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1:31-12:9 ‘부르심’, ‘떠남’과 ‘감’의 순종
아브람이 등장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장면이다. 먼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란에 머문 것으로 11장은 마무리한다. 고대 사회에서 가족단위의 거주지 이동은 ‘식량난’일 가능성이 큰데 굳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는지에 대하여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에 따르면 아브람은 이미 우르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때 떠날 것을 지시 받았다고 언급했다(행 7:2-4).
대부분 아브람이 이미 우르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아버지 데라를 설득하여 가나안으로의 이주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가는 도중 하란에 도착하여 일단 거기에서 머문다. 여기에서 12:1-4의 기록과 같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확정적인 계시 전달하신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31, 12:1절)고 명령 하셨다. 그리고 네 가지의 약속을 주신다.
‘큰 민족(후손)’, ‘복’, ‘큰 이름’, ‘복의 근원(통로)’이다. 후손에 대한 것,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 포함된 복, 이름을 창대케 하는 명성에 대한 약속, 열국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받은 약속을 부여잡고 가나안 땅으로 내려 간다.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누에 여장을 풀 며 첫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린다. 이후 거주지를 옮길 때 마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가만 보니 가나안 땅 북부에서 중부, 남부를 모두 여행한다. 그가 여행 했던 모든 가나안 땅을 후손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1.분명한 비교점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주인공이었다. ‘자, 우리가 힘을 합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였다. ‘큰 성과 대를 쌓아 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런 바벨의 시도는 ‘저주’와 절망, 혼잡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가만히 아브람에게 약속하시는 내용을 살펴보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가야 할 사람과 주실 땅을 정하시면 “큰 민족(후손)”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크게 해주신다.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께서 시작하는 인생은 그렇기에 소망이 있다. 내가 주인인 세상은 혼잡(바벨)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인된 세상은 단순하다. 내가 주인되고 큰 세상을 만들고 이름을 내려는 세상은 혼잡해 질 뿐이다. 하나님이 주인된 세상은 하나님을 통해 ‘큰 민족’이 되고, ‘이름(명성)’이 나고,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나의 나라를 세우려다 무너질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 든든히 서 나갈 것인가?
2.가다 만… 순종(2:31-32)
달 신을 숭배하던 데라의 가족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떠나는 순종을 감행 했지만, 오히려 달신 숭배지이면서 교통의 요충지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 하란에 주저 앉는다. 우르나 하란이나 거기서 거기다.
환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토를 떠났지만 본토와 비슷한 환경이다. 아비 집을 떠났지만 평생 아비(신)으로 섬긴 달 신이 여전히 그들의 보이는 눈 앞에 있는 곳에 정착했다. “아비 집을 떠나라 했건 만, 육신의 아비의 집은 떠났으나 영적 아비의 집은 떠나지 못했다.” 묵상하다 보니 “여차 하면 다시 갈 수 있을 정도”의 순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은 아브람만 하는 것이 아니였다. 나도 이런 순종 참 많이 한다. 그것 참….
가다 만….
언제든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우르는 떠났지만, 하란에 머물렀다. 가나안은 아직 먼데….
아브람은 그랬는데, 하나님은 대충 하지 않으신다. 다시 나타나셔서 가라! 명하신다. 바벨의 저주(자기 뜻, 힘, 명성으로 살고자 하는)에서 구원 하시려고 시날 평지에서 떠나라 하셨는데, 시날 평지 북쪽 언저리에서 머뭇거린다. 아니 시날 평지 문화의 근원지(달의 여신을 섬기는 도시)에 아예 주저 앉는다. 떠났으나 떠난 것이 아니었다.
3.떠나라! 가라!(12:1절)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하란에 머물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셨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떠나 가라! 그런데 어디로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이미 우르를 떠날 때 가나안 땅으로 가라 하셨기에 가나안 땅으로 가면 됐다.
그런데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신다. 그러고 보니 아브람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5절) 세겜(6절), 벧엘 동쪽 산(8절), 점점 남방으로….(9절) 가나안 땅 북부, 중부, 남부 등을 거치며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정확하게 부연하자면 거주하기 보다는 나그네 생활을 이어간다. 왜냐하면 그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6절)이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시날 평지, 바벨, 우르, 하란 등과 같이 큰 성읍을 이루며 사는 도시를 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땅,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땅, 큰 민족을 이룰 후손들이 퍼져 살아가야 할 땅을 살펴보게 하신 것이다.
자신의 정착할 땅보다, 후손들이 퍼져 나가 정착할 땅을 보여 주신 것이다. 지금 안정되게 살아가야 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서게 될 땅을 보게 하신 것이다. 나의 삶도 마찬 가지 아닐까! 어쩌면 내가 편안하게 살 이 땅이 아니라 후손들이 여전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거하며 든든히 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할 땅을 보여주신대로 믿음으로 일구고 준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 아니겠나!
이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곳을 떠나라 하신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과 각종 우상이 하나님 노릇하는 그곳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참 주인되신 곳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땅을 보여 주시며 정착하라 하신다.
오늘 내가 떠나야 할 우르, 하란은 어디이며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을 옮길 때마다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일종의 하나님의 임재다.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 땅에 내려왔다. 가낭ㄴ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어 자기들이 하나님 노릇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이 땅의 참된 주인임을 아브람은 제사로 보여준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그 제사로 시작된 것이다.
-예배가 이런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내가 주인 노릇하는 나의 삶에서 왕 되신 하나님께 나의 시간, 의지, 방법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뜻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가 아니겠나! 이 땅에 세워 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예배를 통해 이미 시작된 것 아닌가!
-가는 곳 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선포한 아브람의 모습이 나의 삶에도 드러나야 하리라!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큰 민족을 이루려다 혼잡하게 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아브람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가야 할 곳은 말씀하지 않으신다(1절). 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친숙한 곳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으면할 수 없는 일이다(히 11:8).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 위해 내가 떠나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전달자로 부르셨다고 선언하신다(12:2~3, 7절). 아브람이 하나님께 받아 누릴 복은 아브람과 그의 가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뻗어나가게 될 거룩한 은혜의 빛이다(갈 3:8~9). 아브람을 통해 세워질 나라를 축복하고 그 나라를 사모하여 동참하는 자들은 아브람에게 주신 복을 받아 누리겠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소명을 상실하면 여정의 의미도 망각하게 된다(31~32절). 데라가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포기하고 하란에 머문 이유는 가나안 땅까지 가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가지 않아도 부족한 것이 없고, 목적지에 도달한다 해도 지금 있는 곳에서 누리는 풍요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남은 여정을 굳이 마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사명의 길에도 이런 순간에 직면할 때가 있을 것이다. 끝까지 인내하고 소명과 사명의 여정이 중단되지 않도록 간절히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리라.
*땅의 소유권은 언약 당사자에게만 주어진다. 가나안 족속이 먼저 그 땅에 살고 있어도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이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는 함의 자손 가나안이 아니라 셈의 자손 아브람이기 때문이다. 언약 당사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나는 아브람의 영적 자손으로 하나님 나라의 참 소망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복있는 삶은 ‘하나님이 주어’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인간이 ‘내가’라고 자기 주장을 했을 때(창 3:10~12; 11:1~9) 파멸이 찾아왔지만, 하나님께서 ‘내가’라고 주권을 행사하실 때 인간에게는 진정한 복락이 찾아온다. 내가 주어가 되어 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셔서 그의 뜻대로 나를 빚으시고 인도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서고 하늘 복락이 내게 임한다. 이 믿음이 굳세라!
*복있는 삶은 ‘떠남’과 ‘감’의 삶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신다. 떠나라, 가라, 스스로 자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조건으로부터 떠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신다.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아갔고, 불임의 아내를 데리고 나아갔다.
*복있는 삶은 ‘복의 통로’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 한 사람만을 위한 복이 아니다. 그는 복의 화신이요 복의 통로다.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씨가 형성될 뿐 아니라 그를 보고서 하나님 나라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게 하실 것이다.
*주님, 주님이 제 삶의 ‘주어’이시기에 담대하게 주님의 목적을 이루는 동사의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명령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따라 떠남과 감의 순종으로 삶을 채우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나라가 임한 지금, 그 복을 드러내고 들려주며 보여주는 복의 전달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