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0:1-18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애굽에 내려갔을 때(12:10~20)처럼 그랄로 내려간 아브라함이 사라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사라를 누이로 속인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써 사라와 아브라함의 목숨을 살리시고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조차 선지자로 부르며 자기와 왕 아비멜렉 사이의 중개자로 사용하신다.
1. 사라의 두 번째 위기와 하나님의 개입(1~8절)
1~2절에서 그랄 땅에서 엄습한 사라의 두 번째 위기를 다룬다. 아브라함이 현재 거주하고 있던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지역에서 가데스와 술 사이의 그랄 땅에 잠시 머무른다. 사해 반도 북서쪽의 그랄 땅은 전통적으로 블레셋의 주요 거점 지역이었다(창 26:1). 아브라함은 그곳에서도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며 다녔다. 아마도 그랄을 점유하며 살던 거친 해양 세력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 시기의 아브라함은 다시 믿음이 쇠락한 듯 보이며, 이에 따라 그는 다시 아내를 빼앗기는 비극을 당한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후궁으로 삼고자 데려간다. 씨에 대한 약속이 깨질 위기가 다시 닥쳤다.
3~8절에서 사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서술한다. 먼저 “그 밤에”는 사라를 빼앗긴 당일 밤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밤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밤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다. 그가 사라를 취한 이유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시고 사라가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사실을 알려주신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면서 무고를 주장하며, “주께서 의로운 백성을 멸하시나이까?”라고 묻는다. “백성”이라는 표현은 멜기세덱이 이 문제가 자신 혼자만이 아닌 백성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 가운데 힘 있는 군주가 유부녀를 취할 수 있었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부녀와 간통하는 자에 매우 엄격한 규율이 있었는데, 모두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레 20:10; 신 22:22).
아비멜렉은 억울해하며 아브라함 부부의 거짓말을 지적한다. 둘 다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에 무고한 자신이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주장한다(5절). 그러고는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무고함을 아시고 그가 부지중에 범할 수 있는 죄를 꿈을 통해 막아주셨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6절). 하나님은 꿈에서 아브라함에게로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가 ‘선지자’이며, 그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만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아침에 일어난 아비멜렉은 모든 신하를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것은 들은 신하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8절).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며(창 18:17),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사람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다.
정황상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일과 하나님의 현몽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꿈에서 아비멜렉은 막아 그가 사라에게 접근할 수 없게 했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현몽 이전에 이미 조처했음을 의미한다. 어떤 조치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문맥에 따라 추론하기로는 독종 피부 전염병일 가능성이 크다(창 12:17). 아비멜렉은 질병이 발생하여 사라와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아비멜렉의 아내뿐 아니라 수하의 모든 여종의 태를 닫아 출산을 막으셨다. 그 여종들은 아비멜렉의 후궁들이 아닌 궁녀들이었다. 궁내의 모든 여자가 임신을 못 하게 하신 것이다.
2. 아브라함을 추궁하는 아비멜렉(9~13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자신이 그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지 추궁한다(9절). 그는 아브라함이 의도적으로 자신과 백성으로 하여금 ‘큰 죄’를 저지르게 할 뻔했다고 의심한다. 바로는 자신의 안위만 염려했지만, 아비멜렉은 백성까지 염려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합당하지 않은 일, 곧 간음죄를 저지르도록 몰아갔다며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10절)고 따진다.
아비멜렉은 여호와라는 분을 경외하고 그 부하들도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8절).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오판했다. 그는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내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했다고 변명한다. 이 부분에서는 아비멜렉보다 아브라함이 더 부끄럽게 보인다. 아브라함은 앞서 애굽 땅에서 이미 동일한 봉변을 당한 바 있었으면서도 어리석은 일을 반복한다. 아브라함은 “그녀는 정말 나의 이복누이다”고 항변하지만, 그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내라고 밝히지 않았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짓말이다(12절).
훗날 레위기의 근친상간 금지 규례에서 누이는 물론 삼촌 간의 결혼도 금지된다. 다만, 사촌간의 결혼은 허용된다(레 18; 20장). 그러나 레위기 구례가 만들어지기 전의 족장 시대에는 그런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삼촌 간의 결혼은 물론 심지어 반-누이와의 결혼도 허용되었다. 이것도 일부다처제가 그랬던 것처럼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 속에 하나님이 잠시 묵인하셨던 과도기적 관행으로 보아야 한다.
3. 아브라함이 받은 선물(14~18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막대한 하사품을 주면서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양 떼와 소 떼, 그리고 여러 명의 남종과 여종을 선물했다. 그는 아브라함이 원하는 땅을 정해서 기거하도록 허락한다. 이것은 잠시 머무르는 것이 아닌 항구적 거주지로 아브라함이 원할 때까지 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호의는 아브라함을 내쫓은 바로나, 아브라함이 롯에게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고 한 호의와 비견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이는 그가 가나안 땅의 궁극적 상속자가 될 것을 암시한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당한 수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은 천 개(추측하기로 은 천 세겔)를 별도로 준다. 1세겔은 보통 11.4g으로 추정되므로 약 11kg의 은이다. 이런 모습 역시 아비멜렉이 별 책임이 없음에도 자진해서 아브라함에게 과도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여전히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임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애굽에서의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이방 왕에게서 풍성한 선물을 받아 거부(巨富)가 된다. 아브라함의 요동치는 믿음과 상관없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은혜를 받은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 그의 기도로 아비멜렉 집의 모든 여자가 닫혔던 태가 열려 출산을 시작했다(17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복의 근원, 복의 통로로서(창 12:1~3)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은 롯의 위기에는 하나님과 소통하며 기도했지만, 자신의 위기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애굽에서처럼(12장) 약속의 자녀를 잉태할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준 것이다. 약속이 성취되기 직전(창 17:19)에 또다시 큰 시험이 닥친 것이다. 신앙의 경주란 연륜, 직분, 경험에 상관없이 매 순간 그리고 끝까지 전력해야 넘어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 시험이 끝이 없이 밀려왔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처는 더디기만 했다.
-아브라함의 불신이 아비멜렉을 범죄하게 만들 뻔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살고 하나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알게 한 경건한 사람으로 비춰준다. 도리어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가 될 아브라함이 약속의 외인이던 아비멜렉에게 추궁과 꾸중을 듣는다. 주님을 알려야 할 빛의 자녀들이 세상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삶으로 빛을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복의 근원이 잠깐 화의 근원이 된 이 이야기가 던지는 함의는 꽤 묵직하다. 오늘날 빛 된 존재로 부름을 받았으나 어둠의 자녀처럼 여전히 행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무엇인가?
-경건한 아비멜렉이 자기도 모르게 지을 뻔한 범죄를 막으시고 사라를 보호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한 “자손”의 약속(15장)도 지키신다. 또한 하나님의 경고는 경건한 아비멜렉 역시 애매하게 희생당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요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역할을 회복하신다. 특히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 집에 닥친 불임을 고치시고 자녀를 낳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의 출생도 이 창조의 능력으로 꼭 이루어질 것임을 선명하게 보이신 일종의 말씀 성취 전조였다.
-아브라함은 회개 대신에 변명으로 일관한다. 남을 탓하고(11절), 사실이지만 신앙 양심에는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12절), 사라와 공모한 일이라 하여 과실을 누그러뜨리려 한다(13절). 반면에 아비멜렉은 아무 대꾸 없이 오히려 아브라함의 변명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철저한 사후 처리를 한다. 실수에 대한 보상뿐 아니라 위기를 가져온 이에게 거할 땅을 내주고 실추된 사라의 명예까지 회복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친히 이루어가신다. 이미 사라는 약속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창 17:19)를 받은 상태였고, 설령 아브라함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고 해도 아내만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애굽에 내려갔을 때처럼 다시 한번 아내를 누이로 속임으로 사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사라를 보호하셨다. 우리 연약함과 불신실한데도 크신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야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다.
*본문 13절은 왜 아브라함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지 그 원인을 가늠하게 한다. 우르를 떠날때부터 사라와 당시의 풍습과 관련하여 “가는 곳마다 누이로 부를 것”을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애굽과 그랄에서의 이런 모습은 가는 곳마다 반복되었던 그의 연약함임을 알 수 있다. 남편 있는 예쁜 여인이라도 왕이나 군주가 취할 수 었었던 악습에 대한 두려움이 반복되는 연약함을 보여준 이유였다. 어찌 아브라함만 그렇겠나. 나도 삶의 어떤 영역에서 늘 넘어지고 반복되이 나타나는 연약함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이런 자신의 연약함을 그랄 지방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이런 일을 행한다는 ‘편견’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두려움은 편견을 불러오고 편견은 결국 죄와 타협하게 만든 것이다. 늘 반복되이 넘어지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자꾸 남탓, 세상탓 하는 것은 아담이 하와를 핑계히고, 하와가 뱀을 핑계하는 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 죄에 대해 직면하고 솔직하게 인정하여 오히려 죄를 분별하고 털어내는 삶이어야 하리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사람들이기에 사라를 누이로 속인 것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 이방 백성에게 신실하지 못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1~2절, 11~13절). 아브라함의 삶이 보여주듯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일당백의 용사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아내를 누이로 속일 만큼 비겁한 겁쟁이가 될 수도 있다. 지금 내 믿음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닫으셨던 아비멜렉 집의 태를 열어주셨다(7, 17~18절). 이 사건은 아직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임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라의 닫힌 태도 이처럼 다시 여실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드러내시고 복의 근원으로 높이신다.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성도가 믿음으로 바르게 살지 못할 때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비멜렉에게 합당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책망받는다(9~10, 14~16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지금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받는 지탄이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선한 양심과 보편적인 상식의 시선에서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교회의 허물을 비난하는 그들의 아우성에서 교회를 변호할 수 없어서 무안하다. 교회는 도리어 자기이익과 사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묘하게 비튼 일부 왜곡된 유명 지도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추앙하고, 자신들은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무서운 편견에 함몰되어 이런 비난의 무안함을 정죄한다. 이 난처한 상황의 한국교회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럼에도 연약한 아브라함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증거하도록 기회를 주신 섬세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무지와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능하신 역사를 보이셔서 “역설”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오늘도 교회가 이 땅에 서 있는 것 아니겠나!
*주님,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욱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책망을 듣지 않기를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