하늘 백성은 “멈춤의 용기”를 믿음으로 발휘해야 한다. 안식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시며, 나를 돌보신다는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주일은 단지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날이 아닌, 주님과 인격적 사귐을 누리는 기쁨과 쉼의 날로 누려야 한다. 무엇보다 주일성수는 직장보다, 입시보다, 하나님의 안식이 우선임을 드러내는 신앙의 표지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구원의 평안을 맛보았지 않은가? 굳건하게 기뻐하며 누리는 주일 성수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소유한 증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피로사회 한복판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돌봄을 신뢰하며 하늘 안식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세상 가치에 이끌려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늘 가치에 이끌려 사는 삶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