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12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예수께서 길에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을 만나시자, 제자들은 그의 현재 상태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예수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세상의 빛인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반죽하여 그 시각 장애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였을 때, 그의 시력이 회복된다.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질병과 죄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구약에서 질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경우가 제시되기에 사람들은 질병이나 불행을 하나님의 징벌 또는 노여움의 표시로 이해했다(출 4:11; 신 32:39). 초대 교회와 바울도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한다(마 9:5; 고전 11:30~32; 약 5:15~16). 하지만 예수께서 질병의 원인을 반드시 죄나 사탄의 영향으로 보지 않으셨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일”로 말씀하셨다.
1. 예수와 날 때부터 맹인(1~5절)
본문은 8:59의 상황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예수를 치려고 했을 때 몸을 피해 성전 바깥으로 나와서 제자들과 같이 길을 가실 때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를 가고 계셨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숨지 않고 공개적으로 다니셨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먼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신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 사람의 맹인 됨이 무엇 때문인지 묻는다(2절). 이런 질문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비롯된다. 구약은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고 했다(창 2:17; 겔 18:20). 죄로 인해 고통이 온다(민 12:10; 시 89:32; 107:10~11). 신약도 죄 때문에 질병 혹은 죽음의 심판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행 5:1~11; 고전 11:30; 요일 5:16). 심지어 요한복음 자체도 사람의 질병이 그의 죄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5:14).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난 후 그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분명한 언급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죄와 병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제자들은 왜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 자체의 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우상숭배를 했다면, 그녀의 태아도 우상숭배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유대 전통에서 말미암은 것 같다. 혹은 유대인들은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투었기 때문에(창 25:22), 그때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맹인의 고통의 원인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신다.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직역-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신다(9:3). ‘하나님의 일들’이란 무엇인가?(3절) 이어지는 문맥으로 볼 때, 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맹인이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에서 볼 때, 결국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여, 사람들이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10:37~38; 14:10~11; 3:16). 이러한 일은 원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일을 아들에게 보이사 아들로 이 일을 하게 하셨다(5:20). 그래서 이 일은 곧 예수님의 사명이 되었고, 예수님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4:34). 그리고 마지막에 이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셨다(17:4; 19:30). 실제 9장 끝에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9:35~38).
따라서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세상의 빛인 예수님은 사람들 안에 있는 영적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다. 그러므로 9장 전체의 핵심은 ‘영적 시력’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면 결국 ‘영적인 맹인 즉 죄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설영 육체적인 시력이 없을지라도 그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보는 자’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이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4절). 자신이 세상에 있을 때는 ‘낮’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빛이기 때문이다(5절). 이때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기서 ‘밤’이란 예수님이 죽으신 후 성령이 오시기 전을 가리킨다. 이때가 바로 밤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2. 예수께서 시각 장애인을 치유하다(6~7절)
예수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셨다(6절).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7절). 예수님은 왜 이런 행동과 말씀하셨을까?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런 방법을 굳이 택하셨을까?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예수께서 치유하실 때 침을 사용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막 7:33; 8:23). 고대 사회나 유대 전통에서도 침은 자주 치료제로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침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15:8; 민 12:14).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예, 대소변, 모유, 생리)은 부정하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한 것들도 때로는 의식적으로 합당한 범위 내에서 정결과 치유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본문은 예수께서 비록 부정한 물질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정한 것들이 예수님의 손을 통해,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왜 흙을 사용하셨을까? 이레니우스 이래로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는 일종의 창조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됐다(창 2:7). 평범한 흙이 예수님의 손을 통해 창조의 도구가 된다. 예수님은 침과 흙을 통해 재창조하신다. 부정한 것도, 평범한 것도 예수님께 붙들린 바 되면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본문의 문맥에서 자연스럽다(7절). 왜냐하면 눈에 묻은 흙을 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기적적 치유는 맹인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구약에서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병을 즉시 고치지 않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과 비슷하다(왕하 5:10~13).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상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실로암은 분문이 밝힌 대로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다(7절). ‘보냄을 받았다’라는 것은 결국 기혼 샘으로부터, 이 물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실로암의 뜻이 곧 예수님께 해당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다(10:36; 17:18; 20:21). 한편, 7절은 이사야 8:6과 창세기 49:10과 연결할 수도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실로암의 물을 거절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실로암과 같은 어원의 단어인 ‘실로’가 창세기에서는 메시아적 의미로 사용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창 49:10).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아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거절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유대인은 불신하고 배척하지만, 결국 메시아 예수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을 가져다줄 것임이 본문에 함축된 것이다.
분문은 또한 초막절 배경과도 연결된다. 초막절에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성전 마당 항아리에 가득 채우는 예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물을 공급하신 것을 기념하고 앞으로도 그런 공급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예식이다. 이때 예수는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공급하시겠다고 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에게 주실 성령을 일컫는다(7:37~39). 따라서 실로암 물로 눈을 씻는 것은 곧 예수께서 주실 성령을 통해 영적 어두움이 벗겨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회복한 사람과 그 이웃(8~12절)
맹인이 시력을 회복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8~9절). 그는 자신이 맹인이었던 그 사람이라고 자신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어떻게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예수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설명한다(11절). 맹인이었을 때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이 사람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증언한다. 물론 이 사람의 이러한 증언이 복음 전파 차원의 전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 것은 나중의 일이기 때문이다(38절).
오히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를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칭한다. 이로 보건대, 그는 이 시점에서 아마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위대한 인물로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한 사람을 보신다. 먼저 보신 것이다. 그에게 빛이란 존재해 본 적이 없으며, 온통 흑암뿐인 세계에만 사는 사람이었다. 동정과 화제의 대상일 뿐, 교제의 대상은 아니었다. 살았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마치 창조 전 세상처럼 흑암과 혼돈, 공허가 가득하였다(창 1:2). 예수님이 ‘보셨지만’, ‘보기에 심히 좋다’는 상태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앞을 못 보도록 태어난 것은 부모의 죄나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하신다. 도리어 예수는 그렇게 된 원인보다는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하신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아주 단정적이다. 잘못되었다면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릇된 전제와 선입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택일의 답을 요구받은 예수는 원인(무엇 때문에) 보다는 목적(무엇을 위해)에 주목하게 하신다.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과거 지향적 답변 대신에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미래지향적이고 전향적인 답변을 내놓으셨다.
-고난의 이유를 항상 알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고 있어도 주의 뜻을 이루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그러니 “탓”하지 말고, “뜻”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먼저 눈먼 자의 눈을 고치신다. 창조의 말씀인 예수는 흙으로 사람을 처음 창조하시듯,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긴 후 그의 눈에 바르신다. 단순히 눈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새 창조하려는 의지를 보이시는 행동이었다. ‘바르다’가 ‘기름을 붓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것은 이것이 그를 ‘종’으로 삼는 의식임을 보여주며, 특히 ‘보냄을 받았다’라는 이름의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씻게 하신 것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처럼(4:34; 5:30; 6:38) ‘보냄을 받은 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 때부터 맹인을 치유하신 기적은 혼돈을 극복한 새 창조였다.
-예수님은 보냄 받은 자로서 보내신 분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 예수의 행적은 세상에 빛과 생명을 가져오는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행보였다. 예수가 맹인을 보낸 곳은 ‘보냄 받음’이라는 뜻을 가진 실로암이라는 것은 이제 맹인 역시 보내심을 받은 자처럼 세상 속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제자로 살게 될 것을 예고한다. 이 모습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의 존재가 “예수가 세상의 빛(8:12)”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전에 앞 못 보며 구걸하던 자가 온전해진 것을 보고 자기 눈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말(7절))을 그대로 전한다. 그는 예수님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치유된 직후, 벌써 ‘보냄을 받은 자’처럼 예수의 말과 행사를 증거하는 자로, 제자로 산다. 예수의 말씀처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낮에 빛이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인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앞으로 그에 대한 당국의 압박도 커지겠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의 증언은 더욱 당당하고 담대해질 것이다.
-이렇게 빛을 만난 이가 빛의 증인이 된다.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의 뜻을 전한다.
*예수는 긍휼이 풍성한 치료자시다. 날 때부터 맹인 된 그를 예수가 먼저 보셨다. 그리고 충분히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었지만, 침 섞은 흙을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다양하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은 동일하다.
*예수도 자신이 보냄을 받았으며, 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백성의 모든 걸음이 그의 계획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것이며,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아직 낮이어서 빛 되신 예수께서 함께 계실 때,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할 테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아는 것은 ‘예’, 모르는 것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참된 증인은 경험을 분명하고 가감 없이 진술한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예수에 대해 분명하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가?
*주님, 먼저 보시고 새 창조를 하신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먼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보냄을 받은 자의 일을 하셨고, 회복한 그 사람도 보낸 사람을 증언 하였듯, 나의 삶에서도 보내신 주님의 증인 되는 삶을 분명하게 증언하겠습니다.
*주님, 원인을 따지고 구하는 것이 아닌, 보내주신 주님의 뜻을 따라 목적을 구하고 찾아 기대하고 소망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