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8:1-15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직접 방문하셨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 셋이 아브라함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거주지를 방문한 것으로 전개되지만, 저자는 그들의 등장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것임을 미리 알려준다. 이것은 꿈과 환상 속의 현시가 아닌 직접적인 만남을 위한 현시였다. 두 천사를 동반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여 사라의 임박한 출산을 예고하신다.
하나님과 천사들의 방문에 아브라함은 극진한 대접을 행한다. 24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일 년 후에 아들이 생길 것임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으나, 육체적으로 인간적으로 연약한 사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에도 웃고 만다.
1.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1~5절)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꿈과 환상 속 방문이 아니라 직접 방문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를 거주지로 삼아 살고 있었다. 햇볕이 강한 정오 시간,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있던 것을 잠시 멈추고 쉬고 있을 시간, 아브라함도 늘 그랬듯 낮잠을 자려고 누우려 막사로 들어올 때 낯선 사람 셋이 그의 시선에 들어온다.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다. 문맥의 흐름은 막사로 오는 도중이 아니라 이미 도착하여 아브라함의 마중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어떤 상황이든 본문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최선을 다해 맞이했음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이 맞은 나그네 셋 중 둘은 여호와의 천사이며, 하나는 여호와시다(3, 10, 13~15절). 아브라함은 자신이 ‘은혜를 입었으면’ 막사에 머물다 갈 것을 간청한다. 이는 나그네들에게 막사가 마음에 들면 쉬어 가라는 의미의 초청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셋 중 한 명을 ‘내 주여’라고 부른다. 원문에서는 단수 ‘아도니(나의 주)’가 아닌 이보다 훨씬 정중한 호칭인 복수 ‘아도나이(나의 주인님들)’로 부른다. 이는 세 사람을 함께 부른 호칭이 아니라 일종의 ‘존엄 복수(혹은 장엄 복수라고 부른다)’로서 한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보통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다. 영어 번역본들에서는 대개 “my LORD”로 표기한다. 그는 세 사람의 대표인데, 독자는 그가 여호와인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이 부담 갖지 않도록 간편한 편의만 제공해드리겠다고 말한다(3~4절).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씻고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라고 간청하며, 음식을 ‘조금’ 가져올 테니 허기를 달래 기운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정오의 뜨거운 햇볕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려 한다.
2.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한 아브라함(6~8절)
아브라함은 급히 막사로 돌아가 사라에게 빨리 음식을 준비하라고 한다. 그런데 나그네들에게 말한 ‘조금’의 음식이 아니었다. 밀가루 세 스아는 무려 24리터다. 이것으로 급히 빵을 만들라는 것은 무교병을 만들라는 것이다. 또 하인을 시켜 육질이 좋은 살진 소를 잡으라고 한다. 살진 송아지가 아닌 ‘소’라고 했으니 만약 400kg의 소를 잡으면 1인분 200g 기준 거의 800인분이, 1인 400g으로 늘려도 500인분의 막대한 고기가 나온다. 이렇게 준비하는 것은 거의 마을잔치 수준의 음식을 급히 준비하라는 것인데, 결국 아브라함이 준비한 식사는 그가 거느린 모든 식솔들도 참여하기 위한 음식 준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소를 잡는 것은 성경의 예에서도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또, 소화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엉긴 젖(발효 우유)과 우유도 준비했다. 나그네들에게 왕처럼 융숭한 대접을 한 것이다. ‘조금’의 물과 음식이 아니라 ‘큰’ 식사였다.
세 나그네는 나무 아래서 그 풍성한 음식을 먹었다. 이 기사는 앞서 등장한 소돔 왕과 대조되며, 살렘 왕 멜기세덱 이상으로 친절하고 정중한 아브라함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고 인용한다.
3. 임박한 이삭 탄생과 사라의 웃음(9~15절)
하나님께서는 이미 17:19에서 이삭 탄생을 통보하셨다. 그리고 본문은 다시 한 번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친히 찾아오셔서 이삭의 탄생을 확정하신다. 세 나그네는 막사 밖에, 사라는 막사 안에 있었다. 이는 당시 외간 남자가 방문할 때의 관례였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9절). 아브라함은 막사 안에 있다고 대답한다. 문맥상 이런 대화는 불필요하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사라가 어디 있는지 아시고, 또한 여인들이 막사 안에 머무는 것은 당시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나그네들이 아내 사라의 이름을 부를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여호와는 내년에 다시 아브라함을 방문할 것인데,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ㄱㅡ때 사라는 이들의 대화를 막사 안쪽 입구에서 엿듣고 있었다. 사라가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통보는 그들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했으며, 특히 사라는 생리가 끝난 노년기의 여성이었다. 물론 창세기 서사는 그녀가 65세였을 때도 여전히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미모를 유지했음을 애굽에서 증명해주었다. 더 놀랍게도 이 일 직후에 그랄 땅에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을 때도 90세의 나이였는데,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빼앗겼다(창 20장). 하지만 20장에서는 사라의 미모가 뛰어났다는 언급이 없는데, 추측하기로 사라가 21장에서 임신을 한 것으로 보아, 90세의 사라의 여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잠시 회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자신이 이미 늙었고 남편 또한 노쇠하여 더 이상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이미 17:17에서 사라의 나이가 90세임이 언급되었다. 아브라함은 소리 내어 웃었으나(17:17~18), 사라는 속으로 웃었다. 사라는 감정을 숨겼는데, 그녀의 웃음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아브라함의 웃음을 표현한 동사 ‘이츠하크’는 그대로 ‘이삭(이츠하크)’의 이름이 되었다. 사라의 비웃음을 표현한 동사 ‘티츠하크’도 이삭의 탄생을 예고한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으나, 그녀의 웃음은 매우 냉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사자들은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벌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사라는 오랜 세월 그 약속을 기다렸고, 이 일로 하갈과 갈등을 빚어 큰 상처를 입었으며 오랫동안 낙심하며 실망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나그네들이 범상치 않게 보였어도 그들의 수태고지를 아무런 의심없이 마냥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정상일까? 그녀의 반응은 비록 불신앙적이긴 하나 충분히 공감된다. 그렇기에 믿음이라는 잣대로 오랜 고통을 겪는 인생의 상황과 형편을 함부로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었다는 것을 드러내며 더욱 강하게 내년에 아들이 태어난다고 확증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 그분이 행하실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사라는 확신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는 여호와시고 여호와의 사자들이 자신의 집에 방문했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서둘러 둘러댄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웃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마음까지 꿰뚫고 계심을 확증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는 별다른 책망을 하지 않으신다. 사라의 이런 모습은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까지 읽는 나그네가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떨결에 자신의 말을 부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인데도 ‘장막 문에서 뛰어 나가(2절)’ 지나가는 나그네를 초대했다. 그들의 정체도 모르면서 마치 가장 귀한 손님을 초대한 듯 물과 음식을 제공한다. 손수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준비하는 그의 모습에 진정성이 보인다. 그는 사심없이 아낌없이 베푼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접했다. 아브라함은 마치 객과 주인이 바뀐 듯 참으로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섬긴다.
-목마르고 배고프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내미는 손길과 환대를 통해 오늘도 주님은 나의 대접을 받고 계신다(마 25:35). 아브라함처럼 ‘눈을 들어’ 내가 먼저 청하여 섬겨야 할 지체가 나의 삶에 찾아올 때 나는 손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조건없이 섬길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가 태어날 확정적인 때를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신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을 통해 속히 이루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한 걸음씩 가르쳐주시면서 지금껏 25년을 기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는 ‘아들’ 탄생의 약속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는 것이었다. 믿음은 빨리 달리는 것도 아니고, 뒷걸음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때를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들 탄생보다 부모 탄생이 먼저임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해주신 것을 성급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동행하는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함을 25년의 시간을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뿐 아니라 나에게도 가르쳐주신다. 젊은 시절 성급하게 매달렸던 것들이 그때는 미동도 없이 애를 태우며 시험들게 했지만, 지금와 돌아보니 이미 주셨고, 또 주실 것을 소망하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주시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내년 이 맘때’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오늘을 살아내자.
-사라가 믿지 않고 속으로 비웃자, 하나님은 가장인 아브라함을 꾸짖으신다. 아내의 불신을 확신으로 바꿀 만큼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와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을 때는 시기하고 불평하던 사라가 자식이 생긴다는 말에는 되려 불신의 미소로 반응한다. 아비 집을 떠나 땅을 양보하고 할례를 행할 만큼 믿음이 있으면서도, 아내의 오랜 불임과 끊어진 경수를 생각하면 불신이 고개를 들곤 했던 것이다.
-믿음은 약속의 실행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약속하신 이의 성품과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내 삶속에는 얼마나 있을까? 예측 가능하고, 실현 가능하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믿는 믿음의 정수는 언제 확고히 설 수 있을까?
*하나님은 친히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행하실 일들을 알려주신다(1, 9, 10절).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도록 반복해서 가르치시고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나를 온전하게 세워주시기까지 여러 방법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더욱 붙잡아야 하겠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이시다(13~14절). 나이 많아 생리도 끊긴 상황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라의 냉소적인 미소는 단순한 실소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 어떤 상식보다 우선되는 상식은,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마음속에 불신과 냉소가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짐으로 불신과 냉소의 마음을 환기시키고, 신뢰의 마음으로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신앙을 뛰어넘어 일하신다(15절). 비록 사라가 하나님의 일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말씀을 비웃었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셔서 불신앙의 웃음을 기쁨과 감사의 웃음으로 바꾸어주신다(21: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표정으로 듣고 반응하고 있을지, 스스로 성찰해보면 어떨까?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1~8절)에서 그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웃과 주위 사람들을 잘 섬기는지, 가까운 사람뿐 아니라 낯선 사람도 환대하는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 25:40)을 기억하며 일상에서 순종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아브라함이다.
*믿음은 합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사라의 비웃음은 현실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하나님은 현실을 뛰어넘는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으로 제한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우리의 삶을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주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늘 되새기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일상에서 환대하는 삶을 지극히 당연하게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아브라함의 웃음, 사라의 냉소가 저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씀 가운데 늘 환기하며,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