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1-14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편견을 넘어 영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한다(1:29). 요한일서 2:2에서는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먼저 믿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요한의 사상이 요한복음 서사에 그대로 나타난 부분이 본문이다. 예수님은 상호 반목하는 민족의 장벽(유대인 vs 사마리아인)과 구별하는 문화적 장벽(남 vs 여)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마리아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육체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영생수를 소개한다. 그 여인은 이 뜻을 잘 몰랐지만, 어쨌든 예수가 준다는 생수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수 시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 관계였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해 백성들이 끌려가고(주전 722) 남은 사람들과 여기에 몰려온 이방인들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주전 4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따로 세운다. 주전 2세기에는 시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이 전쟁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시리아 군주를 도왔고, 후에 유대교 제사장이었던 요한 히르카누스 왕은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을 파괴하였다.
1. 예수님이 사역을 유대에서 갈릴리로 옮긴 이유(1~3절)
본 구절은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사역을 옮긴 이유를 서술한다. 앞에서 예수의 사역이 세례 요한의 사역보다 더 많은 결과를 낸 것이 세례 요한에게 보도되었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유대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린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두고 계속 충돌할 사람들이다(7:47; 9:13). 예수님은 지금은 그들과 충돌할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때에 고난 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할 일이 많은 유대 지역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떠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언급을 덧붙인다. 예수님의 세례 사역에서 예수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았고,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언급함으로써 아마도 예수가 세례 요한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은 결국 제자를 삼는 것이었지, 세례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2. 사마리아 통과 당위성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배경(4~6절)
4절에서 예수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에 단순하게 사마리아를 통과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도 목적이 있었다. 원문은 신적 당위성을 나타내는 조동사 ‘데이(~해야 한다)’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른 행보였음을 보여준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한 여인을 만나 영생에 관해서 대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어 살았던 예수는 그 뜻을 따라 사마리아로 들어갔다.
5~6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난 구체적인 지리적, 시간적 배경을 언급한다.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수가’라는 마을이고, 이곳은 당시 잘 알려진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과 가깝다는 사실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한다(참조, 창 48:22). 그리고 구약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다고도 한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피곤하여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가로 갔을 것이다. 요한은 그 시간이 여섯 시쯤(, 즉 지금의 정오쯤이라고 말한다. 대개 서늘한 오전이나 늦은 오후에 물을 뜨러 가는데, 대낮에 물을 길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당시 통념상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 묘사는 요한이 이곳 지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점을 보아 그가 이곳 지리에 익숙했음을 짐작하게 하고,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장소가 허구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성이 있는 구체적인 장소였음을 밝힌다.
3.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7~14절)
7~9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첫 번째 대화다. 예수로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은 목마르던 차에 물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문화의 금기를 깨고 대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를 그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물을 떠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8절). 그럼에도 정통 유대인이라면 그런 요청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풍습에 익숙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물을 달라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만나도 외면해야 하는데 말까지 걸었으니 말이다. 또 유대인들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정결법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해질 수 있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첫 번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10~12절은 첫 번째 대화에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다. 예수님이 한 행동이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상한 것이라고 말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것에 대하여 더 이상 변호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도리어 그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말한다. 여인이 예수께 구하기만 하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수를 구하려면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이고, 또 생수를 주겠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한다. 이 대화에서 앞 대화와 연관되는 것은 물뿐이다. 예수가 물을 달라고 했는데, 여인이 거절하자, 예수는 자신이 그녀에게 이 물과는 다른 물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예수가 말하는 이 물은 생수이며, 이것은 영생이나 성령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물을 완전히 오해하여 좋은 ‘흐르는 물(생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가 절대 자신에게 이 물을 줄 수 없을 것인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물리적인 것으로 예수님께 물을 길을 만한 그릇이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이유인데, 지금 자기와 말하는 자가 그 조상 야곱보다 위대할 수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13~14절은 세 번째 대화다. 이러한 여인의 문제 제기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주장에 일일이 반대하는 논증하지 않는다. 둘은 물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이 말하는 물은 사람 육체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물이지만, 예수가 말하는 물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 물”과 “내가 주는 물”을 대비시킨다. 전자를 마시면 일시적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도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후자는 한 번 마시면 새롭게 마실 필요가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을 마시면 “그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b절)”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성령을 받은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이 부분에서 구체화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의 예수는 영생(구원,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성령을 받는 것을 결합하고 있다. 이처럼 영적 기갈이 해결된다는 것은 이사야 55:3~4를 비롯하여 여러 구절에서 이미 예언된 바다(사 12:3; 44:3; 49:10).
나는?
-불필요한 마찰과 경쟁을 피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한 요한과 비교, 바리새인들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해야 함을, 이 짤막한 예수님의 행보를 기록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나친 경쟁의식에 함몰된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불필요한 마찰은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무작정, 무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지리적 경계를 넘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피 지역인 사마리아 땅으로 반드시 가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땅 사마리아도 예수 당신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 땅에도 영생을 얻고 빛을 받으며, 진리를 들어야 할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예수께서 안식을 주셔야 하고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메시아 예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한 지리적, 민족적, 인종적인 경계를 가뿐히 넘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의 나라이고 모든 지역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지리적 경계를 넘으신 것이다. 대부분 부정한 땅으로 여기는 사마리아를 우회하지만, 예수님만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 성전 유대교는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않은 채 갖은 이유를 들이대며 차별의 담을 쌓고 편을 갈랐지만, 주님은 그 담을 헐고 둘 모두를 자기 안에서 새롭게 하시려고 찾아오셨다. 유대교가 제시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사마리아가 믿음으로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주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성적 통념의 경계도 넘으셨다. 예수님은 대낮에 물 길으러 온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다. 제자들이 없는 사이에 낯선 남자가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여자 처지에서는 위협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예수께서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는 상황은 통념을 깨뜨리는 손내밈이다.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와 그가 열고 계시는 새 시대는 성적 경계가 무너지고 죄인도 용서받고 영접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예수님은 신학적 경계도 넘으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하는 유대인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줄 수 있는 분이며, 야곱보다 더 큰 분으로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러 오신 분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임의로 만든 지리적, 인종적, 성적 경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신학적 경계를 넘을 수 있고 지울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분은 육체적 목마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야기된 영적 갈증까지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다.
-예수 안에서 유대교의 최고봉인 니고데모나 사마리아의 낮은 골짜기인 여인이나 다를 바 없다. 둘이 영생(구원)을 얻는 길은 같다. 예수님과 참된 만남이 없이는 모두 어둠이고, 모두 영적 갈함 때문에 살 수 없다. 사람들의 눈을 피한 밤의 사람 율법 교사 니고데모에게는 ‘신학적’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대낮’의 여인, 감출 것이 많은 그 여인에게는 ‘물’이라는 실물교재로 나아가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마름을 인정하는 자를 상대해 주신다.
-육신의 갈증은 야곱의 우물로 해갈할 수 있지만, 영적인 갈증은 야곱의 우물도, 율법도, 성전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오직 생수인 예수님만이 그들에게 삶의 에너지와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주실 수 있다. 길을 밝혀 주시고, 길이 되어 주신다. 만족을 모른 채 자신만 의지하면서 목마름의 세월을 보냈던 속임수의 달인 야곱처럼, 이 여인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아니면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고 갈증이 있다. 끝도 없는 생수인 예수님을 통해서라야 비로소 안식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의 출현 자체가 장벽 허물기와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을 떠난 후 사랑을 잃고 반목과 경쟁을 일삼는 사람들 간의 관계도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진입과 여인과의 대화는 각종 담을 쌓는 인간들에게는 어색하고 두려운 걸음이지만, 당시 이런 유대인의 문화와 관습의 벽을 허문 혁명적인 발걸음이었다.
*상식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지리적, 문화적 편견들이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특히 이념의 차이가 만들어 놓은 것도 상당하다. 여기에 종교적인 신념이 더해지면 하나님 말씀조차 그 시각으로 얼마든지 버무려버린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립되지만, 호히여 그들이 사회를 고립되어 있다고 호도할 지경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신 행보와 그 땅의 여인과 대화하신 것은 이 장벽을 허무신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의 삶속에서도 주의 복음때문에 이런 한계를 직면하고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연함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좀더 열려 있어야 하겠다. 그것이 진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을 만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여인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여인의 반응에 인내하시면서 상대해 주셨다. 성육신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생애 내내 죄인들을 상대하시는 그분의 사랑 원리가 곧 ‘성육신’이다.
*우물물을 길으러 온 여인에게 생수(흐르는 물)는 없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그 생수로도 해갈할 수 없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목마른 줄 몰랐고 어떻게 해갈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다가가셔야 했고, 예수님께서 친히 생수가 되어 주셔야 했다. 경계를 넘어선 은혜였고, 다가오심의 자비였으며, 채워주심의 역사였다. 어찌 사마리아 여인뿐일까? 오늘 나에게도 이 은혜와 자비와 역사가 있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내고 있지 않겠는가!
*주님, 비천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먼저 찾아와 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인간이 그어놓은 수많은 경계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눈에 띕니다. 오직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 경계선은 그저 넘어서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 안에 무수한 이런저런 경계선을 예수님처럼 넘어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