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수, 말씀과 빛인 하나님 [요 1:1-18]
 – 2026년 02월 01일
– 2026년 02월 01일 –
요 1:1-18 예수, 말씀과 빛인 하나님
    
예수님을 소개하는 책을 쓸 때, 첫 말을 어떻게 시작할까?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고민했던 바일 것이다. 마가는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제목으로 시작하고(막 1:1),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한다(마 1:1). 누가는 책을 어떻게 썼는지 서문(눅 1:1~4)을 쓴 다음, 역사가적 기술로 시작한다(눅 1:5). 반면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말씀)로 소개하는 시(詩)로 시작한다. 예수 이야기를 그를 찬양하는 시로 시작하다니, 멋지지 않은가?
    
시(詩)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절제해서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본문은 예수 찬양시다. 요한은 이 짧은 시에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창조자라는 것, 그 창조자가 피조물을 새롭게 하려고 인간이 되었다는 것, 이것을 깨닫고 그분을 창조자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사람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1. 태초에 계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1~5절)
요한은 “태초에(엔 아르케)”라는 단어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며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계획의 기원이 되는 단어로 손색이 없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의 첫 단어인 “태초에(베레시트_창 1:1)”를 연상케 한다.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의 시공간에 “말씀(로고스)”이 존재했다. 요한은 이 ‘말씀(로고스)’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아직 ‘예수’라는 칭호가 등장하지 않지만(17절), 요한복음의 시작을 ‘예수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모든 것을 공유하며 유일무이한 사귐 안에 존재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이신 “신적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말씀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은 창조의 중재자이자, 근원임을 선언한다. 모든 피조 세계가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된다. 그 어떤 피조물도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3:35). 모든 피조물에 창조주의 성품과 영광이 아로새겨지듯 ‘말씀’의 성품과 영광도 마찬가지다. 11절은 말씀은 만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또, 예수님은 생명과 빛이다(4~5절). 창조성이 말씀의 외적 행위를 강조한다면, 생명은 말씀의 내적 능력을 표현한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그가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을 주는 주체라는 뜻이다. 이 생명의 짝으로 ‘빛’이 등장한다. ‘생명과 빛’은 창조의 키워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첫 피조물이 ‘빛’이다. 빛은 생명을 공급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성을 가진다. 그 빛의 기원이 “말씀”이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 마치 빛을 비추듯 세상 속으로 들어와 생명을 공급한다. 모두 말씀이 생명과 빛의 출처라는 점을 부각한다. 생명과 빛은 죽음과 어둠과 대조되며, 향후 펼쳐질 예수의 사역인 흑암을 밝히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구원 사역의 복선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요한은 그 빛을 “사람들의 빛(소유격)”이라고 정의한다. 목적격으로 직역하면 “사람들을 위한 빛”이 된다. 사람들은 그 빛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참조, 고후 4:4~6). 피조 세계를 재창조하실 예수님의 오심은 죄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오심이다. 빛이 들어왔을 때 어둠(죄가 지배하는 세상 전체)이 결코 이기지 못한다.
    
생명과 빛, 혹은 영생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가르침의 대주제다. 동시에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1:4), 또 예수 자신이 생명이다(14:6). 생명이 생명에서 나오는 물리적 이치와 같이 생명은 창조주에게서 나와 피조물로 가는 것이다. 또, 빛과 어둠은 요한의 저술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은유(비유)’로서 각각 선과 악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인 예수님은 어둠을 몰아내는 생명의 빛이 되신다.
    
    
    
2. 증언자 세례 요한(6~8절)
예수님의 찬양시에 갑자기 세례 요한이 등장한다. 본문과 15절이 없으면 예수 찬양시는 더욱 매끄럽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은 일종의 괄호 안의 내용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왜 이 부분이 필요했을까? 예수 시대부터 요한복음 저술 당시까지도 광야에서 회개를 외친 세례 요한이 메시아 혹은 모세가 언급한 ‘나와 같은 선지자(신 18:15~22)’가 아닐지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세례 요한을 ‘사람’이라고 소개한다(6절). 그도 예수님처럼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하나님(1:1)인데 반해 그는 사람이다. 또, 그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증언하는 자이며,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다. 또, 그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도움이다(7~8절).
    
본문의 세례 요한은 모든 측면에서 예수님과 대비된다. 즉, 그는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3. 말씀의 등장과 세상의 반응(9~13절)
9절은 예수님을 “참 빛”으로 소개한다. 세례 요한이 빛이 아니라는 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참’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한’ 혹은 ‘배타적인’을 의미한다(참조, 15:1_나는 ~이다). 예수님만이 빛이다. 그 참 빛인 예수가 세상에 와서 빛을 비추고 있다. “비추다”라는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이 벌써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0~11절은 참 빛인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반응을 소개한다. 요한은 이제 예수 성육신과 그 부정적 반응을 역사적 사실로 묘사한다. 먼저, 일반 피조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말한다. 빛인 예수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왔는데, 정작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창조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는 “믿지 않았다”와 동의어다. 그리고 요한은 이스라엘의 거부에 대해 고발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백성에게 왔지만, 그 백성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인 창조자, 참 빛인 창조자는 완전히 거부되었다.
    
12~13절은 그럼에도, 이 참 빛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있음을 소개한다. 참 빛인 창조자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완전히 대조되는 긍정적 반응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해 ‘영접하다’라는 동사를 양자에 대비되게 배치한다. 영접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창조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바울도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 일종의 양자로서의 자녀로 설명한다(롬 8:16). 하지만 요한은 실제로 하나님이 낳은 아들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아들 됨의 특권은 믿는 즉시 발효된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자녀의 권세 혹은 특권을 벌써 누리고 있다.
    
    
    
4. 육신이 된 말씀, 독생자 예수(14~18절)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에 말씀으로 소개했다가(1절), 그다음에 생명과 빛으로(4~5절) 설명하다가 이제 다시 ‘말씀’으로 소개한다(14절).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한 사역을 앞에서 소개했으나(9~10절), 그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14절이다. 특히 ‘사람’이라고 쓸 수 있었는데도, 굳이 ‘육신(혹은 육체)’이라고 쓴 것은 기록 당시의 가현주의자(Docetism,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당시 이단 영지주의의 교리를 추종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예수는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고 이러한 예수의 영광을 ‘우리(하나님 자녀 공동체)’가 봤다는 것이다. 또한 “영광”은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께 주로 사용하는 단어(출 3:22; 신 5:24)임을 고려한다면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선언하고 있다.
    
15절은 6~8절에서 이미 언급한 세례 요한의 역할을 증언자로 제한됨을 분명히 한다.
    
16~18절은 육신이 된 예수님이 가져온 복에 대해 선언한다. 과거 광야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쳐진 율법의 장막 아래서 하나님의 임시방편적인 은혜를 경험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장막 아래서 하나님의 영구적이고 충만한 영광을 맛본다. 이것을 요한은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한다. 과거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경험한 임시방편적인 은혜가 이제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충만한 은혜로 대체되었다는 의미다.
    
요한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율법”과 “은혜”를 대조한다. 그리고 17절에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말씀, 하나님, 생명, 참 빛, 독생자, 이 사람’이 모든 호칭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인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본(출 33:23) 유일한 사람으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은혜의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과 “빛(포스)” 이신 하나님으로 선포하며 시작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될 때 그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을 향해 온전히 비추는 구원의 빛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존재가 아니다. “말씀과 빛의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모른다. 거부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신다.” 제대로 증언하여 올바로 인식하여 말씀과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처럼 치밀하고 완벽했다.
    
-하지만 인간의 교만과 완악함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덮으려 한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진리 앞에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알게 하고 믿는 예수님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며, 유익한 예수님을 믿으려 한다.
    
-내가 기대하고 추구하는 예수님만 믿으려 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예수님만 믿으려 한다. 어둠으로 빛을 가리려는 행태이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쩍도 하지 않으시며 준비하신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말씀으로 창조한 세상 말씀으로 살리시려고 빛 되신 예수님을 비추신다. 말씀으로 일깨워서 빛을 깨닫게 하신다. 그 첫걸음이 “증인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증언”하게 하신 것이다. 먼저 확고하게 선포하여 말씀과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보내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증인의 사명이 있다. 세례 요한은 “말씀과 빛으로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증언했지만, 우리는 “말씀과 빛으로 오셔서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어둠에 잠식된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세례 요한처럼 이 진리 증언하며 살아야 한다. 말씀과 빛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증인으로 증언하며 살리라!”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 다른 특징이 있는데, 먼저 “처음부터 존재하셨던 말씀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선언하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수님 자신도 처음부터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고 “영원한 생명 되심”을 강조하신다. 공관복음은 십자가 사건을 수난으로 표현하나, 요한복음은 “영광”으로 인식한다. 다양한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매우 신선하다. 신학이 성경을 규정하는 씁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다. 하지만 정작 성경은 “다양한 관점”으로 예수님을 표현한다. 유대인의 시각, 유대인을 위한, 이방인을 배려한 관점 등이 가감 없이 각각의 공관복음서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문화적 배경을 배려하기보다, 하나님 자기 뜻을 확고하게 드러내며 시작한다.
    
*각각의 수신자들의 특성을 고려한 관점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 자체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대로 “증언”하는 요한복음도 성경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갖추어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도 깨닫게 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말씀(로고스)”을 하나님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용어로, 헬라인 들은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성의 원리로 인식했는데, 이 기막힌 단어인 “말씀(로고스)”을 사용하여 각각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태초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구원 사역, 그리고 완성하실 구원의 역사”로 증언하였다.
    
*말씀과 빛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요한복음을 묵상하며 더욱더 깊게 이해하는 은혜의 여정을 기대한다.
    
*말씀이고 빛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들으며 산다는 것이다. 즉,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산다. 일상에서 이런 결정은 지극히 상식적인 “자기중심적 대답”이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과 제자 된 성도들도 그래야 할까?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성경에서 증언하는 대로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필요하다. 영안이 열렸다는 말의 의미는 아무리 인간적인 표현들이 난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언하는 말에 삶을 거는 것을 말한다.
    
    
    
**주님, 말씀과 빛이었군요! 그 위대하신 창조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심이 벅찹니다.
**주님, 그러므로 더욱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셨듯, 매일 매일 말씀으로 저를 새롭게 빚어 주십시오. 새해에도 묵상 속에서 말씀인 예수님을 만나 내 영혼에 햇빛 비치는 은혜 안에 거하겠습니다.
*주님, 말씀이 나를 아침마다 새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빛 이셔서, 진리 이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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