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41]
 – 2026년 02월 27일
– 2026년 02월 27일 –
요 8:31-4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죄에 종노릇하고 있다는 암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 된 적이 없었다고 항변한다. 예수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를 알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처럼 행동하라고 경고한다.
    
    
    
1. 아브라함의 자손(31~38절)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참 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31~32절). 예수는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된다”고 하신다. ‘내 말에 거한다’라는 표현은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말한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진리는 예수 자신이시다. 예수를 온전히 알면 그 결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이것에 대하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자유의 선언은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적 자유를 의미한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다. 사회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을지라도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유대인들에게 온전한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고 반문했기 때문이다(33~34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근거한 영적 자부심이 있었기에 영적으로 노예 상태가 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비록 육체적인 자유가 있을지라도 죄의 종으로 살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죄”란 단어 앞에 관사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죄를 하나의 인격적인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죄의 종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노예 상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5~36절에서 예수께서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라마엘은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났으므로 아브라함의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고 쫓겨났고, 자유로운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 이삭은 상속을 받고 영원히 아버지 집에 살았던 것을 의미한다(창 21:10). 예수께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유대인들이 되의 종노릇하는 삶에서 그의 아들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영원토록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권고한다. 사람들에게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영적 자유를 얻으라고 권고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은 현재나 과거에 종이 된 적이 결코 없다고 크게 분노한다. 이런 반응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37~38절에서 예수는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인정하셨다. 이는 혈통적, 생물학적 자손 관계를 인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한다. 육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그의 믿음을 상속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이미 작정했고 그것을 예수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하여 몇 가지 특징을 언급하는데, “선한 눈, 겸허한 영혼, 그리고 겸손한 마음”이다. 그런 기준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2. 아브라함의 자손을 향한 예수의 권고(39~41절)
예수의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다”라는 선언에 유대인들의 주장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라는 것이다(39절).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자랑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자랑을 여지없이 격파한다. 아브라함이 진리를 듣고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듣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께서 그의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예수를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하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린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그 진실성을 신뢰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사탄의 자녀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그 증거라고 강조한다(40절). ‘하나님께 들은 진리’는 예수께서 지금까지 계속 전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예수는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보내신 분이심을 분명한 여러 증거와 진리의 말씀으로 제시해도 그들은 예수를 거절했고 오히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정체를 확신한다(41절). 그들이 비록 혈통적으로 유대인일지라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며 예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아비가 행한 일’은 아브라함이 행한 일이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는 다른 아버지가 있으며 그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 아닌 정반대의 일을 했다는 암시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호세아 선지자의 시각처럼 음란한 데서 출생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적자가 아니라 사생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주장에 곧바로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라고 반격한다. 이 말은 “우리는 불법적인 자손이 아니다”라는 의미다. 이어서 유대인들은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예수와 유대인의 감정 대립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예수는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는데, 만일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진리도 하나님 아버지도 그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은 예수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지 않으면서, 더욱이 속으로 그를 죽이려고 작정했으면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광신주의에 가깝다.
    
    
    
나는?
-예수는 예수의 말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다. 그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이후로 한 번도 정치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려오지 않았기에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남의 종이 아니었다고 반박한 것은 자신들이 신앙적으로 종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예수님이 이 자유를 영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들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은 이미 진리 안에 있고, 그러니 자신들이 누려야 할 다른 차원의 자유가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 못한다. 진리를 알기 전에 자신이 누구의 종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믿는 유대인들이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예수도 시인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이 어찌 예수를 죽이려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죄의 종일 뿐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니 진리인 예수의 말이 그들 속에 들어 있을 여지가 없고 아들이 주는 자유,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정반대로 그 약속을 성취하러 온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가?
    
-유대인들이 품고 있는 마음과 행하려고 하는 일들이 그들의 소속을 말해준다.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자식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행하려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이었다. 예수의 말에 지적으로는 동의했지만, 그 말을 하는 예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아비가 해왔던 일, 즉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지금도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의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요,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자들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현재 종의 삶을 살고 있다는 암시다.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은 두 종류의 종이 있었다. 유대인 종과 이방인 종이다. 유대인 종은 일반적으로 그 예속 기간이 6년이었고, 그 후에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 종은 소유자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유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구속(拘束)을 위한 구속(救贖)이 아니다. 자유를 위한 자발적인 매임을 위한 구속이다. 진리인 예수님을 알 때, 그 안에 거할 때, 그를 좇아 살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인생의 주도권을 양도하는 믿음이나 자발적인 자유 포기인 순종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다. 죄와 죄로 물든 자아, 자아로 가득한 세상,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 이러한 흑암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형태의 예속은 이 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유 추구의 증상일 뿐이다. 세상은 자멸과 공멸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유의 진전, 행복의 증진”이라는 허상 속에서 살고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가 있고 거부하는 자가 있다. 주를 따르는 자가 있고 떠나는 자가 있다.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신분에 기대어 거짓 안전과 자유를 누리려는 이들이 있다. 또 예수님을 자유가 아닌 속박만 주는 부능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오해든 자기 의든 진리가 주는 자유를 거부할 이유와 명분이 그들에게는 너무 많아 보인다.
    
*주님은 참 자유를 주시는 진리이시다(31~36절). ‘진리’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 세상에 드러난 구원 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진리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진리인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이 거짓 세상의 모든 얽매임에서 참 자유를 얻는다. 요즘 나를 얽매는 것들이 무엇일까? 충만한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겠다.
    
*참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와 관계없는 이전의 도덕과 철학,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롭게 된다. 이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가?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등지고 거스르는 것으로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들을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죄의 종이었다. 세상은 마음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며 또 다른 죄이다. 지금 나는 어떤 자유를 누리는가?
    
*진리에 있어 중립 지대는 없다. ‘믿은 유대인들(31절)’조차 더 깊은 진리로 들어가자,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하고 죽이려는 마음마저 먹었다(37~40절). 예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달라도 말씀에 복종하는 자가 참 제자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이 행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신다(39~41절). 지금 내가 행하는 들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고 있는가?
 
*내가 누구에게 속한지는 내가 가진 타이틀이나 입술의 고백에서 드러나지만, 더 확실한 것은 위기와 선택의 순간마다 나타나는 “행위(열매)”로 증명될 것이다. 주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한다”는 말씀이 나에게는 심판이 아닌 축복과 격려의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일상에서 선하고 진실한 삶이 “과연”이라는 세상의 감탄이 되는 거룩한 표징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같은 삶은 결국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것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나를 돕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나를 파괴하는 자기중심성을 치열하게 분별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혹 내 마음을 가득채운 것이 굳어진 신앙의 습관, 생각, 경험보다 주님의 말씀일 때, 세상이 옭아맨 가치에서 자유할 수 있으리라.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공동체를 어떻게 목양할까 늘 고민한다. 그럴때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늘 동일하다. “말씀”이었다. 말씀이 중심되게 하면 중심된 말씀이신 주님의 선한 손길은 매일, 매순간마다 분명히 ‘그 말씀’으로 생각, 언어, 행동을 이끌어주시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맡기신 목회이기에 나의 생각과 말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확고하다. 매일 말씀 앞에 본문을 붙잡고 또 붙잡는 것은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시간들이다. 때로 이 시간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내게 율법적인 굴레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말씀안에 있을 때 그 어떤 세상 가치 아래 있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여 주시며 ‘그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과 판단이 아니라 말씀이 나와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는 편안함이 자유함을 가져다 준다.
 
    
    
    
*주님,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진리를 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겠습니다.
*주님, 겉으로만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참 자유인으로 주님의 은혜로 내 안을 가득 채우겠습니다.
*주님, 저의 자유함이 주님이 주시는 ‘그 말씀’에 있음을 압니다. 더욱 풍성하게 그 말씀을 주시되 저부터 알아듣고 깨우치며 그 안에 먼저 거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댓글 남기기

매일성경 묵상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요 9:24-41]

요 9:24-41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사람을 두 번째로 소환하여 심문한다. 그때 눈 뜬 맹인은 자신의 치유를 근거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눈 뜬 맹인, 영적인 맹인 [요 9:13-23]

요 9:13-23 눈 뜬 맹인, 영적인 맹인    예수를 통해 보게 된 사람의 이웃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간다. 예수가 그를 안식일에 치유하셨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41]

요 8:31-4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죄에 종노릇하고 있다는 암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