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3-23 눈 뜬 맹인, 영적인 맹인
예수를 통해 보게 된 사람의 이웃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간다. 예수가 그를 안식일에 치유하셨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심문하면서 동시에 부모를 불러 기적 사건이 맞는지 확인한다. 시력을 회복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눈을 고친 분이 예수이며 그는 선지자라고 고백한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오직 예수를 비난할 증거를 찾고자 했다. 그의 회복이나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에는 관심조차 없다. 자기들의 관점에 따라 예수를 비난하고 병자와 그 가족을 무시한다.
1. 맹인이었던 사람을 심문하다(13~17절)
맹인이 시력을 회복한 것을 확인한 유대인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다(13절). 이것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장이 그 회복 여부를 판단하여(레 13~14장) 정결례를 통해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맹인도 부정한 사람인가에 관해서는 율법에 따르면 맹인과 같은 흠이 있는 자는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할 수 없다(레 21:18) 라고 되어 있다. 구약에 기록된 속담 중에는 맹인과 저는 자는 ‘주의 집’ 즉 성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삼하 5:8). 예수 시대의 쿰란 공동체도 맹인과 저는 자에게 공동체의 출입을 제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에 따라 추측해 보면 정확한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맹인은 성전 제사에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제사장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맹인을 데려갔다고 기록한다. 이것도 추측하기는 제사장에게 데려가기 전에 회당의 지도자들인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자문하기 위해서였다.
5장에 이어, 안식일이 다시 논쟁의 쟁점이 된다(14절).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심문했다(15절).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는지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회복에 관심조차 없다. 오로지 안식일 규범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안식일(출 20:11; 신 5:15) 이었지만, 그들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보지 않고, 안식일 규정에만 얽매여 있었다.
그들의 질문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15절). 그러자 어떤 이는 예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라 하고, 다른 이는 예수의 기적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맞다고 한다(16절). 이에 따라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 ‘분쟁’은 문자적으로 ‘분리’를 뜻한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요한복음에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분리가 일어났음을 곳곳에서 밝힌다(7:43; 9:16; 10:19).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어디나 이런 분리가 일어난다. 따라서 분리가 일어나는 것에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를 ‘선지자’라고 고백한다(17절). 이는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과 비슷하다(4:19).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메시아라는 의미로 고백 된 6:14과 구별된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9장 전체는 맹인이었던 그가 예수에 대해 갖는 인식이나 믿음은 발전한다. 그는 처음에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절)’이라고 했다. 이어 ‘선지자’라 하고(17절) 나중에는 자신을 마치 예수의 제자로 여기는 듯한 발언으로 이어진다(27절). 또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다(33절).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경배한다(38절). 예수는 한 맹인의 눈을 치료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영적인 눈을 열어 메시아를 알게 하신 것이다.
2. 맹인의 부모를 심문하는 바리새인(18~21절)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증언을 믿지 않고, 그의 부모를 불러 심문한다(18절). 그들은 예수의 기적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18절 이후부터는 그들이 정작 안식일 문제보다도 예수의 기적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주요 증거였기 때문이다. 구약은 메시아가 올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예, 사 29:18; 35:5; 42:7).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메시아의 표적을 보아도 깨닫지 못했다. 예수를 반대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에 바빴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맹인이었던 것을 증언하지만, 그가 어떻게 시력을 회복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20~21절). ‘그가 장성했다’를 직역하면 ‘그가 성숙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다. 유대 문화는 법적으로 증언할 만큼 성숙한 나이를 최소 열세 이상으로 보았다.
3.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가 두려워하다(22~23절)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심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세한 대답은 아들에게 들으라고 했다(23절). 그 이유를 요한은 그들이 유대교로부터 출교당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는 부모가 예수의 기적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예수의 행하신 기적을 들었으나 그 사실을 숨겼다. 그들은 출교를 감수하고서라도 증언할 만한 믿음에 이르지 않았다.
‘두려움’은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가장 큰 적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은 좀처럼 드러내놓고 믿는 자가 없었다(7:13). 유대 관리 중에도 믿는 사람이 많았으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있었다(12:42 – 실제 헬라어 본문에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말이 없다. 다만 문맥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 아리마대 요셉이 있다(19:38). 예수의 제자들도 두려움 때문에 숨어 지냈다(20:19). 한편, 예수께서 풍랑 속에서 자신을 유령인 줄로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6:19~20). 예수는 두려움과 반대되는 이 평안을 무엇보다 주려고 하셨다(14:27; 16:33).
한편, 이 구절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본문으로 이해됐다. AD 90년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유대인들은 열여덟 가지 축복 선언을 결정하였는데, 그중에 유대교 이단(기독교를 포함하여) 을 대상으로 하는 선언이 있었다. 즉, 축복 선언 중에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저주를 선포하는 내용이 있었고, 기독교인이 이 저주 선언을 하면 유대교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이단자들(기독교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지 못하면 이단으로 분류되어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유대교로부터의 출교의 위협은 어느 특정 시기와 상황을 지칭하기보다는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당한 핍박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막 8:37; 눅 12:8~9; 행 4:5~22; 살전 2:14).
나는?
-눈을 뜬 맹인의 이웃들은 그의 치유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 판단을 구하기 위해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이미 눈 뜬 사람을 데려간 꼴이 되었다. 선생이라는 바리새인들은 치유의 사실보다, 치유한 ‘날’을 문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이 크게 영광 돌릴 이 사건을 평가절하하고 논쟁거리로 전락시킨다. 예수는 이 일로 백성을 미혹하는 불온한 인물이 되고, 그런 사람을 두둔한 맹인은 결국 추방당할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지혜가 가져온 비극이었다.
-예수께서는 ‘또’ 안식일에 눈먼 자의 눈을 열어주셨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이 안식일에 아버지도 하시고 아들도 하시는 일이었듯이(5:17, 24),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일 역시 안식일의 참뜻을 성취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눈먼 자에게 안식이 없었듯이 하나님을 떠난 어둠의 일에는 참 안식이 없었다. 돈이 아니라 빛이 안식이다.
-예수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11절) 눈 뜬 맹인이 이제는 자기 말로 예수의 행적을 증거하며, 예수님을 ‘예수라 하던 그 사람’이라고 부르더니(11절) 이제는 ‘선지자’로 부른다.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고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는 바리새인의 주장(16절)을 면전에서 반박하는 위험한 발언이기에 더욱 빛이 난다. 그는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도 열려 혹독한 대가를 감수하고라도 눈 뜨게 하신 분을 증거하는 제자로 거듭나고 있다.
-눈 뜬 맹인의 부모는 예수가 아들 눈을 뜨게 한 것을 알면서도 출교당할까 두려워 아들이 날 때부터 앞이 안 보였다는 사실만 확인해 주고, 예수께서 고치신 것은 시인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치유자일 뿐 자신의 모든 걸 걸고서 시인하고 따라야 할 분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맹인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다. 어떤 증거와 증언을 보고 들어도 믿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지 않기 위해 안식일을 어긴 죄인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리 앞에서 실체가 드러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던 신념 체계가 무너질까 두려워 벌벌 떠는 어둠의 처절한 자기부정과 자기최면과 자기정당화 노력이 애처롭기만 하다. 영적인 맹인인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진리 왜곡’과 ‘파괴적인 권력’뿐이었다.
-명백한 증거인 눈 뜬 맹인이 있었고, 그의 증언도 일관성이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처럼 ‘소수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주장도 예수를 증오하는 ‘다수의 외침’ 속에 묻힌다. 이 놀라운 치유의 의미도, 예수의 정체도, 안식일의 참 의미도 모른 채 자기들의 권위와 신념 체계가 무너질까 두려워 자기기만과 정당화에 몰입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진정 눈먼 자들이었다.
-눈 뜬 맹인의 부모의 태도가 아쉽기만 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아들을 고쳐준 치유자일 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따라야 할 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처럼 진리를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고난이 두려워 진리를 감추는 것도 매한가지다.
-사마리아 여인처럼(4장), 눈을 뜬 맹인은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에 대한 인식과 고백이 점점 온전해진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 ‘선지자’,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33절)’로 이어지는 증언을 통해 그가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도 열린 것이다. 내 믿음의 걸음 속에서 이와 같은 성숙해지는 성장을 늘 추구하리라.
-변화가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대답이다. 신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의 심문과 추궁에도 눈 뜬 자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대답은 유창하고 막힘없는 대답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뚜렷하게 변한 나의 삶이어야 하겠다.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빛되신 예수의 확실한 증거를 보아도 그러 안식일 규례를 어긴 죄인으로만 보았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규례와 규정만 뒤적이는 그들의 완악함과 종교적 전통과 관습이 우상이 될 때 종교를 구성하는 시스템은 진리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혹시 오늘날 기득권화 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고통스러운 우려를 외면할 수 없다.
*눈 뜬 사람은 점차 빛 가운데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평생은 어둠 뿐이었지만, 예수로 인해 빛이 열렸다. 그리고 차근 차근 참 빛되신 예수께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현재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점차 참 빛, 진리되신 주님께로 나아가면 그것 곧 성숙이다. 오늘도 그런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맹인의 부모가 안타깝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체제에 완벽히 순응해 있다. ‘출교’라는 사회, 경제적 보복이 두려운 그들은 아들을 치유하신 예수의 존재를 외면한다. 두려움이 가져온 어정쩡한 침묵은 빛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막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직장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것을 조심한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빛을 소유하고 빛 가운데 있다면 결코 빛을 가출 수 없다. 빛은 어둠을 밀어낸다. 어정쩡한 침묵과 감춤의 유혹에서 일상속 드러나는 주님의 빛을 감추려고 부화뇌동하지 말라.
*맹인은 눈을 떴지만,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주님, 바리새인들의 저열하고 비겁한 행태 속에 자기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 애쓰는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과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자기기만과 정당화에 몰입하는 눈먼 자들의 행태를 이어받지 않도록 늘 구별하겠습니다.
*주님, 치유 받은 이후 예수에 대한 고백이 변하고 증인의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눈을 뜬 맹인의 모습에서 나의 삶도 일상의 고백이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고 증언하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빛과 소금 된 존재로 서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빛 되신 주님 안에서 빛을 따라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