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정죄 대신 용서, 새상의 빛이신 예수[요 7:53-8:20]
 – 2026년 02월 25일
– 2026년 02월 25일 –
요 7:53-8:20 정죄 대신 용서, 새상의 빛이신 예수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종교지도자들이 음행 중에 있던 한 여인을 잡아 끌고 온다. 율법에 따라 정해진 법을 앞세워 예수의 의견을 묻는다. 땅에 글을 쓰시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자, 그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다. 예수가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초막절 끝에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증언을 거짓으로 몰아붙인다.
 
 
 
1. 음행(간음) 중에 잡힌 여인(7:53~8:11)
7:53~8:6절은 새로운 사건의 배경과 시작을 설명한다. 하루 일정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예수도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갔다. 이튿날 아침 예수가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이 그에게 다가왔고, 예수는 그들을 가르쳤다(7:53~8:2).그런데 일단의 종교지도자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옴으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3절). 그들은 이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았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예수에게 묻는다.
 
의도가 수상하다. 이들은 간음 현장을 어떻게 알고 여자를 잡았을까? 여자와 간음한 남자는 어디에 있는가? 율법은 간음하는 남자와 여자 모두 죽이라고명하는데(레 10:10; 신 22:22), 이들이 성읍에서 동침했으면 둘 다 죽어야 하고(22:24), 들에서 동침했으면 남자만 죽여야 했다(신 22:25). 그런데 왜 여자만 끌고 왔을까? 어쩌면 남자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이상한 것은 그 여자를 예수에게 데리고 온 것이다. 예수는 목격자도 아니고 여자를 심판할 권한도 없다.
 
요한은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고발한다. 예수가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 총독만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는 당시 현실에서는 로마법에 저촉된다. 또한 돌로 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6~11절은 이 사건을 대하는 예수의 응답과 사건 해결을 소개한다. 간음한 여자의 일로 예수 주변이 시끄러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할지를 주목했을 것이다. 이때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고, 사람들은 예수에게 계속 다그쳐 물었다. 예수는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깨는 묘수였다. 예수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썼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씩 떠났다. 사람들이 다 떠난 그 자리에는 예수와 여자만 남았다. 예수는 여자에게 사람들은 어디 있고, 여자를 정죄하던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묻자, 여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기도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여자를 향한 예수의 태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달랐다. 우선 예수는 사람을 자기의 유익을 위한 통로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를 향한 종교 지도자들의 기본 태도는 정죄였으나, 예수는 달랐다. 당시 여자에게 붙일 수 있는 존칭인 “여자여”라고 부른다. 두려워 떨던 여자가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의외의 호칭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고, 죄 없는 예수는 그녀를 돌로 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세로 죄인을 용서하듯 그녀를 용서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들을 보내 자신을 거절하는 세상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십자가를 통해 그 길을 완성하고픈 예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편, 여자는 예수를 믿었을까?
 
 
 
2. 예수는 세상의 빛 : 증거의 신실성 논쟁(8:12~20)
12~13절은 성전 헌금함 앞에서(20절) 초막절을 배경으로 한 예수의 또 다른 선포의 시작이다. 이번 주제는 ‘빛’이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12절). 어둠과 빛의 두 영역을 배경으로 참 빛인 예수를 따르면 어둠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고, 빛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앞서 초막절 물과 연결하여 자신을 생명의 물을 주는 존재로 소개한 것(7:37~38)처럼 예수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믿음과 믿음의 결과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또한 요한복음 기록 목적(20:31)과 같은 내용이다.
 
물과 관련한 예수의 선포에 종교 지도자들이 반발했듯이, 빛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이 반발한다. 두세 증인이 있어야 효력이 있다는 율법 내용을 근거(17절)로 자기가 자기를 증언하는 예수의 말은 신뢰성이 없다고 비판한다(13절).
 
14~18절은 바리새인의 비판에 대해 두 가지 내용으로 반박한다. 첫째, 예수 증언의 확실성이다(14~15절). 예수는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 증언해도 그 증언이 참되다고 한다(14절). 이 표현은 예수가 5장에서 38년 된 병자로 인해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할 때 말한 것과 다르다. 그때는 자신이 자기를 위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지 않다고 말했다(5:30). 서로 모순처럼 대화 상황과 초점이 다른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5장에서는 예수 스스로 자기 가르침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다른 증인들을 언급한 것이지만, 본문은 바리새인이 예수의 증언 자체가 의미 없다고 비판하는 상황이기에 증언의 확실함부터 먼저 반론하고, 이후 또 다른 증인을 소개해야 했다. 예수가 자기 증언의 확실성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그가 자기 정체성과 사역의 기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어둠의 세사응로 보냄을 받았고, 이후 십자가로 사역을 완수한 후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지식이 있기에 예수의 증언은 참되다. 하지만 바리새인에게는 이런 지식이 없다. 단지 육체, 곧 인간적 정보만으로 예수를 판단할 뿐이니 그의 증언이 참임을 알 수 없다(15절). 이런 면에서 그들의 판단은 온당하지 않다.
 
둘째, 예수를 증언하는 존재로 반박한다. 예수는 아무도 인간적 정보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지만, 인간적 잣대로 자기를 판단한다 해도 자기 즈억가 참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다(16절). 예수의 증언은 자기 생각을 전한 것도 아니고 증인 없는 자기 주장도 아니다. 확실한 지식에 근거한 가르침이며, 예수 자신과 그를 보낸 하나님이 증인이시다. 바리새인이 제시한 율법의 기준에서도 예수의 증언은 참되다.
 
19~20절은 예수의 변론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다. 예수의 변호는 설득력 있는 지혜로운 논증이지만 문제가 있다고 한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흔하지 않았기에,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예수가 말한 아버지가 하나님일 것 같지만 확실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게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다. 예수는 그들이 예수 자신도 ‘아버지’도 알지 못했으며, 예수를 알았다면 하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한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말이 순환 논리의 궤변으로 들렸을 것이다. 증거의 확실성을 묻는 말에 예수는 자기와 아버지를 보증으로 말하고 아버지를 물었더니 예수 자신을 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불신이 무지의 악순환을 만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예수를 인정했다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알면 얘수를 더 깊이 알게 되는 선순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 문제의 핵심은 예수를 알고 싶지도,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싶지도 않은 데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 대신 예수를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허락한 때가 아니라서 구체적 실행은 감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서기관들과 바이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 앞에 데려왔다. 돌로 쳐야 한다는 율법을 상기시키면서 어찌할 건지 물어 예수를 시험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여인과 함께 간음한 남자는 데려오지 않음으로써 이미 율법을 어기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곤 했던 예수가 이번에도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빌미로 처벌하려는 의도였다. 이 또한 율법 정신에서 벗어난 일이며, 더욱이 율법 자체이신 예수를 몰라보고 시험하였으니 율법을 크게 어기고 있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무언가를 땅에 쓰신 후 율법대로 증인들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 율법은 죄 없는 자만 간음한 자를 돌로 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지만, 예수는 남을 정죄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기시키셨다. 이에 여인만 두고 모두 하나씩 하나씩 떠난다. 그들은 죄를 지적하는 방법만 알았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용서하는 법은 몰랐다.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죄를 가진 채로 다른 죄인을 정죄하기만 했다.
 
-예수는 여인의 잘못을 두둔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회개할 기회를 제거하지도 않았다. 죄를 사할 수 있는 자신의 권세에 어울리도록 여인을 용서하셨다. 또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의 용서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용서받은 우리에게 마땅한 삶의 태도는 죄를 멀리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다. 어떤 용서도 당연하지 않으며 모든 죄 용서는 그 목표와 목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죄의 은총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처음부터 의인이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은혜의 망각은 우리를 교만에 빠뜨린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죄사함의 은총을 잊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죄사함과 함께 주신 명령(11절)을 기억하는 것이다.
 
*문자적인 율법 적용과 집행을 고수하던 이들에게 예수의 판결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또 율법을 집행할 권한이 자신들이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성찰은 우리에게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다(약 2:13)는 은혜의 원리를 발견하게 한다.
 
*하나님께 청원할 때 내어놓을 수 있는 카드가 우리에게 있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신데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약속할 뿐이다. 우리가 죄사함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사랑을 죄문제에 적용하는 것,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배우기 위해 나아오는 자들을 가르치신다(1~2절). 자신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시도를 아셨지만, 가르침을 멈추지 않으셨다.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강도의 굴혈로 전락한 성전에서 말씀으로 새 창조를 시작하셨다. 말씀의 회복이 필요한, 내 삶의 낡고 부패한 영역은 어디일까?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능력과 회복의 역사를 ㄱ여험하고 있는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시험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누구보다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율법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이웃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3~6절).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것마능로 자부하거나 안심하면 안 된다. 날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나를 용서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여인을 정죄하는 자들에게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도록 하신다(6, 9절).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게 하시고, 무뎌진 양심을 자극하셨다. 넘어진 자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는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긍휼과 용서의 마음이다. 우리 역시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죄 용서에 대한 말씀뿐 아니라 죄와의 단절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신다(10~11절). 결코 죄의 문제가 가볍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으려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그분의 명령을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죄 용서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반응은 죄의 단절로 나타나야 한다.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생명의 빛’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셔서 흑암을 몰아냈듯이 생명의 빛으로 죄악의 어둠 가운데서 고통받는 우리를 구원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라 빛된 삶을 살고 있는가?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자는 참된 판단에 이를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을 근거(신 19:15)하여 예수님의 증거를 참되지 않다고 판단한다(13, 16절). 율법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육체를 따른’ 판단이었다. 판단의 방식이 판단의 참과 거짓을 보장하지 못한다. 더구나 동기가 악하다면 그 판단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면, 판단하게 된 동기와 목적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만이 빛을 창조하셨고 그 빛에는 밝음과 힘이 있다. 세상 속에 빛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진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빛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언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불완전한 인간의 증거에는 거짓과 오류가 포함되곤 한다. 그래서 복수의 증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증언하신다. 모세가 증거를 요청했을 때도 순종한 후에 경험할 것을 증거 삼으셨다(출 3:11). 예수 역시 스스로 믿을 만한 증언을 하실 수 있다. 참 믿음은 그분의 증거를 참되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의 증거가 참된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그분의 일만 행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분의 일을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통로가 되신다.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19절). 육체로 판단하는 자들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계획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하난미을 아는 기쁨을 누리리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와 자신의 사명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생명의 위협이 있는 공적인 장소에서도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까지 사명을 완수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시간에 얼마나 민감한가?
 
 
 
*주님, 말씀이 저를 위한 도구가 되지 말게 하시고, 제게 역사하는 말씀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 제 자신을 비추고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빛이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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