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내려오심’, 아브라함의 ‘올려드림’ [창 18:16-33]
 – 2026년 01월 25일
– 2026년 01월 25일 –
창 18:16~33 하나님의 ‘내려오심’, 아브라함의 ‘올려드림’
 
여호와 일행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소돔 성으로 향한다. 여호와의 소돔 성 방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들린 큰 울부짖음 때문이다(20절). 두 성의 죄악은 심각했고 부르짖음은 하늘을 찔렀다. 이것은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탄원이었다. 아벨의 피의 울부짖음(차아크)이 하늘에 닿았듯(창 4:10), 소돔은 권력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민중을 수탈하고 학대하는 사회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계획을 알려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을 멸하지 마시기를 재차 간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성에서 열 명의 의인을 찾는다면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답을 듣는다.
 
 
 
1.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을 확증하다(16~19절)
하나님과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후한 대접을 받은 후 소돔을 향하여 떠나려 한다.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행하며 환송한다. 이에 하나님은 잠시 더 머물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에 관한 것이었다. 17절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로 번역된 원문의 문장에는 주어 ‘내가’가 두 번 강조되었다. 이 ‘내가’라는 표현속에 담긴 것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와 언약을 맺고 놀라운 약속을 준 바로 내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끔찍이 아끼며 친밀하게 대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것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 외에도 새 이름 ‘아브라함(17:5)’을 받았으며, 앞으로 하나님의 ‘선지자(창 20:7)’와 ‘친구(대하 20:7; 사 41:8)’로 칭함을 받게 될 자로 여겨주셨다.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친밀히 여겨주신 아브라함에게 머지않아 혹은 장래에 하실 일 중 두 가지를 말씀해주신다. 첫째,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재확인시켜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강대한 나라를 만들고,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임을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재확증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12:1~3, 7~8; 13:4; 15:1~19; 17:1~21).
 
본문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밝히신다(1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단지, 한 사람을 선택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의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강대한 나라로, 그들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걳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의와 공의의 삶을 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대한 나라’나 ‘천하 만민이 받게 딜 복’은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힘이나, 재물이나 권력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과 ‘의로운 살’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닮아가는 나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나라다. 이 ‘강대한 나라’를 출애굽기 19:6에서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정의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또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초월한 복이다.
 
 
 
2.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여호와의 확인(20~21절)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머지않아 하실 두 번째 일을 밝히신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지금 하나님과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그곳의 죄악이 확실한지 확인하고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 소돔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소돔과 고모라를 직접 방문하지 않으셔도 다 아신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의 심정을 갖고 있는 듯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이나 본문의 창세기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는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다.
 
소돔가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크고 그들의 죄악이 중하여 지나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이 애굽의 학대와 고역을 견디다 못해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출 2:23).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성적 타락, 폭력 등으로 애굽의 학대에 비해 그 죄질이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창세기 13:13에서 롯이 소돔을 향해 떠났을떼 이미 악일 들끓고 있었다. 그 후 적어도 15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 지역에 대한 탄식과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에스겔 선지자는 소돔의 죄악상이 대대로 속담거리가 되었다고 증언했고(겔 16:48~50), 신약 시대에도 불경건함의 대표적인 예로 꼽힐 정도였다(유 1:7).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고발하는 부르짖음에 친히 ‘내려가서(21절)’ 진위를 살피겠다고 하셨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듣고 보는 행동이나 지상으로 내려와 상황읊 점검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정함, 심판을 내리기 전 숙고와 숙의하심이 확실히 드러나게 한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은 종국적으로 소돔의 심판과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 항상 멸망만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멸망 중에도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고,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내려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가져왔다. 또 ‘다시 내려오심’은 하나님 나라 완성을 궁극적인 심판과 함께 가져올 것이다.  
 
 
 
3. 아브라함의 중재와 탄원(22~33절)
22절은 하나님의 두 가지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두 천사들이 소돔을 향해 길을 떠나는 모습이다. 17절에서 환송 후에도 하나님이 남으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고, 22절에서 하나님께서 남으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용건이 남아있어서이다.
 
23~33절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서술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기를 간구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조카 롯과 그의 식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갈대아 우르에 남은 친족들이 있겠지만,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함께 동행한 피붙이는 이제 롯밖에 없다. 실제 아브라함은 이전에도 전쟁 포로가 된 롯을 구출하고 약탈당한 소돔의 재물과 사람들을 다 찾아주었다. 이번에는 심판 직전의 롯과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롷ㅅ이나 다른 의인들을 못 본 체하고 악인과 함께 멸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거나 그들을 같은 자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고 호소한다. 의인들을 위해 악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청한다. 아브라함은 50명의 의인으로 시작해서 45, 40, 30, 20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명의 의인으로 숫자를 줄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나머지 악인들을 구하시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아브라함은 인간이 흙으로 와다 흙으로 돌아가는 미천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하고(27절), 흥정하듯 자꾸 숫자를 깍으면서도 하나님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면서(30, 32절)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소돔에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한편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요청하는 숫자의 의인을 소돔에서 찾는다면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매번 응수해주신다. 하나님은 죄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지만 또한 긍휼과 사랑이 더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는 의인 10명의 숫자에서 멈춘다. 그는 차마 다섯 명이나 그 이하까지 내려가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의인이 몇 명이든 심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며, 소돔은 심판을 받아도 할 말 없는 타락한 성읍이 분명했다. 다만 소돔에서 롯과 두 딸만이 구원을 얻는데, 성경은 롯이 의인이었다고 평가한다(벧후 2:6~8; 참조. 창 19:12~13). 소돔의 극악한 죄로 인해 아브라함의 중재는 실패했다.
 
대화를 마친 후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헤어졌다. 여호와는 하늘로 복귀하셨고, 아브라함은 막사로 돌아왔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와 복의 근원이 될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이 세우기 원하시는 나라는 여호와의 의를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백성들이 있는 거룩한 나라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나라가 아니다. 이를 우리의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리라.
 
-두 천사는 소돔으로 떠났다. 여호와 홀로 아브라함을 만나 그의 계획을 드러내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실 복과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할 심판이었다. 이런 계시는 통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역사의 파트너로 책임 있게 참여하기를 기대하신듯 하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주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기를 분투하는 나를 통해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신다(롬 12:1~2).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세우기 원하시는 나라는 여호와의 의를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백성이 있는 거룩한 나라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무너진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아우성(부르짖음)을 들으시고는 ‘내려가겠다’고 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의 동참(동행)을 바라신 것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심정으로 죄에 분노하고 또 마지막까지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긍휼의 마음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하신다.
 
-‘내려오셔서’ 살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을 통해 이 땅의 만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게 하였다. 지금도 ‘내려오셔서’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세상속에서 세상을 읽도록 영적 감수성을 민감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지…
 
-아브라함은 선지자로서(20:7)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하여 기도한다. 무턱대고 다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여 공의로운 판단을 구한다. 의이의 숫자를 50에서 45로, 다시 40에서 30으로, 20에서 10으로 다섯 번이나 줄여가면서 의인의 구원을 호소한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공의로운 판결은 하나님과 의인의 명예를 드높이고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또한 아주 겸손한 태도로 중보한다. 자신을 ‘티끌 같은 존재’로 고백함으로써 세상을 심판하시는 창조주 앞에서(25절) 자신은 감히 주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턱없는 간구라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바란 것이다. 포기할 줄 모르고 제 뜻만 조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 한 명을 향한 애통함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의 뜻과 의를 행하는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강대한 나라가 되어 찬하 만민에게 복을 주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17~19절),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그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받은 나도 마찬가지다. 부름받은 대로 하나님 뜻과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안에서 여러 민족을 구원하시되, 동시에 불법을 행하는 나라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억울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친히 ‘내려오셔서’ 죄악의 실상을 조사하신다(20~21, 23~32절). 과연 오늘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땅에 여전한 부당한 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들과 그로 인한 억울한 울부짖음을 덮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심판을 지연시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중보의 삶을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촉진하는 악을 행하는 자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강대한 나라로 만드시는 목적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셨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위임된 이 책임과 사명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과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삶에 생명을 걸련다.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거듭 호소한다. 열 명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을텐데, 소돔과 고모라에 그만큼 죄악이 만연하여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기도로 세상을 위해 마음과 시간을 쏟아보자.
 
*하나님의 ‘내려오심’이 심판을 위함이 아니라 구원이 되어 얘수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받아 누렸으니, 깨진 이 세상을 위해 중보기도의 향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주님,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를 행하고 심판 아래 있는 이들을 위해 중보하는 성숙함으로 제 삶을 채워보겠습니다.
*주님, 나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기에,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세상을 위한 중보의 사명을 ‘올려드리는’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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