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6:1-16 하나님의 세밀하신 은혜, 브엘 라해 로이
아브람의 믿음은 늘 한결같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째가 되었다(3절). 아브람의 나이는 80대로 접어들었다(16절). 아브람의 믿음은 다시 흔들린다. 이러한 연약한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보편적인 특징이기도하다. 아내 사래가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기로 한다. 사래의 계획대로 하갈은 임신하지만, 하갈의 임신은 사래에게 기쁨보다는 괴로움을 더 가져왔다. 사래는 하갈의 업신여김을 받아야 했고 이로 인해 아브람을 비난했으며 하갈이 도망갈 정도로 학대한다. 광야에서 천사를 만나고 돌아온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1. 후사에 대한 사래의 대안(1~3절)
15~17장은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 내용이 중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15자과 17장이 아브람과의 언약으로 땅과 아들을 주실 것을 확증하는 내용이다. 16장은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긴장과 불안을 조성한다. 가나안에 정착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사래는 자기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이용하여 아들을 낳을 계획을 세웠다. 현실적으로 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하지만 동방 왕들의 습격 이후 롯을 구한 후(14장)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들과 땅을 주실 것을 약속했었다(15장). 그런데도 사래는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아브람이 애굽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것처럼 자신의 후사를 잇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기의 출산을 막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상기시키며 하갈을 통해 법적 자녀를 얻고자 제안한다. 애굽에서 사래가 아브람의 속임수를 묵인하고 동의해줬던 것처럼(12:11~16), 이번에는 아브람이 사래의 적법하지 않은 방법으로 후사를 잇는 데 동의한다. 후사를 주신다는 언약의 말씀을 재차 들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으며, 증표로 언약을 맺었음에도(15장) 아브람의 이런 결정은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 사래와 하갈의 갈등(4~6절)
사래의 제안으로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였고, 곧 임신한다. 하갈은 애굽 여인으로서 추측하기는 기근으로 아브람과 가족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때 그곳에서 샀거나 바로에게서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12:10~20). 하갈이 애굽 여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의 민족 이스라엘을 만들려고 하시는 데 이방인이 연결되는 것이므로 긴장감을 일으킨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되었으며 주된 이유는 그들이 이방신을 이스라엘 가족과 민족에게 들여옴으로써 우상숭배를 촉발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신 7:3~4).
하갈이 임신함으로 사래는 자기 계획대로 자식을 얻을 기회가 생겨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인 하갈이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자기가 여주인인양 으스대며, 임신하지 못하는 사래를 얕잡아본다. 그러나 하갈은 사래의 주선으로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음을 잊었다. 자기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자기가 섬겨야 할 여주인이 사래임을 간과했다.
사래는 임신한 이유로 자신을 얕보는 하갈의 태도에 분노하며, 이 모든 일의 근원을 아브람의 탓으로 돌린다.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자고 제안한 사람이 정작 사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브람에게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며 책임을 따져 물었다. 사래의 추궁에 아브람은 적절한 대안을 주지 못하고, 하갈이 사래의 종이니 좋을 대로 하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아브람의 허락을 얻은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한다.
사래의 하갈을 통한 후사를 얻자는 제안은 당시 사회 관습으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과 계획이었으나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다. 이것은 가정의 불화로 멈추지 않고 훗날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민족 간의 불화로까지 이어진다.
3. 하갈의 도주와 하나님의 약속, 이스마엘의 출생(7~16절)
7~9절에서 사래로부터 도망하여 남쪽 술 지역으로 가는 길인 가데스의 샘에 이른 하갈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녀를 위로하고 갈 길을 알려준다. 천사는 “사래의 여종 하갈아(8절)” 부르면서 하갈이 사래의 여종임을 상기시키며 안부를 묻는다.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하는 중이라고 대답한다. 천사는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하갈에게 사래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말한다.
10~12절은 천사가 하갈에게 사래에게 돌아갈 것을 말한 후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장래에 대한 말씀을 전달한다. 놀랍게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했던 축복의 말씀과 같이 하갈의 아들을 번성케 하여 그에게 수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가 있는 ‘이스마엘’로 지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들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고통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미천한 종인 하갈의 고통도 친히 보살피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의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축복하시는 자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장래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신다. 첫째, 이스마엘은 ‘들나귀’같이 될 것이다. 이 말은 그가 광야에서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며 살게 될 것임을 뜻한다. 둘째, 이스마엘은 다른 사람들과 교전 관계에 놓이며 그의 형제와도 마찬가지다. 마치 사래와 하갈의 적대 관계처럼 이스마엘과 이삭 즉, 이스마엘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간에 대립 관계가 지속될 것임을 뜻한다.
13~14절은 위와 같은 하나님의 사자의 방문과 위로와 약속에 놀라고 감동하는 하갈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나를 살피시는 여호와’라는 의미의 ‘엘로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가 나타난 샘(7절)을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브엘 라해 로이)’라고 불렀다.
험한 광야 길에서 하갈과 태중의 이스마엘을 살린 것은 목마름을 해결하고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오아시스, 샘물이 아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보시며, 안전과 자손의 전성까지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 자신이 잉태한 아들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지키시고 이름을 붙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하갈은 광야 여정의 꿀맛 같은 휴식을 누릴 오아시스와 샘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우물을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우물”로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이 나의 “브엘 라해 로이”로 바라보는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바래본다. “브엘 라해 로이(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우물)” 아브람과 사래의 믿음은 요동쳤고 하갈은 학대받아 도망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브엘 라해 로이”가 여전하기에…. 오늘 나의 삶도 아멘이다!!
15~17절에서 하갈은 헤브론으로 돌아와 때가 되어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다. 이로써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하갈에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다. 이로써 이스마엘에 대한 나머지 예언의 말씀(10~12절)도 성취될 것이다. 실제로 이 말씀은 17장에서 다시 확증되며(17:20), 25장에 가서 마침내 이루어진다(25:13~16).
나는?
-새 아담으로 선택받은 아브람은 첫 아담처럼 하나님의 목소리보다 아내의 말을 듣고(창 3:17) 아내의 종 하갈을 첩으로 맞아 대를 이으려고 한다. 10년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었고, 85세라는 나이는 이미 인간적 능력의 한계를 한참 넘었음을 인식했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예가 통용되고 있었기에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일만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온전치 못한 순종이었다. 이 불순종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무리 합리화한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명분과 실리가 진리의 말씀을 앞서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세상의 합리적인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는 어리석은 불순종을 경계해야 하리라.
-하갈은 여종의 본분을 잊고 자기 주인 사래를 저주한다. 그러다가 아브람을 저주(멸시)하는 자에게 미칠 것(12:3)이라고 했던 ‘저주’를 받고 광야로 쫓겨난다(겉으로 보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친다). 아담과 하와처럼 사래는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발생한 실수를 아브람에게 전가하고 아브람은 아내에게 전가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는 쉽게 무너지고 오만과 책임회피와 불평만 난무한다.
-범죄한 인간을 찾아가주셨던 하나님(3:9)이 이제 임신한 몸으로 고향 애굽으로 도망치는 하갈의 고통을 보고 만나주신다. 가데스(근처)의 샘(14절)까지 도망쳤다면, 벌써 여러 날을 걸었을 것이며, 임신한 여인에게는 몸과 마음 모두 무척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하갈은 여전히 자신의 과오는 생각하지 않고 사래 탓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갈과 태중의 아이를 긍휼히 여기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다시 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하는 수고를 요구하신다. 이는 우리가 돌아서서 잘못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할 때 하나님의 긍휼이 진정 우리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애굽으로 도망치는 광야 길에서 하갈과 태중의 아이를 살린 것은 ‘샘물’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보시고, 안전과 자손의 번성까지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사래의 수하에서의 하갈의 미래 역시 아브람이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친히 나타나신 ‘엘 로이’의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하갈도 하나님을 만난 샘의 이름을 “브엘 라해 로이(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라 부른다.
*순종해야 할 말과 거절해야 할 말을 분별해야 함을 느낀다.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10년이나 기다렸고, 이제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다가 아브람의 나이가 85세인 상황에서, 여종을 통해 자녀를 얻으라는 사래의 제안(1~3절)은 그럴듯한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아브람이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권위 있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일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날마다 그 뜻을 구하며 나아가기를 굳게 결심해본다.
*아브람이 말씀의 권위를 스스로 잃었을 때, 가장의 권위도 잃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삶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았기에 아브람은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했고, 이것은 가정에 큰 어려움과 불화를 초래했다. 임신한 여종 하갈은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고, 모욕을 당한 사래는 남편 아브람을 원망하며 하갈을 학대한다(4~6절).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불신과 반목으로 서로 힘들게 된 것이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먼저 순종하는 삶의 질서가 서 있어야 일상 속 질서도 자연스레 세워진다. 나는 가장 먼저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순종하리라 결심하며, 공동체를 이와 같이 섬길 것을 재차 다짐해본다.
*고통 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갈이 받은 고난은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결과지만,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그녀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기회를 주셨듯, 하갈에게도 기회를 주어 아브람의 집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데 이 모든 은혜는 자신이 지은 잘못을 인정하고 이전에 멸시하던 사래에게 돌아가 그 뜻대로 모든 일에 복종해야 이루어진다. 하갈의 작은 순종은 이후 하나님의 큰 은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행하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잠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면서 날마다 그 긍휼과 사랑을 간구하며 나아가기를 사모한다.
*주님, 더디 가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붙들겠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도록 힘을 부어주십시오.
*주님, 결국 하나님의 응답과 은혜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순종하는 걸음 끝에 만나는 성취의 은혜를 소망하며 나아가는 걸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만 의지하는 마음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