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7:1-27 언약과 할례, 언약에 대한 반응
아브람의 나이 99세가 되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이스마엘의 나이 13세이지만 사래의 태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갈을 대리모로 사용하여 상속자를 얻으려한 계획은 심각한 가정불화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칭하시고 후손과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재확증하신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명하신다(1~14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래를 사라라 부르라 하시고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집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행한다(15~27절).
1.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_언약의 재확증과 할례(1~14절)
이스마엘이 탄생한 후 13년이 흘러 아브람은 99세가 되었다. 하나님은 13년간 묵묵부답이셨다. 인간적으로 아브람은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생물학적인 나이가 돼버렸다. 어쩌면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적자로 인정하여 상속자로 삼으려 했던 것이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암시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 샤다이(전능자 하나님)’로 소개하신다(1절).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평가받았던 조상 에녹이나, 노아와 같은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이에 언약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2절). 아브람과 15장에서 언약을 체결하였으니, 이것은 언약 수립에 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둘 사이에 이미 수립된 언약을 유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보인다. 즉, 그 언약을 따라 아브람의 후손을 크게 번성케 하겠다고 재차 확언하신다.
아브람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3절). 하나님은 엎드린 그에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4절)을 말씀하신다. 이미 맺은 언약의 약속들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거듭 확증하신다. 앞서 번성의 축복은 단순히 별처럼 많은 후손의 중다함만 표현되었는데, 본문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아브 하몬 고임 – 아브라함과 말놀이하는 것)’가 될 것이라는 표현과 함께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신다. 아브라함은 ‘압(아버지)’과 ‘람(높다)’ 조합으로 ‘높임을 받는 아버지’를 의미한다.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일 수 있고, 혹은 육신의 아버지 데라나, 아브라함 자신일 수 있다. 저자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의미를 부여한다.
‘번성’할 것이라는 사실이 수차례 반복된다(6절). 아브라함에게서 민족들이 나오고 왕들이 나올 것이다. 왕들에 대한 언급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릴 권세를 암시하고, 특히 다윗 가문의 왕들에 대한 계시로 해석한다. ‘고임’은 혈통으로서 민족과 체제를 갖춘 나라를 뜻할 수 있다. 20절을 통해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민족들과 나라들은 이스마엘 자손들을 포함한다. 이런 맥락이라면 6절의 ‘민족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날 모든 후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7절에서 진행되는 언약의 다짐은 언약의 후손으로 제한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으로 ‘세울 것’이라고 하신다. ‘언약을 세우다(헤킴 베리트)’는 해석은 최초의 언약 수립을 뜻하는 ‘카라트 베리트’와 비교하여 이미 수립된 언약의 확립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둘의 차이는 없다. 다만 언약 수립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강조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7절의 언약을 세우는 것은 15장에서 이미 체결된 언약을 재확립하는 것이 분명하다. 영원한 언약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후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신다(9절).
10~14절에서는 언약의 증표로서의 할례를 소개한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것이 내 언약이니라”가 먼저 선언되고 ‘너희 중에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이어진다. 하나님은 언약의 증표로 모든 남자의 할례를 명하신다(11절). 신생아는 난지 8일 만에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의식을 진행했다. 할례의 대상은 아브라함 혈통의 모든 남자들과 돈으로 사서 고용한 이방인들(외국에서 온 거류민, 오늘날의 영주권자들)이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의 특징은 함께 거주하는 타국인이라도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할례를 받아야 했다. 아브라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 지켜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언약을 깨트렸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끊어짐”의 형벌은 사형과 같은 무서운 형벌이다.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조기 사망 혹은 대가 끊김, 열조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징벌로 해석하기도 한다.
2. 사래에서 사라로_씨 약속의 보증(15~22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셨다(15절). ‘귀부인’이라는 뜻은 바뀌지 않았으나, 이름의 변경과 더불어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는 아브라함의 이름 뜻인 ‘여러 민족의 아버지’과 짝을 이룬다. 사라는 아들을 얻을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아브라함의 이름 뜻인 ‘여러 민족의 아버지’와 짝을 이룬다. 사라는 아들을 얻을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올 것이다(16절). “왕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며, 그분은 하늘의 시온산에서 통치하시고(히 12:22~24) 다른 모든 왕들의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훗날 사라의 아들 이삭에게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는데, 에서의 후손은 여러 민족으로 나뉘며(창 36장), 야곱의 아들들은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을 형성한다.
아브라함은 다시 엎드린다. 이 엎드림은 경외의 엎드림이기보다는 단지 형식적인 엎드림이다. 그는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100세가 된 자신과 90세가 된 사라가 어찌 자녀를 낳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웃음을 표현한 동사 “이츠하크”는 이삭의 이름 “이츠하크”와 동일하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이름의 의미는 동사 미완료형으로서 ‘그가 웃을 것이다’이며, 그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일수도 있고, 아브라함일 수도 있지만, 본문은 아브라함이 웃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 잘 살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한 번 아들에 대한 약속을 확고히 하신다. 아브라함의 소원대로 이스마엘에게 복 주어 그는 크게 번성할 것인데, 열 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이 약속은 25장에서 성취된다(창 25:13~16). 하지만 여기서 이스마엘의 후손 지도자는 왕이 아닌 ‘나시’로 번역했다. ‘나시’는 보통 왕의 아래 신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래에게서 이삭이라고 이름 붙이게 될 약속의 아이를 허락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과 언약을 견고하게 할 것이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올라가셨다,
3. 아브라함의 할례 실행(23~27절)
23~27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자신의 집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푼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 이스라엘은 13세 때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13년간의 하나님의 침묵을 깨고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리신다. 아브람의 나이 99세는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육신의 나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지연이 약속의 폐기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는 ‘열국의 아비’가 될 언약을 주시고, 이를 확증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있을 것이고, 거기서 열왕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오직 ‘사래’에게서 난 자손을 통해서만 성취하실 것이라고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처럼 ‘사래(나의 여왕)’에게도 ‘사라(여왕)’란 새 이름을 주심으로써, 이제 사라가 한 가정의 여주인이 아니라 ‘열국의 어미(여주인)’가 될 것임을 분명히 해주셨다.
-이름의 변경은 운명의 변화, 혹은 과거와 분리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뜻하기에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새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기대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시되, ‘영원한 언약’을 주시어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영영히’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약속에 대한 기억과 믿음을 그 실현을 보게 될 후손 대대로 요구하시려고 난 지 팔 일 만에 아이를 할례하도록 명령하신다. 하나님이 정말 바라신 것은 그 언약을 믿으며, 구별된 백성답게 사는 마음의 할례(신 30:6; 렘 4:4; 겔 44:7, 9) 아닐까?
-아내 사라를 통해 복 주실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엎드렸지만(3, 17절), 순종을 위한 엎드림이 아니라 불신의 웃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90세의 늙은 아내의 상태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서는 하나님께 나름대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인 이스마엘을 통한 후손 번성을 결정해 주시라는 무례한 불신의 조언까지 하게 된다.
-가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이 세상의 상식의 틀에서만 거하던 이가 자신의 비웃음을 큰 우음으로 바꾸어 주실(21:6) 주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 믿음 없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곤 한다.
-아브라함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는 말씀을 따라 주신 약속을 믿고 할례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모세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아브라함의 할례를 진술함으로 그의 순종이 얼마나 철저했고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13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로 알리신다. 아브람의 나이 99세는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는 터무니없는 나이였다. 13년의 기다림은 그나마 남은 아브람의 믿음마저 흔들기에 충분했다. 희망이 절벽 앞에 서면 전능한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미덥지 않은 하나님이 되기 십상이다. 전능한 하나님에 대항ㄴ 신앙은 약속을 이루실 그분의 때와 방법에 대한 신뢰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유효기간을 설정하면 안 된다.
*불가능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일말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99세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시점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모든 문제와 한계 속에서 완벽하게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지혜중의 지혜다.
*아브라함은 89세의 사라가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장자로 인정해달라고 간구한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가능성의 범주 안으로 축소시킨 전형적인 것이다. 즉, 사람이 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처럼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시면서 믿음을 촉구하신다.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에 아브라함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모에서 낳을 자식의 이름과 낳을 시기(“내년 이 시기”)까지 못 박아 주신다. 불신의 비웃음을 기쁨의 웃음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의 웃음을 감동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였지만(17~18절),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자 즉시로 명령하신 대로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이러한 즉각적이고 철저한 순종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고 올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는가?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날에’내가 보여야 할 믿음의 반응이 과연 무엇일까?
*주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여 주셨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예수님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큰 능력으로 계획하신 일을 거침없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와 믿음으로, 즉시로, 철저하게 순종하며, 오늘을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