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41-59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는 예수의 도발적인 선언은 가버나움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그를 육신으로 알고 지냈던 이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생명의 떡이라는 정체성을 탄탄한 논리로 강화하신다. 이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예수는 여기에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을 추가하신다. 곧 그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예수와 온전한 연합 속에 누리는 영생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가능하다.
예수는 문자적인 의미의 떡이 아니라 영생을 의미하며 언급하셨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고 이해하려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헬라-로마 사회 전체가 혐오하는 식인 풍습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유대인들은 얘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식인 풍습과 피를 마시는 것이기에 심판을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큰 혼란에 빠진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서로 논쟁하고, 얘수께서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고 주와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가버나움 회당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예수의 응답(41~51절)
41~42절에서 가버나움 회당에서(59절) 새로운 등장인물이 예수와 또 다른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자는 이전의 오병이어를 경험한 무리가 아니라, 가버나움에 사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예수와 무리의 대화를 듣고 못마땅했다. 예수가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인 것과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신적 기원을 말하는 예수의 말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앞서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이 ‘떡’을 중심한 욕심이었다면, 이 경우는 ‘선입견’이 믿음의 방해물로 등장한다.
참고로 예수는 공생애 사역 내내 메시아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출생 장소는 베들레헴이었지만, 성장은 나사렛에서 했고, 지금은 가버나움에 집을 두고 있었다(마 4:13; 막 2:1). 그를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43~51절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못마땅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앞서 무리에게 제시한 내용을 역순으로 다시 설명한다. 먼저 자신의 사역을 말한다(44절). 그리고 이 구절에 깃든 의미를 하나씩 부연해 나간다.
첫째,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도권이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4:13을 인용하여 하나님께 듣고 배운 모든 사람은 예수에게 간다고 말한다(45절). 이 표현은 두 가지 질문을 불러온다. 먼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을까?’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는 일반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그분께 배우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더구나 당시는 성령의 선지자가 없다고 여겨지던시기였기에 선지자를 통한 가르침도 거의 없었다. 일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통해서지만, 예수는 이 방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의 대답 열쇠는 예수의 구약 인용이다. 하나님의 미래 회복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말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분을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를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는 46절의 첨언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아버지를 본 자는 오직 그분에서 온 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1:1). 즉,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한 존재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계시하여 그분을 알게 하는 통로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배울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예수에게 온다. 또 다른 질문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배웠는데, 왜 예수에게로 가는가?’이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저 보고 듣는 그 일을 통해 믿음으로 반응하고 예수에게 삶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예수의 표적과 가르침을 본다고 해서 모두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자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렇게 믿은 믿음의 결과로 예수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신다(47절). 하나님과의 현재 관계 연결과 부활을 통한 미래 관계 완성이 함께 있는 표현이다.
셋째, 예수의 정체성이다. 그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하고(48절),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아울러 과거 광야에서의 만나와 대조하여 자신의 탁월성도 강조한다. 과거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사람의 생명을 잠시 유지시켰지만, 자신이 주는 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한다(49~50절). 여기에 예수는 놀라운 말을 덧붙이는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빵)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줄 떡(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자기 살(육체)이고, 그것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한다(51절).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2. 살과 피에 관한 유대인들과 예수의 대화 2(52~59절)
역시나 유대인들 사이에 격론이 일어났다.(52절). 문자 그대로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면 ‘식인(食人)’을 의미하기에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예수께서 이어서 설명하시는데, 한술 더 떠서 피까지 마셔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53절). 피째 먹지 말라는 율법까지 어기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설상가상이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예수는 ‘상징 표현’을 고집한다.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함을 네 번(53, 54, 55, 56절) 언급하고, 심지어 57절에는 ‘나를 먹는 자’라는 말까지 한다.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기에 이 말은 자신을 ㄴ믿으라는 뜻이라고 쉽게 설명해야 할 듯 하지만, 예수는 철저하게 상징을 고집한다. 왜 이런 방식을 고집할까? 여러 추측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는데, 먼저 구원 과정의 요소들이 충상적 개념을 기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에 형용하기 어렵고, 그분의 일하심이나 믿음과 영생도 구체적인 명제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상징이나 비유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요소는 유대인들의 불신이다. 현재 그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들을 맘이 없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무리는 이익에 마음이 어두워졌고,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을 그들의 용어로 설명해도 여전히 불신을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역발상으로 그들 생각의 틀을 깨는 충격 요법, 즉, 그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반발을 더욱 거세지겠지만, 진지하게 예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그 의미를 고민하고 질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버나움 회당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예수 가르침의 이면 의미를 묻지 않는다. 영적 관심이 그들에게 없었다.
둘째, 왜 예수는 살과 피의 상징을 사용했을까? 전적인 추론의 영역이지만, 예수의 설명 속에 몇 가지 단초들이 있다. 먼저 생명이 음식을 먹음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현 상황은 오병이어 음식에서 시작된 사건이 만나를 통한 일시적 생명 유지와 하늘에서 온 참 떡(빵)을 통한 영생의 대조를 담은 가르침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떡(빵)과 생명을 연결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문제는 피에 대한 이해다. 피는 음료가 아니기에 음식으로 연결하기 어렵지만, 이 또한 생명과의 연결성을 생각해야 한다. 구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창 9:4; 레 17:11, 14).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먹는 것이기에 구약에서 금했지만, 반대로 그 피를 먹으면 또 다른 ‘생명’을 먹는 것이기에 다른 차원의 ‘생명’을 얻는 상징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56절에서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도 그 안에 거한다고 언급했다. 마치 빵에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는 상상으로 연결된다. 더 나아가 57절에서는 예수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에 그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임을 언급했다. 이런 면에서 살과 피의 상징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묘ㅕㅇ을 얻고 유지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최선의 상징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살과 피의 실제 의미다. 예수의 표현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그로 인한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살을 먹게 하고 피를 마시게 한다는 말이 죽음으로 다른 존재의 먹거리가 되어 그 존재를 살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대신(휘페르, 대속, 속량)’ 죽는 희생을 통해 어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을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57절).
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 예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수만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말씀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무지는 당연했다. 이제 그들은 이 예수를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자, 구원자로 믿는 자,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 그들이 영생하는 떡을 먹는 자들이다. 이 땅에서 번성하고 부요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이 땅의 생명을 완성한 영생의 선물을 갖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믿는 것이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이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줄이 따로 나눌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예수와 하나님이 서로 구분할 수 있지만, 나눌 수 없는 관계이듯이, 예수와 믿음의 백성의 관계도 그와 같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영원하신 예수로 인해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지식은 옳지만, 그것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죽은 지식에 불과했다. 내가 가지 지식에 내가 노예가 되어 진리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 그 지식이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고 지식의 양이나 새로움만 추구할 때 주님께로 가는 길은 멀어진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자는 예수 안에 거하는 자다.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그의 분신이 되어 그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살리실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는 지금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죄에 대해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자뿐이다.
*하나님께 듣고 배운 사람이 예수께 나아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 되신다. 그분이 보내신 성령께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말씀의 뜻을 조명하시고 우리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우리가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아려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오늘은 현지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빵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선명하게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사역자로 부름받은 모든 이들은 내가 믿고 싶은 예수가 아니라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리라.
*주님,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겠습니다.
*주님, 빵에 취해, 선입견에 붙들려 진리되신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늘 날선 분별력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