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1-13 죄란 무엇일까?
뱀이 등장한다. 이 뱀은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간교함과 벌거벗음의 히브리어는 비슷하여 말놀이가 형성되는데, 교묘하게 인간의 운명을 예고한다. ‘인간은 영민하게 되기를 추구했지만, 벌거벗게 된다.’ 이 뱀의 정체는 사탄이다. 사악한 존재로 인간보다 지혜롭고 그들을 지배하려 한다.
사람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뱀은 교묘히 말씀을 왜곡하며 여자를 유혹했다. 여자의 눈에는 선악과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 열매처럼 보였다. 여자는 열매를 따 먹었고 남자도 그녀가 준 열매를 먹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두 사람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움을 가렸고 두려워 숨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행위를 물으셨으나 책임을 돌리며 회피했다.
1.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1~7절)
뱀이 여자를 유혹한다.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한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제외하고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여자가 뱀에게 부정적으로 답변하지만, 그녀의 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순화한다.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도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셨는데, 그녀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왜곡한다.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순화함으로써 뱀에게 마음의 문을 이미 열고 있다. 뱀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뱀은 나아가 죽음은커녕 오히려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여자가 금단의 열매가 맺힌 나무를 보았을 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여자는 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그 열매를 따 먹었고, 거 나아가 남편에게도 권하여 먹게 했다. 최초의 인간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대신에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선악과를 선택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학자는 “인간이 가장 먼저 추구한 것은 생명이 아닌 힘이었다”라고 해석한다.
선악과를 먹은 직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일종의 자각에 의한 인식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최초의 부부는 한 몸의 일체성으로 인해 둘 사이에 아무런 장벽과 거리낌이 없었으며, 벌거벗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부부라도 죄가 개입하자 죄 묻은 자기 본모습과 치부를 감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도 자신을 숨기려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 수치의 본질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숨긴다.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치부를 덮는다.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8~13절)
‘그날 바람이 불 때(8절)’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숲속에 숨는다. ‘바람(루아흐)’으로 번역된 단어는 단순히 자연풍이 아닌 자주 신적 바람, 즉 바람과 같은 성령의 임재, 혹은 성령의 기운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동반하여 아담과 그의 아내를 찾아오셨다는 암시가 엿보인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이 우주 공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숨은 곳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을 불러내는 재판관의 소환 명령일 뿐이다. 하나님께는 숨바꼭질이 통하지 않는다. 아담은 ‘내가 벗어서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할 뿐 자신이 숨은 본질적인 이유를 고백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실상 꾸짖음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꾸짖음에 변명으로 일관한다. 자신의 죄를 아내 탓으로 떠넘긴다. 하와도 “네가 왜 이런 일을 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아담처럼 죄를 고백하기보다 뱀에게 책임을 돌린다. 마치 뱀이 진실 속에 거짓을 숨겼듯이 하와도 자신의 탐심을 감추고 뱀이 유혹해서 열매를 먹었다고 답한 것이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친한 동료와 심지어 배우자에게마저 적대적으로 한다. 남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핑계한다면 세상에 죄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와는 자기만 죄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담까지 죄에 끌어들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아담을 도와야 할 책임을 저버렸다. 아담과 하와의 대답은 죄가 그들의 관계를 깨뜨리고, 연합과 신뢰 대신 서로를 탓하는 불신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나는?
-죄란 무엇일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야기를 살펴보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죄는 경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인간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함을 늘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선명함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선이요, 불순종이 악임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그 선명한 경계를 아는 것이 곧 피조물인 인간이 진정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선악과만 건드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만다. 그리고 그 경계를 어떤 경계나 두려움 없이 순진하게(?), 아니다 무지와 무식이라 해도 되겠다. 기어이 경계를 넘고 만다. 위대한 창조와 그 창조주의 뜻에 거스르는 위험한 반역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한계는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명한 경계를 무시한 결과였다.
-또, 죄는 무엇일까? 죄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죄는 말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간교한 뱀은 말씀의 진정성과 그 의도를 의심하게 할 만한 질문을 던지면서 접근했다. 의도적이었다는 거다. 선악과의 경고는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자유의 허용이었지만, 사탄의 입은 그런 하나님의 배려가 순식간에 부당한 것이 되게 하고 만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고는 공갈로 여기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문제는 하와의 대응이었고, 아담의 침묵이었다.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은 과장하고 형벌은 축소했다. 또, 하나님의 본의를 왜곡하여 뱀에게 틈을 내준다. 급기야 뱀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 명백하게 하나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했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말보다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을 더 좋아한 것이다. 이것이 죄다. 죄의 본질이다.
-죄는 관계를 파괴한다. 죄는 먼저 수치심을 주어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고립되게 하여 관계를 단절시킨다. 그렇게 관계가 끊어지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 마치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장기가 괴사하는 것처럼 관계의 죽음을 거쳐 존재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범죄 이후에도 이어진다. 죄가 발각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소환을 받지만, 아무도 시인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며 상대에게 주저하지 않고 떠넘긴다. 심지어 그 탓을 하나님에게 까지 돌린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실수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수습이다. 실수는 인정하고, 잘못은 사과하고, 죄는 회개하면 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서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다.
-성도의 삶, 사역자의 길도 마찬가지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역량이 못 미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핑계하며 합리화할 때 이것은 심각한 아담과 하와 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죄는 합리화를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하고, 이 합리화의 함정에 빠질 때 늘 핑계한다.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주신 경계는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도록 성령을 통해 가르침을 주신다.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이를 순종하기 위해 마음을 쏟으며 나아갈수록 이 경계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경계선을 잘 지킬 수 있다. 말씀의 경계선이 확실할수록 죄의 유혹을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무시하면 아무리 선명하게 말씀의 경계선을 그어주신다 하더라도 분별하지 못한다. 어설픈 말씀 지식이 때로 큰 오해와 위험을 불러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판받아 멸망하는 순간에도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경고와 경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다.
-결국 하나님 백성에게 중요한 삶의 태도는 “겸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말씀이 전부나, 결론이 아니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주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 한마디라도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온 마음과 힘과 정성과 뜻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찾아와 물으신다(8~13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두려워 숨은 두 사람을 부르시며 어디 있냐고 물으신다. 이처럼 오늘 나에게도 물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물으셨을까? 당연하게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만약에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우리를 찾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하나님이 찾고 물으시는 것이 은혜다! 하나님이 지금 나의 마음에 자꾸 물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듣고 응답할 때다!
*주님, 아담과 하와 증후군이 저를 잠식하지 않도록 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하여 무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 제게 허락하여 주신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한 방종이 아니라 분명한 말씀의 경계 안에서의 자유로움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먼저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인생의 질문을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질문에 늘 반응하며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