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31-47 예수님을 증명하는 증언들
베데스다 병자 치유 사건은 유대인들과 격렬한 안식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본문에서는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세 가지 증거로 변증하지만, 유대인들은 믿기를 거부한다. 예수는 그들이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아인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질타하며 그들이 신봉하는 모세의 율법이 그들의 불신을 오히려 고발할 것이라고 하신다.
1. 세 가지 참된 증언(31~38절)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의 권위가 참됨을 증언하신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증언을 믿지 않는다. 이 증언은 만일 누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지 않다는 일반 원리로 시작한다(31절). 구약은 법정에서 증언 효력을 위해 두세 증인을 요구했다(신 19:15). 예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자신의 사역 변호가 혼자만의 증언이라면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지지해 줄 다른 증언자들이 있다고 하고, 그 증언이 참됨을 확신한다고 말한다(32절).
예수께서 제시한 첫째 증거는 요한이다(33~36절). 예수와 논쟁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너희’)이 과거 요한의 정체를 알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 요한은 진리, 곧 예수에 대해 증언했었다(1:19~27). 그는 참 빛이 아니었지만, 참 빛 예수를 드러내기 위해 어둠을 불로 밝힌 등불이었고, ‘너희’도 잠시 그이 빛 안에서 즐거워하기를 원했다(35절). 요한이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기대했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한은 중요한 증인이었다. 예수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요한의 증거로 첫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1:36~37). 그러나 정작 예수는 그이 증언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한다(34절). 그의 증거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 증거보다 더 확실한 신적 증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한을 증인 중 하나로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한때 메시아로 기대했던 요한이 소개한 자, 곧 예수 자신에 대해 변호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둘째, 예수가 하신 일(표적)이다(36절). 그 일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직접 행한 것이기에 요한의 간접 증언보다 크다. 또한 예수의 기적은 당시 사람이 행할 수 없기에, 예수의 사역과 정체성이 신적 기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sign)이 된다.
셋째, 하나님 자신이다(37~38절).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그분이 먼저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그분이 예수를 계시자로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뜻과 마음을 알게 하셨고 예수에 대해 직접 증언하셨다. 공관복음은 예수가 세례받고 물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음성을 통해 예수를 자기 아들로 확증했다고 말한다(마 3:17; 막 1:11).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뿐더러,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었다. 계시자를 믿지 않기에 그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유대인들의 불신(39~47절)
종교 지도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들은 약속한 메시아를 통한 영생, 곧 종말에 있을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렘 31:31~34)를 포함하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음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예수가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의 시각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런 관점은 예수의 기적(표적)은 오히려 메시아의 능력이 아닌 마치 마술사나 무당의 능력으로 생각될 수 있다(막 3:22).
41~47절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불신을 지적한다. 먼저, 예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1절). 그들을 비판하는 그것은 그들의 인정을 얻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는 유대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안다는 말로 비판을 시작하신다(42절). 이것은 매우 엄중한 도전이었다. 단지 예수를 믿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6:4~5는 율법의 우선되는 계명을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랑의 관계로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율법을 어기도 있을 뿐 아니라, 우상숭배의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신앙의 자긍심을 갖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굉장한 모욕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어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 속에 없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신다(43~44절). 예수는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지만,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왔다면 영접했을 그것이라고 한다. 만일 그들의 유력 가문 중 유다 지파의 어떤 이가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했는데, 그것이 자신들의 생각과 이익에 들어맞았다면 그를 메시아로 인정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주후 132~135년 유대인이 로마에 저항하고 있을 때, 당시 최고의 랍비 아키바는 반란군 지도자 바 코세바(코시바)를 바 코크바(‘별의 아들’)로 부르고 메시아로 인정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후 랍비 문서는 그를 거짓의 아들인 바 코시바로 깎아내렸다. 메시아로 인정받으려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조건에 맞아야만 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기적도, 예루살렘(2:23)이나 갈릴리에서의 기적들(4:54)도 도리어 예수에 대한 의심만 증폭시켰다. 예수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서로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 기원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들 마음 중심에 ‘자기 이익’이라는 변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나 다른 것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을 성경은 죄의 핵심으로 말한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귀에 들릴 리 없다. 오히려 믿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예수는 자기가 종교 지도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45절). 비록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의 의도는 최후 심판 때처럼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잘못을 인식하고 돌아오도록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불신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 심판 기준은 그들이 숭상하는 모세의 율법이 될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하고 다른 이에게 ‘일’을 시켰다고 정죄하지만, 실상 그들이 하나님의 메시아를 거절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 모세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되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고 하는지 확인하고(신 13:1~3) 말과 일의 증험이나 성취 여부로 판단하라고 했다(신 18:21~22).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확인하는 것은 옳지만, 모세의 기준에 의하면 애수의 말과 일은 참 선지자의 증거이기에 그는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로서의 메시아다(신 18:15).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모세보다 자기들의 평가가 더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의 사람들이다. 모세를 존경하고 그가 준 율법을 중시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모세나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관심사를 더 우선시하였다. 결국 참 신앙의 핵심은 누구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에 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고와 삶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죄인의 모습이라면,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참 신앙이다.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세대 사람이 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께 심판할 권세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스스로 자신이 증인 자격을 증언하였다면 효력이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증언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행할 수 있는 예수의 역사가 예수가 스스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행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당대 사람들로부터 선지자로 인정받은 요한의 증언 또한 예수의 권세를 입증한다. 요한이 비추는 진리의 등불을 사람들은 좋아했고 불의한 권력자들은 싫어했다. 그 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성령으로 세례 줄 자로 증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고 하였고, 예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자신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연구해 온 율법이 예수를 증언한다.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에게 오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해야 마땅하다. 모세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모세가 가리킨 예수는 믿지 않고 도리어 모세를 들어서 예수를 고발하려고 하니, 그들은 한참이나 모세를 오해하고 있음을 자증한다. 사실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을 위해 그 말씀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믿음은 믿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게 달려있다. 믿음의 대상이 믿을 만한 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미덥지 못한 대상을 향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기 전에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니 믿으라고 하기 전에 믿음의 내용과 이유를 충분히 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복음 전도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충분히’ 알려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일로 인생을 보냈다. 빛인 예수님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의 인생은 증거 인생이었다. 그 인생의 성패는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였는지에 달려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 누구를 증거하고, 누구를 믿게 하려고 이 길을 가는지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모두 선택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산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싶은 역사다. 그리고 기록된 것이 기억으로 남는다. 그 기록이 현재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벗어난 기억은 이기적이며, 내가 기억한 역사는 내 역사를 만들 뿐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언과 하나님의 증언을 받으신 분이다(33~35, 37절). 요한은 등불로 와서 빛인 예수님을 증언하였고(1:7, 8). 하나님도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요한의 증언도, 하나님의 증언도 믿지 않았다. 지금 나의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증언이 참되심을 믿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일로 증거를 받으신다(36절).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그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요 14:10). 그러나 유대인들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오병이어와 기적을 행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 6:36). ‘그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8절). 말씀을 믿지 못하면, 기적도 소용없다.
*예수님은 성경의 증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39, 40절). 구약과 신약의 초점은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에,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예수님을 더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열심히 성경을 보전하고 연구하면서도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증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인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의 성경 읽기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41~44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했다. 지금 우리 마음에는 혹시 ‘하나님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하시고, 마음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주님 되심을 스스로 자증하시고, 요한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 성경의 증거를 통해 밝히 드러내심을 찬양합니다. 자기 정욕에 함몰되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멀어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