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1-15 오병이어 표적과 그 이후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시자, 군중들이 그를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고백한다.
예수께서 많은 군중들에게 양식이 필요함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이 없어서 한 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예수께 알린다. 예수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도하신 후에 오천 명에게 넉넉하게 나누어 주셨고,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
1. 배경(1~4절)
38년 된 병자를 고친 예루살렘에서의 사건 이후,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시점(4절)이다. 만약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이 초막절이라면, 이 사건은 6개월 정도 흐른 주후 29년 4월인듯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기 약 1년 전이다. 일어난 장소는 갈릴리 호수,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이다.
갈릴리 호수는 구약에서는 긴네렛이라고 불렸다(민 34:11). 주후 20년경 헤롯 안티파스가 서쪽 연안에 행정 수도 격인 도시를 세우고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납한다는 의미에서 디베랴로 불렀다(참조, 6:23; 21:1). 그 후 점차 디베랴 바다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명칭은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3회 등장한다. 요한이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라는 이중적인 수식어를 사용한 이유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다. 갈릴리 바다를 알지 못하고 디베랴라는 지역 명칭을 사용해야 이해할 수 있는 독자와 디베랴라는 장소보다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명칭인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독자들 모두 고려한 배려다. 산(3절)과 잔디가 많은 것(10절)을 참고하면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구릉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태와 마가는 빈들(광야)이라고 말한다(마 14:13).
참고로 오병이어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사건이다(참조, 마 14:13~21; 막 6:34~44; 눅 9:10~17). 2~3절은 예수께서 행하실 오병이어 기적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개한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 큰 무리들이다. 큰 무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표적으로 인해 그를 따라다녔다고 부연한다. 요한복음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5장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 갈릴리로 돌아온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고대 세계에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그 뒤에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다. 오병이어 사건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역할과 함께 이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의 빌립과 안드레의 역할도 자세하게 다룬다.
4절은 이 기적이 일어난 시기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밝힌다. 이렇게 밝히는 이유는 이때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몰려가는 시기다. 유월절은 오직 유대인만 지키는 절기(명절)이기에, 이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배려하여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수식어도 사용했다.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라는 것과 연결되는 10절의 “잔디가 많다”라는 표현이 이 시기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2. 오병이어 기적(5~13절)
5~9절은 사람들을 먹일 음식에 대한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가 중심이다. 예수가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먹일 음식에 관해 제자들과 대화한다.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사겠냐고 빌립에게 물으신다(5절). 이에 빌립은 이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먹여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한다(7절). 그런데 안드레(베드로의 형제)가 한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작은 빵 다섯 개가 있다고 말한다(8~9절).
예수와 제자들의 짧은 대화지만, 몇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첫째, 대화 과정이다. 공관복음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예수에게 물었다(마 14:15).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가 빌립에게 말한다. 내용이 서로 상충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보완적이다. 이 과정을 재구성하면, 무리를 보내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자들이 요청하고(막 6:35~36), 예수께서 빌립에게 많은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냐고 질문하신다(5절). 그러자 빌립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다고 대답한다(7절).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막 6:37). 제자들은 어디서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겠냐고 되묻는다(막 6:37). 예수님은 빵이 몇 개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시고(막 6:38), 안드레가 한 소년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도시락이 있다고 대답한다(8~9절; 막 6:38).
둘째, 요한은 예수가 빌립에게 질문한 것에 대해 덧붙여 말한다(6절). 예수도 그 많은 사람이 먹을 빵을 구할 수 없음을 알았고, 그들을 어떻게 먹일지를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빌립에게 어디서 빵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는 제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일 것이다. 이에 빌립은 어디서도 그런 양의 빵을 구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인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혈루증 앓는 여인의 고백(참조, 막 5:28) 처럼 인간적 관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고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면에서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는 듯하다. 빵이 몇 개 있냐는 예수의 물음에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 역시 예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아마도 모든 제자가 그랬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예수의 질문은 그들의 인간적 관점과 이후 나타날 기적의 대조를 통해 예수에 대한 더 깊은 확신으로 이끌어가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만, 제자들을 향한 또 다른 표적으로 볼 수 있다.
10~13절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말한다(10절). 빵을 가져다가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이 마음껏 먹게 했다(11절).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가 남은 것을 거두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자(12절) 제자들이 거두었는데,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13절). 이 부분도 몇 가지 짚어볼 부분이 있다.
첫째, 기적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짧다. 모든 복음서에 다 언급된 기적이고 수많은 사람을 먹인 놀라운 기적임에도 자세한 과정 없이 간략하게 제시한다. 이에 비해 기적 이후 사건은 상대적으로 길게 다룬다(14~71절). 이는 기적 자체보다 그로 인해 파생된 예수와 사람들과의 논쟁을 더 비중 있게 다루려는 요한의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둘째, 보리떡을 먹은 사람이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요한복음에는 언급이 없지만,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백 명 또는 오십 명씩 앉게 했다고 기록한다. 마치 군인들이 점호를 기다리며 늘어서듯 무리 지어 앉은 것을 나중에 헤아리면 대충의 인원이 파악된다.
셋째, “그들의 원대로”와 “그들이 배부른 후에”라는 표현이다. 음식이 적어서 아껴 먹는 상황은 없었다. 남자만 오천,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마음껏 먹을 정도의 놀라운 기적이었다.
넷째,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표현이다. 이는 모든 복음서에 공통으로 언급되는데, 당시는 음식이 귀하기에 남은 것을 거두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남은 것을 거둔 것이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두 개보다 훨씬 많았다. 참고로 열두 바구니의 “열둘”은 실제로 그렇게 거두었다는 말이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 상징성도 있는 듯하다. 예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배불리 먹고 남도록 공급하시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기적 이후 사람들의 반응(14~15절)
기적 이후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소개한다. 그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며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는 혼자 산으로 가셨다. 이 장면은 정황 이해를 위해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한 사람들의 태도다. 왜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할 수 있는데, 먼저 시간상으로 유월절 즈음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로마 식민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모세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를 통한 정치적 해방과 구원을 갈망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장소로 이 기적은 ‘빈 들(광야: 마 14:13)’에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지냈던 광야를 연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공되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이 해결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요소들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신 18:15)로 인식하게 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를, 자기들을 이끌 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반응이다.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복음 4:4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자기는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얼핏 보면, 사람들의 반응은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정체성 표적으로 인식했고, 그것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 메시아라는 인식에는 다윗의 후손, 곧 정치적 왕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기에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만나를 먹은 것도 백성의 먹거리를 해결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시도 역시 큰 잘못은 아닌 듯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후 예수님과 그들의 논쟁에서 구체화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태도 ‘순종’보다는 ‘조종’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왕으로 인식했다면, 그의 말에 순종하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방법으로 예수를 이용하려 했다. 마치 광야 시험 사건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모든 이들에게 메시아임을 보이라는, 십자가 대신 쉬운 길을 추구하라는 마귀의 유혹과 비슷하다(마 4:5~6).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도(참고, 막 6:46), 그 유혹과 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병이어 사건도 메시아를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반응한 또 다른 예이다. 백성은 예수의 정체성을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14절)”로 인식했다. “그 선지자”는 신 18:15~18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말세에 보내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배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고 놀랍게 반응하면서 그를 “그 선지자”로 인식한 것이다.
기적의 현장에서 그 떡을 먹으면서 열왕기하 4:42~44에 기록된 엘리사의 기적이 떠올랐을 수 있다. 선지자 엘리사가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져왔을 때, 그것으로 100명이 나누어 먹게 했고, 모든 사람이 먹은 후에 양식이 남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기적과 엘리사의 기적 사건은 “보리떡”이라는 기적의 재료와 적은 양이지만 많은 사람이 먹은 사실, 그리고 남은 음식이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수를 신명기에서 약속한 “그 선지자”로 인식한 사람들은 그를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아 정치적 해방을 이루어보려는 욕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예수를 로마의 정치적 압박에서 자기 나라와 백성들을 구해줄 정치 지도자로 오해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잘못된 의도를 이미 아시고 혼자 산으로 피하신 것이다.
자신을 오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잘못된 명예와 영광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다.
나는?
-큰 무리가 디베랴 바다 건너편까지 예수를 따라오는 열정을 보인다. 예수를 바로 알아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는 그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표적을 주심으로써 예수 자신을 단지 기적을 행할 줄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이며,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는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계시하실 것이다.
-그간 예수와 함께한 제자들은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들은 이 예수가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일을 자기 눈앞에서 해낼 수 있음을 알고 있을까? 빌립은 가진 것에 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며 무리를 먹일 방법이 없다고 대답한다. 안드레는 필요한 것에 비해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면서 이 무리를 먹일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예수보다 눈앞의 조건에 더 시선을 두었다. 사람이 할 수 없으면 예수도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또 예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과 같이하고도 예수님을 잘 모르는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다. 다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의 떡을 남겼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도록 기적을 일으켰던 일을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가 오리라고 약속했던 바로 ‘그 선지자’가 왔다고 흥분한다. 하지만 그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몰랐다. 모세가 애굽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예수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구원자, 왕으로 기대하였다. 그들 탓만은 할 수 없다. 여태껏 그런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기대해 왔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을 피해 떠나서 그들의 기대를 꺾으신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이들의 육신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육신’을 위한 떡을 제쳐둔 ‘영혼’만을 향한 근심은 위선에 불과하다. ‘떡’만을 위한 삶은 반드시 경계해야 하지만, ‘떡’의 문제를 외면한 사랑은 가짜다. 선교는 “떡에서부터 말씀까지”를 아울러야 한다. 만나가 진짜 양식이었듯 오늘도 우리에게는 진짜 양식이 필요하다.
*믿음은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식에 머물지도 않는다. 믿음은 숫자 계산을 뚫고 나간다.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계산기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믿음은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눈일 뿐 아니라, 현실 너머에서, 시간 너머에서, 시간 너머에서, 영원에서, 하늘에서 이 땅을 바라보는 안목이기 때문이다.
*배부름이 풍요로운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 배부름의 경험이 영원히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배불러지려는 욕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를 왕으로 삼아 로마에 빼앗겼던 그 ‘떡’의 주도권을 되찾고 싶은 욕망 말이다. 예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이듯이,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임을 아는 것이 참믿음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목격했다면, 바른 신앙고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남은 떡을 보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고백했지만, 떡이 상징하는 생명과 구원의 의미는 깨닫지 못한다(1~4, 14, 15절). 혹시 나도 그들처럼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이 내 신앙의 목표가 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주님이 내 삶에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시기를 원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셨다. 저녁이 다 될 때까지 끼니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냥 흩어버리지 않으셨다(마 14:15).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는 말씀은 자조 섞인 한탄이 아니라 곁에 모인 사람들의 작은 필요까지 외면하지 않으시는 긍휼과, 연약한 빌립이 확신 가운데 서기를 기대하는 심정을 나타내신 것이다(5~6절). 진정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먼저 운운하는 것 보다, 이미 해결책을 알고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예수님을 포함하지 않는 계산은 잘못된 계산이다. 빌립은 떡을 살 돈이 부족하다고 대답한다(7~9절). 그의 계산은 수치상으로 정확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틀린 계산이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가? 혹시 내 소유, 내 능력만으로 현재 상황을 판단하고 계산하지 않는가? 불가능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셨다. 제자들은 부족한 돈과 음식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충족하게 먹이셨다. 예수님은 부족한 상태에서도 최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주님, 저보다 저의 필요를 더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상황, 현실, 재정 여건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국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 삶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너무나 든든합니다.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