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 영생의 양식을 위한 일 [요 6:16-29]
 – 2026년 02월 19일
– 2026년 02월 19일 –
요 6:16-29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 영생의 양식을 위한 일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무지한 사람들을 피해 가버나움으로 가시면서 바다 한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배로 걸어오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신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신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양식을 주는 분이시며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친다.
 
 
 
1. 풍랑 속 제자를 찾아오신 예수님(16~21절)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는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갔고(15절), 제자들은 바다에 내려가 배 타고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그들에게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16~18절).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는데,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오자 제자들이 놀랐다. 예수는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이 가려던 땅으로 갔다고 한다(19~21절).
 
이 기적은 마태복음(14:22~33)과 마가복음(6:45~52)에도 기록된 기적이지만, 본문의 내용이 가장 짧다. 밤 사경쯤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고생하는 내용(막 6:48)이나 파도와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마 14:32; 막 6:51),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던 내용(마 14:28~31)도 없다. 요한은 예수가 물 위를 걷드 것이나 바람을 잠재우는 것은 예수의 전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런 기적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 벌어진 예수와 사람들의 논쟁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을 보면, 오병이어 사건으로 촉발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과 사람들의 반응에 더 집중하려는 의도다. 또한 예수에게 집중된 묘사 내용이다. 비록 예수의 능력과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을 통해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예수의 신적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본문에서는 물 위를 걷는 전능자로서의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요한은 예수의 말을 직법 화법으로 기록하여 마치 무대 조명을 예수에게만 맞추어 그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어 예수가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가지 자임을 전달하려 했다.
 
한편,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제자들이 이 기적 직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간 것을 살펴야 하는데, 마가복음 4:45에서는 예수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냈다고 했다. 이는 무리가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서둘러 제자들을 그 현장에서 피하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빵과 물고기를 직접 나눠준 제자들은 그것이 늘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며 놀람과 예수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 갔을 것이다. 어쩌면 ‘예수를 왕으로 삼자’라는 선동적 구호에 맞장구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이미 둘씩 짝을 지어 파송된 전도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한껏 흥분되어 있었다(막 6:30). 그런 상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에게 예수가 왕이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우려는 그들이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마지막 여정 내내 ‘누가 크냐?’로 다퉜고(막 9:34), 마지막 만찬 때도 싸우는(눅 22:24) 모습을 통해 예수의 이러한 경고적 행동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오히려 물 위를 걸으시는 것과 풍랑을 잠재운 사건은 예수를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로 만들려는 무리의 생각에 제자들이 더 부화뇌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 가버나움에 계신 예수(22~24절)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과 밤중에 물 이를 걷고 풍랑을 잠재운 기적 후에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갔고, 새로운 사건이 새로운 배경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이튿날(22절)’ 가버나움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무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기적의 현장을 다시 찾았지만, 예수는 없었다. 전날 밤에 제자들만 한 척 있던 배를 타고 건너갔으니 예수는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아 당황하여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마침 바다 건너편에서 배들이 와서 그 안에 있는지 확인해보았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이에 그들은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온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가 가버나움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배경 묘사가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의 기적보다 오히려 더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는 요한이 그만큼 사람들의 예수를 향하여 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열심이 이후 예수와의 논쟁을 통해 자기 이익을 위한 욕심 추구였음이 드러난다. 
 
 
 
3. 예수와 사람들의 대화(25~29절)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온 무리와 예수의 대화가 진행된다. 무리가 언제 왔냐고 예수에게 묻자(25절), 예수는 그들이 온 것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하고 썩을 양식 대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26~27절). 이에 무리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28절), 예수는 하나님이 보낸 자, 곧 자기를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고 말한다(30절).
 
전반적으로 대화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동문서답하는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이 대화에는 몇 가지 살펴볼 모습이 보인다. 첫째, 무리의 말과 예수의 평가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가 기대하는 것과 결리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먼저 무리의 질문은 ‘랍비’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루 전에 예수를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로 부르고 왕으로 삼으려 한 것에 비하면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무리의 두 번째 질문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듯하지만, 이후 논쟁을 보면 그들의 질문은 진지하지 않았다. 한편 예수는 그들이 예수를 찾은 것은 표적을 통해 믿으려는 의도가 아닌, 전날처럼 빵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무리는 예수를 참 메시아로 따르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놀라운 기적과 가르침을 경험했음에도 참 믿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욕 추구로 흐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예수의 대답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리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까칠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무리에게 구원의 여러 요소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먼저 “문제 의식”이다. 예수는 무리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빵을 위해” 자기에게 왔다고 말한다. 이는 무리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어 문제 상황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 관계의 불편함을 무릅쓰는 이런 담대함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다음으로 “시선 전환”이다. 예수는 무리에게 썩을 양식 대신 영생을 위해 일하라고 한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 음식이 필요하지만, 영원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영생을 위한 참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또,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무리의 질문에 하나님이 보낸 예수를 믿는 것이 그분의 일이라고 답하신다. 무리는 예수의 능력을 믿고 있었지만, 예수가 말한 믿음은 단순한 능력자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자요, 구원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인격적인 삶의 고백이며 결단이다.
그리고 믿음의 결과다. 영생, 곧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나오는 참 생명인데, 인자인 예수가 믿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끝으로 예수의 정체성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과정을 성취하는 열쇠다. 하나님이 정체성과 사역을 보증하는 그분의 아들이며, 이 땅에 보내져 하나님을 계시하고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존재다.
 
 
 
나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무리이게 떡과 물고기를 주어 배부르게 하신 예수는 이제 또 다른 광야인 캄캄한 바다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그들이 가려던 땅으로 인도하신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스ㅏㄹ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안전하게 바다 건너편으로 데리고 갔던 일을 떠올린다.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을 행하러 오신 하나님의 메시아시다. “내니”라는 예수님의 자기소개는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떠올려진다.
 
-무리는 오병이어으 기적을 일으켰던 곳에 예수가 계실거라고 기대하고 갔지만 거기 안 계시자,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서 예수를 만난다. 그들은 반갑게 예수를 영접하였지만, 예수는 그들이 표적이 가리키는 바 진정한 예수의 정체는 깨닫지 못한 채, 떡을 먹고 배부른 경험에만 머물러 있는 줄 아셨다. 그들에게 예수는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기에 적합한 지도자였고, 그들이 알고 있는 여느 권력자들처럼 자신들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얻는 데 관심이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예수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모르고 있고, 진정으로 어떤 해방과 어떤 양식이 자신들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고 있다.
 
-무리에게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못 산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떡으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리기만 하면 존재의 의미가 다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썩을 양식이 있다면 썩지 않을 영생의 양식도 있다. 예수는 영생하는 이 양식을 주려고 오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려고 오셨다. 그것은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분을 부려서 자신에게 필요한 왕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낯선 길은 두렵다. 무지가 두려움을 가져온다. 모르면 자유롭지 못하다. 앎이 우리를 가유롭게 하고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동행했지만 그를 몰랐다. 그래서 때로는 그렇게 살갑던 예수님이 두려움의 존재가 되곤 한다. 안 만큼 누릴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또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자유와 담대함을 준다.
 
*제자들이 있는 풍랑이는 바다 한 가운데까지 물 위를 걸어서 찾아오셨다(16~21절). 모세를 찾아 거친 미디안 고아야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처럼(출 3장), 큰 바람과 파도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험한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엄습햤던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졌고, 큰 바람과 파도도 목적지를 향한 뱃머리를 막아설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인생이지만, 그곳까지 찾아와 새 힘을 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있음을 믿고 기대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찾는 수많은 무리를 보고도 반기지 않으신다.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바라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제자들이다. 자신이 주는 떡이 아니라 그 떡이 가리키는 예수 자신을 보는 사람을 원하신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원하신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분주히 돌아다니고, 여러 척의 배를 동원하여 가까스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얘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셨다(22~26절).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세우고자 밤낮 열심히 다녔지만, 이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 양 포장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일에 주께서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열심을 내기에 앞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분별해야 한다. 더디더라도 주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지혜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왕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분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 그분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은 오판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요 3:16~18; 4:34).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알리는 분명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메시아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썩을 양식에 대한 욕망이 영적인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고 신뢰하게 하는 영적인 예민함과 지혜로움이 있는가?
 
 
 
*주님, 인생의 풍파가 일 때 저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기다립니다.
*주님, 나의 욕심, 자기 중심성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사모하는 순전함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일을 알고 믿어 감사와 평안 가운데 신앙의 삶을 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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