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1-15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다시 장소가 예루살렘으로 바뀐다. 명절을 맞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본문은 안식일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 주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 표적 사건이다. 치유 받은 병자는 기적을 체험했지만, 성전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고발한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범법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1. 배경(1~5절)
예수께서 명절 때 제자들과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명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서 단정할 수 없으나, 추측하기로는 초막절(10월)로 생각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 주위의 다섯 행각에 있는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를 만나고 그를 치유하시는 이야기다.
이 명절이 초막절이라고 추측한다면 사마리아 수가 성 방문 이후 갈릴리에 도착한 4장 사건과 4~5개월의 시차가 발생한다. 공관복음은 그 기간에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왕성하게 사역하셨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후에(1절)”라는 표현으로 갈음한다. 요한은 이 시기의 예수님 행보에서 예루살렘 사역에 집중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양의 문(2절)은 양들을 성전에 바치기 전에 깨끗하게 씻기 위하여 사용된 문이다. 양의 문 곁에는 벽이 없이 기둥만 있는 행랑 다섯 채가 있어서 병자들이 그 안에서 비나 이슬을 피해 머물 수 있었다. 요한이 이렇게 구체적인 장소 묘사를 하는 것은 이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베데스다 못 주변에 많은 병자가 그 행각 안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에 38년 된(불치의 고질병) 병자가 있었다. 그는 베데스다 못의 민간 속설을 의지하여 그 못의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 38년 된 병자 치유(6~9절)
예수님은 이 병자의 병이 벌써 오래된 것을 알고 계셨다. 이것은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 준다(참조, 요 1:48; 4:18). 이 표적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소개된 일곱 개의 표적 중에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에 이어 두 번째 표적이다. 가나의 표적 사건과 달리 어떤 사람의 요청이 없고 오히려 예수께서 주도적으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으로 표적을 시작하셨다. 또한 이 병자는 예수께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지만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는다. 그의 말 속에 베데스다 못 옆에 있었지만,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6~7절).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의 믿음과 전혀 상관없이 표적을 행하신다(참조, 막 2:1~5; 눅 22:49~51). 이 장면은 기적적인 치유에 항상 수혜자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병자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이 표적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졌다. 이 말씀을 듣고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다. 그런데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치유 표적을 베푸신 날은 ‘안식일’이었다(8~9절). 안식일이라는 언급이 치유의 목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짧은 대화 묘사 속에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사람들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 사복음서 대부분의 치유 기적은 문제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예수께서 응하여 기적을 행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거라사 지방 군대 귀신 들린 사람도 예수께서 먼저 귀신을 쫓아내셨다(막 5:8). 하지만 거라사 사건은 사람이 귀신 들린 상태였기에 대화가 없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일하다.
둘째, 38년 된 병자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은 통상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그 병자가 누운 것을 보고 병이 오래된 줄을 알았다. 일반적이라면 병이 무엇인지, 이름이나 상태가 어떤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베데스다 못 옆에 누워 있는 그가 자신이 치유받아야 할 존재이고 그 내면에 자리 잡은 쟁점에 대한 소망을 붙잡게 하려는 것일 수 있다.
셋째, 38년 된 병자의 대답도 이상하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답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병자는 설명으로 대답한다. 물이 동하면 들어가 낫고 싶다는 대답에는 그가 진정 낫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된다. 다만, 자기는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 낫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베데스다 못의 전설에 모든 치유의 소망을 걸고 있음을 설명을 통해 들려준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다. 평상시 병자들은 서로의 아픔을 묻고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물이 움직이면 그곳은 ‘선착순’이 지배하는 경쟁의 장으로 변한다. 자비의 집이 아니라 무자비한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원망과 미움이 자비의 집에 넘쳐난다. 병자가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과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는 말은 모두 다른 사람에 관한 내용이다. 마치 자기가 고침 못 받는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불평하듯 들린다. 그러나 못 주변의 병자들 역시 자기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3절에는 시각 장애인들, 다리 저는 자, 혈기 마른 자(중풍처럼 마비된 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도 38년 된 병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병자의 대답에는 원망이 가득하다. 자기의 모든 기대는 못의 움직이는 물이고 자기 문제의 핵심은 자기를 돌보아 주지 않고 자기보다 먼저 움직이는 ‘자들’ 때문이라고 하소연한다.
넷째, 이런 병자에게 예수님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병자는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갔다. 예수님은 병자가 기대하는 대로 물을 움직여 그 물에 넣는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셨다. 단지 ‘말씀으로’ 고치셨다. 마치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듯, 아들 하나님이 말씀으로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고(4:10), 치유의 물 그 자체(7:37~38)이기 때문이다.
3. 치유 이후 사람들의 반응(10~15절)
예수의 기적 이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병자를 치유한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일하지 말라는 명령(출 20:10)을 따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쉬어야 하는데, 병 나은 자가 자리를 들고 옮긴 ‘일’을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수와 유대인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일어난다. 이 단락은 치유받은 38년 된 병자를 중심으로 유대인들(10~13절)과 예수(14절)와 다시 유대인들과의 대화(15절)로 구성된다. 이 대화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유대인의 반응 과정이다. 그들은 병 나은 자가 자리를 들고 갔기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다. 구약에는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간 것을 안식일 법을 어긴 ‘일’로 말한 적이 없다. 단지 그들의 관점일 뿐이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병이 나은 자를 정죄한다. 그들은 병자의 상태에 관심이 없다. 오직 병자가 한 ‘일’에만 집중해 정죄하는 위선적이고 잔인한 자들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곧 예수에게도 적용될 것이고(16절), 이후 사역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자기의 선입견이나 규율을 절대화해서 표적도, 하나님의 뜻도 거절하고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인다.
둘째, 병 나은 자의 비겁함을 보라. 그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자기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한 이가 문제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그는 예수를 알지 못했다. 예수도 그곳에 없었기에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 예수가 그를 만나주자,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안식일을 범하게 만든 이가 예수라고 고자질한다. 심지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예수가 말했음에도 그는 자기 안위를 위해 예수를 배반한다. 오래된 자기 병을 고쳐주신 예수를 옹호해야 할 듯한데, 정반대로 반응한다. 그는 육신의 병은 고쳤을지 모르지만, 자기 내면의 ‘자기 중심성’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는 인격적 만남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표적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과 예수에 대한 인식의 전환, 곧 회개와 바른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과정이 분명치 않으면 기적의 은혜는 오히려 독이 된다.
셋째, 병 나은 사람을 만난 예수님의 모습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부러 이 사람을 찾아 만났다. 그가 자기 이익을 위해 예수를 배반할 수 있음을 알기에 미리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신 듯하다. 이 또한 병 나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마치 자신을 거절하는 세상에 구원의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모습과 유사하다(3:16).
결국 이 사건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 예수의 사역과 예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어둠을 더 좋아하여 예수를 거절하는 부정적인 반응이 혼재하여 나타난다.
나는?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이 붐비는 동안 그 명절과 아무 상관 없는 병자들이 스스로 신화에 기대어 만든 희망을 붙들고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곳이 베데스다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던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에는 단 한 명을 위해 모두가 들러리가 되어야 하는 전쟁 같은 경쟁의 장소가 된다. ‘자비의 집(베데스다)’이 아니라 가장 비정한 집이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가장 공정한 것 같지만, 실은 가장 불공정한 자들의 공간이다. 거짓 신화에 기대어 가짜 희망에 자신을 거는 자들의 애처로움만이 가득한 집이었다. 샬롬도 안식도 없는 베데스다나 형식화된 종교 행위만 무성한 성전이나 다른 것이 없었다.
-베데스다는 고질병을 앓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적 소망이며, 그것도 치유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허위의 소망이다. 베데스다에 먼저 들어가는 데 실패한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소망은 가짜 소망이고, 몹쓸 소망이며, 가장 큰 절망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에게만 있다. 예수는 베데스다에서 가장 가망 없는 자, 안식을 스스로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향하신다. 그에게 치유받기 원하느냐고 묻지만, 그는 안식을 기대하기보다 베데스다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돕는 역할을 예수께 부탁한다. 하지만 예수는 단 한 사람만의 안식이 아니고, 단 하루만 역사하는 기적이 아니고,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언제까지든 누릴 수 있는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가 진정한 치유의 베데스다 연못이다. 내 동료를 제치고 먼저 달려갈 필요도 없다. 1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어떤 질병이라도 상관없다. 막연한 기대에 그치지 않고 확실한 치유를 준다. 그것이 진정한 희망이다. 모두에게 열려있고, 모든 시간에 열려있는 희망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다.
-안식일에 치유를 받은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한 번의 안식이 영원한 안식을 보장하지 못하며, 육체적 치유로 얻은 안식이 그 사람의 실존의 안식까지 보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그는 안식일을 어긴 예수를 찾기에 혈안이 된 자들에게 예수를 밀고한다. 38년 된 병자는 몸은 고침받았지만 영적으로는 만성병 환자였다.
-하나님은 죄로 고통당하는 인류에게 안식을 주려고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 우리가 쉬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우리를 지키고 보살피고 양육하여 쉼의 사람이 되고 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일하신다.
*주님은 가장 낮고 천한 곳,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뜨거운 연민을 품으신다(2~5절). 주님은 성전으로 먼저 가셔도 됐지만, 그에 앞서 신음 소리와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병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셨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사 61:1). 우리가 따라야 할 지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찾아가서 돌봐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38년 동안 지속된 병으로 무력하게 누워있던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낫기를 원하는지 물으셨다. 그리고 그가 간절히 원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다(6~9절).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고 간절한 소망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소망을 이루실 능력 있는 분이시다. 오늘도 나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 솔직하게 아뢰리라.
*진짜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이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자기를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병이 낫지 못한 이유가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3~7절). 잘못된 믿음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타인에 대한 원망과 피해의식을 갖게 만든다. 지금 내가 처한 문제는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다.
*작은 것 때문에 크고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38년이나 병으로 고통받는 이를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혹 축하하고 기뻐해 주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 못마땅해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은 일은 없는가? 나는 혹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것을 문제 삼지는 않을까?
*주님, 낮은 곳으로 임하신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지나친 왜곡의 출발임을 깨닫습니다. 치유의 은혜와 기쁨보다, 안식일 지키는 율법 조항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