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43-54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은 표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그가 행하는 기적에 환호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2:23~24). 또 예수는 표적만을 좇아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책망하기도 했다(4:48).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한 기적을 요청했던 사람도 결국 예수가 행한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게 된다. 요한은 단순히 표적과 기사만을 보고 예수를 따라오는 사람을 한편으로 경계하면서도, 이를 통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음을 보여 준다.
1.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43~45절)
사마리아에서 환대 속에 이틀을 유한 예수님은 갈릴리로 향하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갈릴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내다보게 한다(43~44절). 이 표현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자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나온다(막 6:4; 눅 4:24). 하지만 본문은 아직 예수님이 그런 거부를 당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것을 내다보며 이 말을 기록했다. 사마리아에서 환대를 받은 것과 선명하게 대조되는데,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기고 부정하게 생각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환대했으나, 정작 그의 동족이자 고향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지 않았음을 부각한다. 참믿음은 출신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향한 반응으로 결정된다.
45절은 고향에서 영접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도 표적 자체는 인정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믿음의 반응은 아니었다. 표적에 대한 태도와 반응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표적이 의미하는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표적 자체에 열광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적 이득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6:26).
갈릴리의 환대는 후자에 속한다. 이는 예수님이 기대했던 믿음의 반응이 아니며, 그들은 언제든 예수를 거부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2. 갈릴리 가나에서의 두 번째 표적(46~54절)
46절에서 예수가 갈릴리 가나에 도착한다. 그곳은 그가 이미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기적을 베푼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예수가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가 또 다른 표적을 행할지 모른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요한이 이 부분에서 굳이 이곳이 가나이고 전에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일어난 곳임을 상기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단락까지가 2장부터 이어지는 큰 문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맥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하는 새 시대라는 메시지를 마무리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의도한 메시지를 왕의 신하 아들이 이해할 때 그 아들 역시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47~49절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가 예수께 와서 자기 아들의 병 고쳐주기를 청한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기적과 기사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48절). 즉, 예수님은 인간의 필요나 땅의 일, 땅의 때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주권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단호한 거절에도 왕의 신하는 끈질기게 요청한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이 분명하고, 예수님의 자기 주권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확실하지만, 그런데도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를 메시아로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신했다.
50~52절은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기록한다. 왕 신하의 끈질긴 간청에 예수님은 “네 아이가 살아있다”라는 치유 선언을 하신다. 왕의 신하를 더 꾸중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 대신 그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이다. 비록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지 않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그의 문제를 들어주신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예수를 잘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는 예수를 신뢰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전한 소문을 통해서 알았지만, 그 표적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는 예수의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기 종들을 만난다. 그들에게서 자기 아들이 살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신하는 그 일이 일어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바로 예수가 치유선언을 했던 바로 그 시각인 것을 알게 된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능력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역사를 만들어가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왕의 신하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20:31)인 보지 않고 다만 말씀만으로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교재였다.
53~54절에서 왕의 신하와 가족의 회심을 증거한다. 결국 왕의 신하는 아들의 치유를 경험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자신과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는 말은 이 사람과 예수님의 관계가 완전히 결정 났음을 보여 준다. 요한은 이것을 통해 이 신하가 표적을 경험하고서야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부족한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당시 표적만 좇고 믿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도 많았는데, 이 사람은 결국 참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나는?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을 진정으로 자신을 높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행한 표적이 자기들에게 미칠 유익에 관심이 있을 뿐, 그 표적을 통해 진정으로 보이고 싶었던 새 시대의 도래와 자신의 정체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다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표적에는 관심을 보이나 메시아로서 주님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들의 연약함을 꼬집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이 시대를 향해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셨다. 이것은 표적과 기사가 도리어 예수께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를 제대로 인식하게 하는 데 방해도 된다는 뜻이다.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거래의 태도는 말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불신앙의 태도다.
-참믿음은 표적을 보지 않고 말씀만으로 믿는 것이다. 말씀인 주님의 말씀만으로 새 창조의 역사는 충분하다. 이런 이에게 표적은 그 말씀을 향한 믿음의 확증일 뿐이다. 믿음은 말씀이 옳고, 그 말씀대로 되며, 그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를 따라서 새롭게 창조되기를 바란다는 의사표시다.
-갈릴리에서 예수를 알아보고 그의 능력을 구한 사람은 놀랍게도 왕의 신하였다. 그는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께 간청한다. 그 역시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은 사람에 불과했으나 예수께서 직접 신하의 집으로 가지 않고 말씀만으로 치유를 선언하셨음에도 믿고 간다. 그는 거의 불신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고향 사람들과 달리 말씀만 듣고 믿은 사람이다. 고향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예수는 높임을 받으신 것이다.
-신하가 집으로 내려가는 중에 집에서 출발하여 오고 있던 종을 만났고, 종에게서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 살아난 시각이 예수님이 치유를 선포하신 시간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를 계기로 신하의 온 집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 이 믿음 또한 기사와 표적을 보고 믿은 믿음과 다르다. 이는 예수에 대한 더 깊은 앎과 경험에 기초한 인격적이고 자신을 건 실존적인 믿음이었다. 이렇듯 믿음은 변화하여 성장하고 성숙한다.
*주님은 사람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자기 사명에 집중하신다. 갈릴리에서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가신다(43~44절).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 이루기를 원하셨고, 또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보는’ 믿음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예수님은 기적 때문에 영접한 갈릴리 사람들과 병 고침을 위해 나아온 왕의 신하를 보시고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야 믿는 그들의 불신앙을 안타깝게 여기신다(45, 48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표적과 기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나의 믿음이 더욱 말씀에 근거한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왕의 신하를 바라보며 표적과 기사에 근거한 믿음이라도 절박한 청함의 자세와 응답에 부응하는 믿음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그는 아들의 목숨이 달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는 예수님을 꼭 모시고 가려 했지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순히 되돌아갔다(47~53절). 그 결과 아들의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온 집안에 예수님을 믿게 된다.
*예수님밖에 없다고 절박하게 기도하지만,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는가? 말씀의 응답보다 더 우선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없을까?
*주님은 말씀만으로 충분히 병을 고치시며 생명을 주신다(50~53절).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고을로, 가나에서 3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먼 거리에서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때” 죽어가던 아이의 열이 떨어졌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기에, 그분의 말씀에 ‘살리는 능력’이 있다(겔 37:5). 나는 이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말씀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순종으로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