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니고데모가 찾아오다 [요 3:1-15]
 – 2026년 02월 06일
– 2026년 02월 06일 –
요 3:1-15 니고데모가 찾아오다
 
명절 기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신다. 그때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마치 유대교를 대표하듯 예수님의 정체성과 행하신 표적에 반응한다. 예수님은 거듭남을 주제로 그를 대화에 깊이 끌어들이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시지만, 다 깨달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조금씩 하늘의 빛이 채워져 갔다.
 
 
 
1. 니고데모의 등장(1~2절)
예수님이 유월절 기간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실 때,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산헤드린 공회 소속 율법학자로 추정)였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찾아온다. 그는 부유했고(19:36), 예수님의 가르침에 “늙음”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듯 하다(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젊은 부자로 표현한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승리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요세푸스와 바빌로니안 탈무드에는 두 명의 니고데모가 언급된다. 한 명은 주전 64년, 다른 한 명은 주후 60년대 후반에 로마와의 전쟁 때 존재했다. 두 사람 모두 ‘고리온(Gorion)’ 가문 출신이었다. 최근의 연구는 요한복음의 니고데모는 로마와의 전쟁 때 있었던 ‘나크디몬 벤 고리온’의 삼촌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자료는 니고데모가 당시 예루살렘의 유력 가문의 지도자이자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던 것을 뒷받침한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그는 세 가지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첫째, 예수님을 랍비로 부른다. 상당히 의외인데 실제 율법에 정통한 랍비는 니고데모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에게 랍비 호칭으로 질문을 시작한다. 아마도 니고데모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둘째,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인 줄 ‘우리’가 알았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 역시 매우 놀라운데, 요한과 제자들 외에 일반인들 중 처음으로, 그것도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일반 복수형을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외에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9:16). 셋째, 예수님을 하나님 기원의 선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수님이 행한 여러 표적이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 표적들은 예수님이 유월절 기간 중 예루살렘에서 행한 것들이다(2:23). 이를 볼 때, 니고데모는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와 그의 구원을 기대하였고, 예수님의 표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현재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믿음을 결정하기 위해 찾아온 듯 하다.   
 
 
 
2.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3~8절)
예수님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고 하자, 니고데모는 늙은 자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4절). 이에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것(5~8절)으로 이어간다. 2절에서 대화를 시작한 니고데모가 아직 어떤 질문이나 요청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먼저 대답하며 가르치신다. 이후 대화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시작한 주제를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 예수에게 가르침을 받는 형식이다. 이 대화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지 않는 엉성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니고데모가 궁금해하는 핵심을 담고 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니고데모와의 공통점으로 삼아 설명을 진행한다. 예수님은 표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적 기원을 인정했다는 니고데모의 말에 그가 자신의 메시아 됨에 대한 확증을 듣고자 왔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메시아를 기대하는 궁극의 이유, 곧 하나님이 주실 회복의 통치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은 니고데모의 기대와 달랐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포함한 정치적 성격이 짙었는데, 니고데모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인의 거듭남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핵심으로 제시하셨다. 이 가르침에는 세 가지 초점이 있다. 첫째, 현재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는 상태다. 그 나라를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오직 어둠의 세상에 속해 있을 뿐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개인의 반응으로만 경험된다. 민족적 혹은 집단적 구원은 없다. 오직 그 속에 있는 한 개인이 하나님의 메시아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 변화나 열심으로 얻을 수 없다. 첫 창조를 통해 사람이 이 땅 질서 속에 존재했듯이, 위로부터 거듭나는 새 창조를 통해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거듭남을 통한 새 창조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기에 ‘어떻게’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거듭남은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인한 영적 새 생명, 곧 세 창조라고 말한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불 듯, 성령도 육체로 인식할 수 없지만 존재하며 주도권을 갖고 새 창조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설명은 두 가지 개념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는 어둠과 빛의 충돌이다. 땅과 하늘, 육과 영, 거듭남 이전과 이후는 각각 어둠과 빛의 영역 속에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또 다른 배경은 구약에 언급된 성령을 통한 창조다. 하나님의 생기로 첫 사람이 창조 되었듯(창 2:7), 성경은 장차 성령으로 새 언약 백성을 창조할 것을 약속했다(겔 36:27~28; 37:14).
 
이 약속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기 시작할 것이고 신자 속에 성령이 거함으로 그 성취가 진행되며 장차 부활로 완성될 것이다. 결국 예수의 설명은 자신이 졸말적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며, 자신의 사역 결과로 성령으로 인한 새 창조, 곧 죄와 어둠의 이 땅 통치에서 위에 있는 하나님 통치 안으로 옮겨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 창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믿음을 통해 그 구원을 경험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3. 예수님의 책망(9~12절)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가 이어진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어떻게’라고 질문하자(9절), 예수는 이스라엘 선생인데 그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꾸중하고(10절) ‘우리’와 ‘너희’의 대조를 통해 믿음 없는 것을 질책한다(11~12절). 니고데모는 성경에 정통한 율법학자임에도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새 창조에 대해 감을 못 잡고 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라고 물었을 뿐인데, 예수님의 꾸중하는 반응은 강도가 세다. 니고데모의 성경을 알고 종교 생활을 잘하고 있기에 괜찮다고 여기는 착각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하게 하도록 일종의 충격어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를 책망한 후 예수님은 ‘너희’의 태도를 비판한다. ‘너희’는 니고데모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한 것인데, 그들이 예수의 증언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듭남과 바람 등의 표현으로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었는 구원을 증거하고,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구원 계회과 활동을 포함한 하늘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말하면 더더욱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아멘, 아멘’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의 뜻을 알고 전하고 있음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받이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이 장면을 묘사하며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지적함과 동시에 니고데모에게 분명한 믿음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4. 예수님의 사역(13~15절)
이처럼 사람들의 불신에도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성취하고자 주어진 사역을 계속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하늘에서 온 자’라고 말한다. 니고데모가 이미 2절에서 밝힌 대로 예수의 신적 기원에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 들려준다.
 
자신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사람들이 하늘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그는 이 사역을 ‘들림’으로 표현한다. 마치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해 불뱀 심판을 받았을 때, 모세가 하나님 명령으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세운 것처럼(민 21:8~9), 예수님도 하나님 뜻에 따라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릴 것이고, 그 위에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 죄 사함과 생명의 길을 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듯, 예수님을 믿음으로 쳐다보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옛님은 니고데모가 잘 아는 모세오경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의 결과를 다 설명했다. 이번에는 니고데모가 이해했을까? 다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인 예수님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7:50~51; 19:39)을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느 정도 긍정적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유대인의 선생 니고데모가 밤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생 예수를 찾아온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에 빛이고 진리이신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그도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인정한 사람인데,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하나님 나라 진리를 알고 싶어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궁금한 것을 먼저 알고 대답하심으로써 그가 인정한 랍비 이상의 존재임을 드러내신다. 니고데모, 아직 그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예수님의 말뜻을 오해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구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주도권이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뜻인데, 그는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사람이 정한 온갖 종교적 행위들을 다 수행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유이신 성령의 역사에 온전히 맡겨야 한다. 우리의 상식과 편견과 전제 조건과 진리라도 여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 앞에 다 내려놓고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게 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는 땅의 상식으로 하늘의 사람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만이 하늘의 구원 방식을 알 수 있다. 그가 장차 하늘로 다시 올라갈 때 이 구원, 이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이다. 아직 하늘에서 보냄받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니고데모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역시 하늘에 속한 우리를 향한, 땅에 속한 사람들의 오해와 멸시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위로부터의 지혜가 필요하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신학자였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세상 관점으로만 받아들였기에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하다. 혹시 너무 지식적으로만 말씀을 대하고 있지 않은가? 바람이 임의로(바람이 자기 뜻대로) 부는 것처럼 성령께서 행하시는 때에, 성령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을 따라 기록된 말씀을 따라 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육으로 태어나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가 바람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변화가 있다. 나는 위로부터 났음을 믿고 있고, 성령의 인도함 속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누리고 있는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니고데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전에 없었던 가르침과 여러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율법학자로서의 치밀한 학문적인 시선과 관심뿐 아니라 그도 역시 인간이었기에 학문으로, 지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분명한 기적들을 목도하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식과 실제의 연속적인 충돌이 지식을 넘어선 표적이 실제이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학자적인 양심과 그 일을 행하는 예수님의 존재감이 밤에라도 주님을 만나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지성을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표적은 그 일을 통해 눈에 보이고, 지성의 깨달음을 경헌한 이에게는 신비로운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 확실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약속하심의 실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니고데모의 혼란스러웠을 시간들이, 지난 목회의 여정에서 간간히 직면할 수밖에서 없었던 순간들과 묘하게 겹친다. 그럴때마다, 아… 나의 믿음이 이렇게 연약했었구나를 실감했다. 그리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그 허무맹랑함이 나의 마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었다. 지식의 앎으로는 도무지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은혜와 역사의 신비함이란 누가와 이 일에 대해 속시원하게 이야기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니고데모의 마음이 그랬으리라.
 
*막상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의 혼란도 아주 쬐끔 이해가 된다. 대화를 나누면 너무 좋은데, 중간 중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면, 마음과 머리가 서로 공전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는 추임새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니고데모의 혼란도 이런 종류이지 않았을까? 예수님과의 대화 자체만으로도 그간 마음에 품고 고민하였던 무수한 질문들이 이미 모두 용납이 되고, 수용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그의 마음이 끝까지 이해할수도, 용납하기에 버거운 주제들 앞에 혼란스러움 그 자체로 그의 마음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 싶다. 믿음의 걸음걸음마다 순조롭고 평탄하기는 쉽지않다. 늘 충돌과 막힘과 답답함을 직면한다. 그럴때마다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그때마다 감동을 주지만, 그만큼 또 다른 질문을 던져 놓는다. 하지만 안다. 이렇게 받은 질문은 내가 대답해야 할 것이가 보다는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임을 말이다. 성령께서 대답해주시고 또 질문을 던지고, 또 대답해주시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의 신앙을 키우시고 다져가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믇음으로 살아내는 시간 속에 일어나는 이런 일이 이제는 기대가 되고 더 이상 밤에 조용히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니고데모도 그랬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장사해야 할 그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저명한 율법학자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빌라도 앞에 나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하며 장례를 치른다. 그는 더 이상 밤에 다니지 않고 빛 가운데 섰다. 나의 걸음도 그리되리라. 이와 같으리라.
 
 
 
 
*주님, 밤에 빛 되신 주님께 나온 니고데모의 갈급함을 본받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신중함은 눈여겨 기억하겠습니다.
*주님,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빛 되신 주님의 은혜로 그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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