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벨의 헛된 시도, 욕심과 망상의 끝 [창 11:1-9]
 – 2026년 01월 17일
– 2026년 01월 17일 –
창 11:1-9 바벨의 헛된 시도, 욕심과 망상의 끝
 
11장 바벨탑 사건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10장보다 먼저 발생한 사건으로 본다. 왜냐하면 10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인류가 여러 종족과 언어로 분산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거주하며 나라를 구축했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은 홍수 이후에 인류의 범죄가 다시 극에 달하고, 이에 대한 심판을 받는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언어의 분리와 인구 분산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야망을 제재함으로써 인류에게 번성의 축복을 주기 위한 역설적 조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10장 70민족의 목록과 셈의 톨레도트(10~30절) 사이에 바벨 사건이 나오는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의도하는 것이 악함으로 일어난 바벨 사건이 창조 시 계시된 인류와 자연계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시날 평지에 이른 인류는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워 실행한다. 한 언어를 사용했던 인류는 창주주께서 부여하신 소명,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이행하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인류는 건축 기술을 개발하여 유명해지기 원해서 성읍과 탑을 세우고, 여호와께서는 인류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신다.
 
 
 
1. 홍수 이후 시날 평지에 정착한 인류의 야망(1~4절)
홍수 이후 인류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나탄낸다. 하나님은 홍수로 정화된 세상에서 인류가 창조시 받은 소명(1:26~28)을 이행하고, 존재 목적 즉 하나님의 쉼에 이르길 원하셨다. 하지만 인류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1~2절은 당시 인류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거주지에 모였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동쪽(지역)에 옮겨다니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정착하게 되었다(2절). 하지만 아라랏에서 남쪽으로, 곧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것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는 가나안에서 볼 때 동쪽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방주에서 내려서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착할 곳을 찾아 옮겨 다닌 것이다.
 
3~4절에서 인류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워서 옮긴다. 인류가 서로 일치한 의견은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단단히 굽자’에 드러난다(3절). 시날 평지의 흙은 건축 자재로적합하다.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태양열로 굽거나, 불에 구워 사용할 수 있었다. 시날 평지는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열로 벽돌을 만들수 있었다. 돌 대신 진흙 벽돌을 만드는 것은 건축 기술의 큰 진보임에 틀림없다. ‘굽자(3절)’는 표현은 불을 지펴 전용 가마에 굽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인류는 바벨탑을 건축하여 영구적으로 남길 계획을 품은듯 하다. 자신들이 죽어도 후손들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길 원한 것이다. 또한 진흙 벽돌 사이에 역청을 발라 건축 구조물을 견고하게 방법도 새로운 기술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든 건축 기술을 통동원하여 바벨탑을 건축하면서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고 부추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 질서에 순응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이행하기를 원하신다. 명성은 인간의 업적으로 스스로 취득하는 것이 아님을 아브라함에게 부여하신 약속(12:1~3)이 확증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의 삶을 사는 자에게 명성을 주신다.
 
 
 
2. 시날 평지의 인류의 야망을 제지하시는 하나님(5~8절)
5절은 인류의 공사를 조사하시려 강림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성읍과 탑 건축이 어느 정도 진척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꿈을 무산하기 위해 건축물을 보시려고 내려 오셨다. 하나님은 인류가 하늘에 닿게 하려고 건축하고 있던 탑을 보실 수 없으셨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이(8:21) 인류가 야심차게 쌓아올리는 탑을 보실 수 없다는 것은 그 시도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또 창조주의 전능하심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온 인류가 한 족속임은 그들이 노아의 후손이고, 아담의 후손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같았다. 하나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아담에게서(1:28; 2:15) 노아로 전수된 인류의 소명(9:1~17)을 이행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인류는 자주적인 길을 선택하여 한 언어로 의사소통하며 마음의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업적을 이루어 이름을 내고 싶었던 그들의 세계관은 그들의 선조,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것과 동일하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전락했기 떄문에 홍수 심판이 일어났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이므로 그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홍수 심판을 초래했던 상황까지 이르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신다(7절).
 
8절은 인류가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준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해서 스스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이는 인류가 아무리 자주적인 길을 선택한다고 한들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을을 보여준다. 결국 인류는 바벨탑과 성읍 건축하기를 멈춘다. 엄밀히 말하면 인류가 계획한 탑이 세워질 성읍을 건축하다가 그쳤기에 탑 건축은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3. 인류 언어의 혼잡과 온 지면에 분산(9절)
인류가 건축하다가 중단한 성읍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인류가 명성을 날리기 위해 건축한 성읍에 붙여진 이름 ‘바벨’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또한 죄절된 인류의 원대한 꿈을 기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인류의 어리석음을 역설한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건축이 중단된 성읍으로부터 인류를 온 지면으로 흩으셨다. 여호와의 이런 사역은 끊임없이 자주적인 길을 모색하는 강력한 욕망에서 인간을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의 구원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인류를 흩으신 후 창조 시 세우신 그분의 경륜을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좀 더 구체화된 계획을 제시하신다. 셈의 계보(11:10~26)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인류에게 구원의 등불을 밝혀가실 것이다(12:1~3).
 
 
 
나는?
-본문의 바벨탑 사건과 그 결과는 10장의 여러 민족과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다. 생명을 온 땅에 충만케 하려던 하나님의 계획(창 1:26)은 시날 평지에 중앙집권적 요새를 세우려던 인간의 계획으로 방해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는 심판을 통해 창조부터 이어져온 복 주실 계획을 이어나가시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져 온 반역의 역사는 정말 끈질기다.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은 한 언어로 소통하면서 당시의 영결인 함의 자손 니므롯을 중심으로(10:8~9) 시날 평지에 모인다. 진흙으로 벽돌을 굽고 역청으로 벽들을 서로 이어서 튼튼한 성읍을 세운다. 하지만 그렇게 발달한 소위 ‘도시 문화’는 하나님과 맞설 만큼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하늘에 닿는 탑의 건립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인 홍수에 대한 저항이자 ‘하나님의 존재 가치를 격하시키는 일’이었다. 스스로 이름을 내려는 것 역시 우리 이름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요, 흩어짐을 면하자는 각오 또한 생육하고 번성케 하려는 태초의 뜻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인간은 ‘자, 자’하면서 단결하여 하늘까지 대를 쌓겠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하나님은 한참이나 내려와서야 인간이 하는 일을 보실 수 있었다. 저자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익살스런 표현으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지 않는 한 인간의 성취는 늘 인간을 교만하게 하여 자신의 한계에 눈감게 한다.
 
-하나님은 ‘온 땅’에 흩어지지 않으려 하던 자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심으로써 성 쌓기를 중단시키시고, ‘온 땅’에 흩어지게 하신다. 일치단결하고 기고만장하던 인간이 고작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것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무너뜨린 채 흩어지고 있다.
 
-스스로 드높이려던 ‘이름’ 바벨은 두고두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대명사로써 치욕스런 이름이 되어 버렸다. 이 바벨의 저주는 성령께서 오순절에 충만하게 일하셔서 ‘온 땅’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난 곳 방언’으로 듣는 사건을 통하여 회복하신다(행 2장)
 
*망상의 끝은 허무함과 비참함이다. 하늘에 닿는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자들은 아담의 헛된 망상이 인류에게 어던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잊었을 것이다. 혼자만의 망상은 잠깐의 허무함으로 그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련하고 교만한 지도자에게 이끌린 공동체의 망상은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씻지 못할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재료와 기술이 있거든 허망한 일에 사용하지 말고 복되고 아름다운 일에 사용해서 오래 남기고 기억할 만한 공동체의 기쁨과 역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분이시다5절). 최고의 재료와 견고한 시공 그리고 빈틈없는 설게도와 숙련된 기술자가 동원된다 해도 하늘에 닿는 성을 건축할 수 없다. 밤낮 쌓아 올렸지만,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었던지 하나님께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날마다 묵상함으로써 풋내 나는 자랑거리와 교만함이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날마다 경계해야 하리라.
 
*하나님은 더 큰 악을 도모하지 않도록 막으신다. 시날 땅에 모인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어버리신 것(6~9절)은 징계인 동시에 은혜이다. 하나님이 막기만 하고 흩어버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의 악한 본성상 또 다른 죄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실패했을 것이다. 죄를 모의하고 합작하는 일에 휩쓸려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
 
*’말’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도 하고, 나뉘게도 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읍과 탑의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건설을 중단하고 포기하게 된 이유도 ‘언어’에 있었다.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아주 작은 일 하나도 할 수 없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는 어떠한가?.
 
*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하셨다. 심판인 것은 맞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서 헛된 생각을 같이 품지 못하게 하신 것이니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자기 욕망에 사로잡할 것이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결집, 혼란, 해산의 시날 평지 헤프닝은 인간의 뿌리깊은 욕망을 대변한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 무수한 시도들 속에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뒤돌아 보게한다.
 
*높으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 삶은 인간의 성취가 그렇게 높고 위대해 보인다. 하지만 창조와 구원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 역사의 크기를 바로 보게 된다. 그리고 온전한 비례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이만 품을 수 있는 크고 큰 은혜다.
 
 
 
*주님, 내 이름을 드러내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한 인품과 인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시날 평지의 교만한 인간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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