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7:1-13 정하신 때와 방식에 순종하시는 예수님….
초막절이 되자 동생들이 예루살렘 방문을 촉구한다. 큰 무대 중앙 예루살렘으로 가서 뜻을 크게 펼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철저히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신다. 이는 ‘때’에 대한 민감한 사안이다. 곧 ‘하나님의 때’와 ‘세상의 때’의 대조다. 동생들은 세상의 때에 맞춰 지금이 적기라고 부추기고, 예수는 하나님의 때에 맞춰 지금은 아니라 하신다.
요한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사를 펼친다. 6장과 7장 사이에는 약 6개월의 시간 차가 뚜렷하다. 유월절과 초막절 사이는 약 6개월의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단순하게 시간을 연결하며 예수의 서사를 진술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목적안에서 서사를 연결한다. 6장이 ‘생명의 떡’을 논했다면, 7장은 ‘생명의 물(생수)’을 다룰 것이다. 전자가 유월절에 어울리듯, 후자는 초막절에 어울린다. 초막절 절기는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추억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인데, 예루살렘 주변 들판, 혹은 가옥 옥상에 나뭇가지로 간이 텐트를 만들어 일주일간 야영한다. 이때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긷고 밤에 등불을 밝히는 중요한 행사가 곁들여진다.
1. 형제들의 종용과 예수의 응답(1~9절)
1절은 오병이어 기적과 이후 진행된 예수와 여러 사람과의 논쟁이 마무리되고, 그 후에 예수가 갈릴리에 다녔다는 표현으로 이후 행적을 정리한다. 오병이어 사건이 유월절 즈음이었기에 2절에 언급한 초막절 절기와는 약 6개월의 간격이 있다. 그 사이에 유대인의 또 다른 명절인 오순절이 있었지만,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요한은 유대인들, 곧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 이후 예수와 안식일에 대해 논쟁한 지도 1년이 지났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예수를 미워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이 기간에 갈릴리를 돌아다니며 가르침과 치유 사역을 했음을 밝힌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친 두로에서의 사역(막 7:24~30), 시돈을 지나 갈릴리 지역에서 병자를 고친 것(막 7:31~37절), 데가볼리 지역에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 이상을 먹인 것(막 8:1~21)도 이 시기의 사건이다.
이런 시간을 통해 예수의 명성은 높아져 갔지만, 동시에 호의적이지 않게 변해갔다. 그 지역 통치자인 헤롯은 불안함을 느끼고 예수를 주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요한은 이런 여러 정치적 상황은 외면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중심으로 소개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2~5절에서 예수 형제들의 반응이 소개된다. 시간이 지나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왔고, 이 시점을 배경으로 예수의 또 다른 예루살렘 사역이 진행될 것이다. 이 시점에 요한은 예수 형제들에 관한 내용으로 사건 기술을 시작한다. 예수가 아직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아마도 가버나움 집(2:12; 참조 마 4:13)에 있었을 때, 그의 형제들이 예수에게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가라고 권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첫째는 제자들 때문이다. 예수가 행하는 일들을 제자들이 볼 수 있도록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한다(3절). 둘째로 예수 자신 때문인데, 대중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자가 없기에, 예수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한다(4절).
요한은 형제들의 이런 요청은 예수를 향한 불신에서 초래되었다(5절). 왜 이렇게 평가했을까? 대답을 위해 형제들의 제안 내용과 예수의 응답(6~9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형제들의 동기와 관련하여 세 가지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언급한 점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던 열두 제자들이라기 보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이 범위에는 지난 유월절 즈음 살과 피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예수를 떠난 갈릴리 제자들(6:66)과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형제들의 제안은 지금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기 위해서 사역하라는 의도로 읽힌다.
둘째, ‘이런 일들’의 내용이다. 이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제반 사역을 의미한다. 특히 기적 같은 능력 사역을 지칭할 것이다. 주목할 것은 형제들이 예수 사역의 본질을 십자가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이런 일들’은 일반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내용과 차이가 없었다.
셋째, 예수를 대중에게 알려지기를 추구하는 자로 묘사한다. 마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받는 것이 예수의 사역 목적인 듯이 들린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보면 형제들의 제안은 예수가 대중에게 인정받는 메시아가 되려면 유대인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 유대와 예루살렘에 가서 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많은 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아됨이나 능력을 무시하지 않았고, 예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안했을 수 있지만, 그들의 메시아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 지도자였기에 예수에게 많은 지지자(제자)를 만들어 세력을 키우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는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모습과 같았고(6:15), 광야 시험 사건 때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보호하는 것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는 메시아가 되라고 유혹하는 사탄의 목소리와 같다(마 4:5~6).
이런 면에서 형제들의 제안은 예수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예수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이기에 바른 ‘믿음’과 거리가 먼 상태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
2. 예수의 응답(6~9절)
예수가 형제들의 제안에 대답한다.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6절)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지만 ‘나’를 미워한다는 것(7절), 그리고 아직 때가 차지 않아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8절)이다. 이런 대답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담겨 있다.
첫째, 형제들 제안의 문제점이다. 예수는 자신의 ‘때’와 형제들이 말한 ‘때’를 대조한다. 요한복음의 ‘때’는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시점을 의미한다. 만일 형제들의 제안을 따라 예수가 움직였다면, 그의 사역 주도권이 하나님에게서 형제들에게로 옮겨지게 된다. 형제들은 이 점을 의도하고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제안을 따르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때에도 어머니의 요청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했을 때과 성격이 같다. 더 나아가 이 제안은 예수의 광야 시험 사건에서도 있었다. 사탄은 예수의 허기짐을 알고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제안했다. 만일 이 제안을 수용하여 기적을 행하였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필요를 먼저 채우는 것이 되고 사탄의 주도권을 따라 행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를 잘 알았기에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한편 형재들의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의 제안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의 대답에서 말한 ‘세상;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어둠의 영역을 의미한다. 그들이 많은 제자를 통해 영향력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라고 제안한 것은 세상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둘째, 예수의 사역 모습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예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아버지의 주도권에 의해 움직인다. 아들로서의 순종이며 보냄받은 자로서의 충성이다. 이 모습은 또한 세상에 불순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세상이 제시하는 욕망이나 안락함 대신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의 악을 고발한다(7절).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겠지만, 예수는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수행하려 한다. 예수는 그 순종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고, 형제들의 제안 대신 갈릴리에 더 머무르기를 택하였다(9절).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와 사람들의 반응(10~13절)
시간이 조금 흐르고, 예수는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간 후, 나중에 따로 은밀하게 올라갔다(10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8절 내용과 상충하는 듯하지만, 8절은 아직 때가 차지 않아 올라가지 않겠다는 의미였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이기에 10절의 행동은 8절과 충돌되지 않는다.
그가 은밀하게 움직인 것은 예루살렘 방문이 형제들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명절에 정치적 메시아를 열망하는 우대인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명절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예수를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찾고 기다리고 있었다(11절). 그에 대한 평가가 어갈렸지만(12절), 그가 기적과 능력을 행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어떤 능력을 보이고 어떤 모습으로 사역을 이끌어 갈지 궁금해 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종교지도자들)’이 이미 예수에 대해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13절; 참조 1절).
나는?
-형제들은 예수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이미 많이 알려진 갈릴리보다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긴 유대, 특히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형제들은 육의 기준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수의 정체 그대로 알지도, 믿지도 않았다. 또한 유대에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몰랐다. 오직 자신들을 위해 예수가 유명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분이 더 알려지기를 바라고, 우리 교회가 커지기를 바라고, 내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예수 자신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예수는 형제들의 제안을 단숨에 거절한다. 그런데 그게 형제들의 불신 때문이 아니고 신변 위협 때문에도 아니다. 앚기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제들은 그것을 ‘예수의 때’라고 알아들었겠지만, 사실 ‘하나님의 때’를 가리킨다.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행동하셨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분명치 않은 형제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그렇게 하여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다.
-예수는 형제들 몰래 얘루살렘에 올라가신다. 형제들의 때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신다. 그 때가 우연히 일치할 수 있지만, 그는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셨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산다는 것을 모른 채 제각각 그의 정체를 추정한다. 그를 찾지만,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에 대해 단지 궁금해 할 뿐, 그의 참된 정체를 증거하는 일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치있는 일인 것을 알 만큼은 그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것이다. 그때에 하난미의 능력으로 이뤄질 것을 믿고 하나님의 템포에 맞춰 걷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그분이 주인공이 되신다. 내 힘과 내 지혜로 내 때에 이룬 나의 뜻은 내 나라를 만들고, 내게 영광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예루살렘에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여론이 있었다. 현대는 여론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평가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론이 만든 인물이 아니다. 세상이 그분을 오해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구주시며, 왕이시다. 그의 자녀인 우리 역시 민감해야 하는 것은 여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정체다.
*형제들은 예수께서 유명해지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신중하게 행동하신다.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까지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신다. 고난받아야 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지혜롭께 처신하셨다. 때뿐 아니라 방법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경에 따라 때를 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정하신 때와 방식에 철저하게 순종하신다. 예수의 형제들은 초막절을 기회로 삼아 갈릴리에서 행한 이적을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온 천하에 드러내라고 종용한다(3, 4절). 예수님은 형제들의 요구와 종용을 모두 거절한다.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세상 사람들이 옳다 여기는 것에 부응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때와 방식을 어떻게 분별할 줄 있을까?
*세상의 불의를 드러냄으로서 세상과 원수가 되셨다. 악을 악하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세상이 주는 유익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여 악한 세상의 친구로 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예수님의 편에 서있는가?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이다(마 12:30).
*사람들의 인정을 얻어야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 형제들은 세상의 교훈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깨닫지 못ㄹ하고 얘수님을 신롸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내게 어떤 능력이 있어야만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핑계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을 벗 삼아 사는 자들의 “때”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의 때를 결정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때를 맡기셨다. 나는 ‘때’를 어떻게 분별할까?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
*참된 신앙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뚫고 진리를 입술과 삶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면서도 세상의 눈치가 보이므로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는가? 이 시대 교회를 다닌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감추어야만 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속에서도 참 진리되신 주님을 따르는 삶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 진리 편에 서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삶이 그립다.
*예루살렘에 예수에 대한 여론의 긴장이 팽팽할 때,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눈앞에 있음에도 믿음의 눈을 닫아버린 비겁한 그 군중들의 상당수가 이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주님, 정하신 때를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조급함이 하나님의 사역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 묵묵히 인내와 믿음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를 따라 분별하며 감당하도록 도우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