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참 교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요 7:14-24]
 – 2026년 02월 22일
– 2026년 02월 22일 –
요 7:14-21 참 교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의 초막절 사역과 가르침이 계속된다.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논쟁한다. 내용은 그 과정을 따라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4~18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응답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다. 다른 하나는 19~24절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것과 관련하여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내용이다.
    
    
    
1.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의 응답(14~18절)
14~15절은 예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명절 중간이 되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가 배우지 않은 사람인데 어떻게 글을 잘 아느냐고 놀라서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응이다. ‘배우지 않았다’라는 말은 정식 랍비 교육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글’은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정식 배움이 없는 예수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해석과 적용을 가르치는 것에 놀란 듯하다. 여기서 놀란 유대인들은 주로 예루살렘 주변 사람들일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덜 놀랐을 것이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이 더 많이 놀랐을 것이다. 자기들이 죽이려는 자가 기적을 행하고 또 성경에도 해박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6~18절은 예수의 응답이다. 놀라워하는 무리와 예수의 대화가 진행된다. 예수가 먼저 자기 가르침에 대해 변호한다.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와의 관계를 토대로 변호하는데, 이 관계는 왕과 사신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왕이 사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내면, 사신은 왕을 대신하는 존재가 된다. 그 사신의 공적인 말과 행동은 그를 보낸 왕의 말과 행동이 된다. 사신의 임무는 오직 자기를 보낸 왕이 부여한 것을 완수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 개념을 자신의 가르침에 적용하여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째, 가르침의 ‘신적 기원’이다(16절).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존재로 소개하고, 자기 가르침은 자기를 보낸 분의 것이라고 말한다. 가르침의 권위와 진실한 내용을 변호한 것이다. 둘째, 가르침 내용에 대한 자신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가르침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게 된다고 한다(17절). 그만큼 내용에 자신 있다는 말이다. 셋째, 전하는 자의 신뢰성이다.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보낸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한다고 한다(18절). 이런 요소들을 통한 예수 변호는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에 수렴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대하는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듣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두 방법을 언급하는데, 하나는 그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들어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적과 능력을 행해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다른 신을 말하면 죽이라고 했다(신 13:1~5). 또 다른 방법은 선지자들의 일에 증험과 성취가 있어야 한다(신 18:22)고 말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일을 해도 그 일에 실제 능력이 없으면 거짓이다.
    
예수는 모세가 말한 이 검증 방법을 제대로 적용하면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 기인한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용 면에서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 가르침의 확실성을 전한 것은 유대인들이 바르게 반응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만일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검증하여 하나님의 뜻과 맞는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
    
    
    
2. 예수를 죽이려는 것에 대한 유대인과의 논쟁(19~24절)
19절은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한 비판이다. 앞부분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면, 이 부분부터는 일과 관련한 변론이다. 특히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일이 율법에 어긋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예수는 그들 주장의 근거인 모세 율법을 들어 그들의 비판이 합당치 않다고 말하는데,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판단했다면,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은 이어지는 21~24절에서 제시한다.
    
20절은 예수의 비판에 대한 유대인들의 응답이다. 무리가 예수의 비판에 대해 그가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한다(참조 10:21). 그들이 보기에 아무도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예수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를 귀신과 연계시킨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방금 그가 성전에서 가르침을 전한 후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자로 말했는데도 유대인들이 예수를 귀신과 연계시킨 것은 그들의 불신 상태를 보여준다.
    
21~24절은 무리의 ‘누가 너를 죽이려고 하느냐?’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다. 19절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예수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은 법정에서 상대방의 죄를 지적하고 자기 정당성을 변호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종교 지도자들은 1년 전에 예수가 한 일, 곧 안식일에 사람 고치는 ‘일’을 하고 그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도록 ‘일’을 시킨 것(5:16)은 심각한 죄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고(출 20:8~11; 레 23:3; 신 5:12)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했는데(출 31:13~14; 35:2), 이 율법에 따르면 예수의 행동은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나름 탄탄하다. 율법 내용은 잘 알고 있고, 예수의 일을 증언할 목격자와 경험자도 있다.
    
이제 예수가 반론한다. 그는 자신이 행한 일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특별히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이 가진 율법 적용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간다(22~23절). 예수가 예로 든 것은 할례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한다. 사실, 할례는 모세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율법에 명시되어 있기에 모세에게 할례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할례를 행하는 ‘일’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키고 안식일 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여긴다.
    
예수는 지적한다. 왜 할례는 예외이고 사람을 온전하게 한 자기의 일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가? 할례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외적 표지이고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 관계의 의무를 잘 이행하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라면, 사람을 온전하게 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 내용(레 19:18),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을 칭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의 논리는 날카롭고 타당하며 탄탄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을 잘 적용하는 지혜가 충분히 엿보인다. 예수는 피상적(‘외모’)으로 판단하지 말고 율법 내용을 분명히 인식하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일성으로 변론을 마무리한다. 16~18절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변호였다면, 이 부분은 그의 행위에 대한 변호다. 예수의 논리를 편견 없이 따른다면 그의 주장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제 판단 과정은 무리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어졌다. 자신의 선입견을 고집할지, 아니면 그것을 버리고 예수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결정할 권한을 주시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늘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며 살았다. 이런 점에서 기적 중의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는 그 기적을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갔고, 지금도 그 기적을 위해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
    
    
    
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이 가진 인간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있는 인물에 그치고 만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글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여겼다.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요 그분에게 보고 들은 교훈을 전달하는 분이라는 것을 모르니 그들은 이렇게밖에는 예수를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면, 예수의 말은 단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예수를 자신들이 아는 정보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한 말씀을 통해서 다시 판단해야 했다. 결국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믿고 따르려는 의지가 없었기에 예수를 오해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생의 길을 알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말씀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의 대상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킬 마음이 없었기에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온 로고스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기에 율법의 예수도 몰라보았다. 율법은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이며, 성품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할 때 율법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는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를 어긴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율법 자체이기 때문에, 그가 행한 일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의도를 성취하신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참 정신을 이루기 위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허용하였으면서도, 안식일의 참 정신을 이루기 위해 38년 된 병자에게 해방을 주고 안식을 주며 치유를 준 예수의 일은 안식일 위반이라고 고소했다. 그들은 실제 잘잘못을 따진 것이 아니라 외모로 예수를 판단한 것이다. 제사장이 안식일을 어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예수가 안식일을 어기고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것은 문제 삼았으니 말이다.
    
*오늘날처럼 형식과 외형을 중시하는 시대가 일찍이 없었다. 학문에서도 내용보다 학벌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에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청중의 인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주께서 깨닫게 하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아니겠나!
    
*율법의 목적은 죄가 무엇인지 앎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누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 역시 안식일 율법의 본래 의도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과 치유를 경험하고 베푸는 복된 시간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타인의 신앙을 겉으로만 판단했으며,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의 정신 구조의 특징은 외형주의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쉽게 판단하나, 그 형식에 깃든 깊은 의미를 고민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이런 태도는 위선이라는 위험한 열매를 맺게 한다.
    
*예수님은 보내신 자의 영광을 위해 보내신 이의 교훈을 가르친다(14~18절).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유대인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랍비들과 달리 그 가르침을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한없이 낮아지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주어진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람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17~18절). 듣고 알게 된 지식, 행함이 없어 간직하고 있는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날마다 순종을 위해 무릎으로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일고 있는가?
    
*유대인들은 스스로 만든 조항에 얽매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 되었다. 율법의 수호자로 자청했지만, 실상 하나님의 뜻대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율법을 범한 자들이 되었다.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을 실천하는 예수님을 범법자로 만들고(5:1~18), 정작 자신들은 모세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다.
    
*우리도 가끔 특정한 성경 구절을 이용해 말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을 거슬러 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과신하고 있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대로(외모로 보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해야 한다(24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판단이 공의로운 판단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겉모습에 대한 편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보지 못했다. 나도 혹시 눈에 보이는 단면만을 보고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가?
    
    
    
*주님, 제 눈에 보이는 한없이 주관적인 시각에 근거하는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그 뜻을 행하겠습니다.
*주님, 외모지상주의(lookism)에 빠져있는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살아내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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