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 대한 요한의 첨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 이유에 대해서(16~17절) 알려준다. 그런데 이렇게 보냄을 받은 아들에 대한 세상의 반응(18절)이 부정적인 반응(19~20절)과 긍정적인 반응(21절)으로 나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에 반역하는 어둠의 통치와의 충돌으 배경으로 한다. 원래 세상은 창조주의 통치를 받는 곳이었지만, 사탄의 꾀임을 받아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함으로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이 두 영역의 충돌은 메시아 사역과 죽음, 신자의 삶을 이해하는 기본 틀이다.
1.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16~17절)
이 부분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 이은 요한의 첨언이다. 요한은 왜 여기서 이런 설명을 했을까? 이것을 가늠하기 위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예수 사역이다. 그의 사역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제자들과의 만남과 가나에서의 표적도 있었지만, 공개적인 표적은 유월절 예루살렘의 경우가 처음이다. 아울러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직접 대한 것도, 그들의 반응을 경험한 것도 처음이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의 부연 설명은 이후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성전에서의 선포나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 모습과 결과를 담고 있지만, 상징 언어 때문에 실제 청중이나 복음서 독자에게 어려웠을 수 있다. 요한은 예수의 그간 사역과 가르침을 정리하고 이후 제시될 사역 이해의 준거 틀을 제시하려는 듯 하다.
요한이 첨언한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는 예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과 예수를 중심으로 한 사역 모습과 목적이 소개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역의 결과다. 사람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설명되는데, 영생과 심판으로 묘사된다. 이런 맥락에 따라 16~17절은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 본문이 말한 과정과 등장인물의 역할이다. 하나님과 아들, 그리고 세상 사람이 일련의 과정 속에 제시된다.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냄으로 과정을 시작하고, 사람은 그 아들에 대한 반응으로 부정적 혹은 긍정적 결과를 경험한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 과정과 관련한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구원 과정의 주권자다. 모든 ‘주동사(사랑하다, 주다, 보내다)의 주어’이며 ‘과정의 시작자’다. 그분이 구원 과정 성취를 더 원했다는 의미다. 또한 구원 과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고 받는 과정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둘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이다. 이는 구원의 과정이 시작된 이유다. 1:14, 18에서 말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개념과 연결된다. 사람을 향한 창조 전 계획, 곧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해 사랑으로 함께하려는 목적(엡 1:4~6)을 이행하려는 것이자, 사람과 맺은 언약 관계의 의무, 곧 사랑과 신실함에 충실한 모습이다. 이런 의도로 하나님이 아들을 보냈기에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온전히 계시하는 과정일 것이다.
셋째,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는 말이다. 사람들 상태와 예수 사역의 의미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 먼저 사람들은 창조주를 거절하고 죄와 죽음과 사탄의 통치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해 있다. 예수는 그 어둠의 영역으로 보내졌다. 이 내용을 잘 담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가복음 3:27이다. 자신의 귀신 축출 사역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통해 약한 귀신을 쫓아내는, 마치 무당의 일로 폄하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는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주인을 결박하고 세간을 강탈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역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사탄이 집주인으로 있는 세상에 보내져, 사탄을 묶고 그 밑에서 노예처럼 고생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로 옮기는 일을 하신다. 요한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 죽음, 사탄의 통치를 깨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 죄 사함과 생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예수님을 보내는 목적 진술이다. 요하는 멸망과 영생, 심판과 구원의 대조를 통해 멸망 받지 않을 기회를 사람에게 주기 위함임을 강조한다.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3. 독생자에 대한 반응과 요한의 부연(18~21절)
18절은 독생자 예수에 대한 두 반응을 소개한다. 이는 니고데모에 대한 책망(10~12절)과 예루살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의 응답(2:23~25)을 이해하는 열쇠다.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여부다. 요한은 동사를 사용하여 그 믿음이 단순한 지적 이해나 동의를 넘어 인격적 관계 연결로 이어지는 과정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인한 관계성이 있으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긍정적 상태의 반대를 이미 심판 받은 것으로 표현했다. 이 표현은 빛과 어둠의 두 영역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곳은 어둠의 세상이다. 이곳은 모든 곳이 하나님이 만든 피조 셰계이지만, 그분을 반역하는 곳이기에 죽음이란 현재의 심판이 지배하고 장차 주님이 모든 피조물을 평가할 때 부정적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은 이 속에 존재한다. 이미 죄에 대한 심판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믿음으로 건짐받는 것을 거절하고 그 속에 있기를 고집하면 어둠과 함께 망할 것이다.
이런 설명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자신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그 결정을 존중하는 최고의 배려다. 물론 사람 편에서는 결정의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
19~21절은 독생자에 대한 두 반응을 요한이 부연 설명한다. 먼저, 멸망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예수로 인한 구원을 거절하는 부정적 반응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악함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둠의 영역에 예수가 빛으로 들어왔다. 그를 통해 창조주의 뜻과 마음이 계시되자 그것과 반대로 살던 사람들 모습이 훤히 드러났지만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민낯이 드러남을 싫어했을 뿐 아니라 그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빛으로 온다. 드러난 죄악을 회개하고 빛을 선택한 사람들이기에, 이제는 그 빛 안에 거하기를 즐겨한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게 안에 있음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요한의 부연설명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먼저, 어둠은 철저하게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자기애(自己愛)의 삶이다. 창조주와의 관계성이나 그분의 뜻은 안중에도 없다. 당연히 그 모든 삶은 ‘악(惡)’일 수밖에 없다. 악해서가 악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기에 악이다. 반면 예수 믿는 자는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함께하기를 선택했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선택이며, 핵심은 사랑을 중심으로 한 관계성이다.
둘째, 죄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빛이 왔다고 모든 어둠이 빛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과 선한 삶을 드러내면 저절로 예수를 믿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사람은 ‘절대로’라고 할 만큼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빛이신 예수가 와도 사람들이 그를 죽이겠는가!
셋째, 주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세상의 거절을 알면서도 아들을 보냈고,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이 땅에 왔다. 사랑이다. 그 사랑이 자기중심성으로 한껏 웅크린 사람들의 고개를 들게 한다. 그 과정도 주님의 은혜다. 이런 면에서 은혜와 죄가 충돌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이고, 거절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수의 믿음이 싹트는 것이 사역의 결과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의 사랑과 다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창조의 의도와 목적대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자신을 떠난 세상을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이 받을 심판을 이 아들이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이 아들을 통해서 세상과 자신이 화해하게 하심으로 자기 사랑을 증명하셨다. 이사랑에 화답한 자들에게 영생, 즉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으로 참여하는 복을 주신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 방식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하신 일이다. 나중에 따로 궁극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믿지 않는 오늘의 상태가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것이고, 믿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상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일이다. 빛의 나라가 어둠의 나라를, 생명의 나라가 죽음의 나라를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그 생명과 빛의 실체를 보고서 어둠과 죽음 가운데 있던 자들이 나아오게 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구원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에 대한 반응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값비싼(사실 어떤 값비쌈이라는 표현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에 합당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악을 고집하는 자, 자신의 주도권을 내놓기 싫은 자는 빛이신 주님을 싫어하여 거절하겠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진리에 순종하려는 자들은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의 통치에 복종할 것이다. 구원은 장래의 일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일이다. 결단은 늘 현재적으로, 실존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과거의 고백으로 미래를 보장받으려 하면 안 된다.
*나에게 허락된 영생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유일한 아들을 내주셨기에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멸망 당해 마땅한데도 베풀어 주신 사랑이었다. 단지 심판 면제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 ‘믿음’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수용하는 믿음, 그분의 통치에 사랑의 순종으로 반응하는 믿음이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한 명이라도 더 잃은 양을 찾으려고 오셨다. 그를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단절하여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니, 따로 심판할 필요가 없다.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려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거짓 사랑 대신에 참 사랑으로 오셔서 우리를 자기 백성 삼기를 바라셨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떠나 벌써 심판받은 자의 호위호식과 거짓에 기반된 형통이 축복의 대상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은은 나를 덮고 있던 어두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빛을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악했던 나의 해우이가 폭로될 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빛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 믿음이다. 이제 더는 자신의 욕망을 기준으로 삼아 자기 멋대로 살기를 그치고, 주도권을 빛이신 주께 내놓아야 한다. 실리가 아닌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빛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영생의 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른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더욱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며 어둠 가운데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 내 삶은 빛과 어둠 중 어디에 속해 있을까? 예수를 믿는 믿음은 나의 상황과 여건을 기준으로 대답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일을 믿고 따르는가!
*주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깊습니다.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믿으며 이를 따라 생각하고 결정하는 지혜로운 믿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죄를 늘 사모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경계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집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