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0:22-42 목자와 양, 아버지와 아들
수전절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밝히라고 요청한다. 이에 예수는 그들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행해도 믿지 않는다고 질책하신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 하지만, 예수는 더욱 분명하게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의 신성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수전절(또는 봉헌절, 22절)은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에 의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탈환하여 정화하고 새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이 축제도 초막절과 마찬가지로 일주일 동안 계속된다. 오늘날에는 “하누카”라는 절기로 지키고 있다.
1. 예수의 정체성과 기원(22~30절)
22~25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조차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한다. 22절에서 시간과 장소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장면이 시작됨을 알린다. 수전절은 ‘성전 봉헌 축제’라고도 하는데, 기원전 164년부터 시작되었다. 축제의 한가운데서 예수는 유대인들과 차가운 분위기를 이어간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 동편 담에 있는 주랑을 가리킨다. 솔로몬왕이 건축한 것이라 하여 솔로몬의 행각이라 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솔로몬의 행각을 거닌다는 표현을 통해 지혜로운 솔로몬왕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회랑을 거니는 예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혀 말하시오(24절)”라고 유대인들(지도자들)이 말한다.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군중의 호의적인 여론은(7:26~31) 이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였도다(25절)”라고 응대한다. 예수에게 명백한 자기 해명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심리상태는 불안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예수의 말을 믿지도 않고 또한 표적도 믿지 않는다(6:36). 예수는 직접적으로 유대인에게 “나는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예수님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상은 다르기 때문이다.
26~30절에서 이 유대인들은 예수께 속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모든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27절은 10:1~18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는 말을 통해서(28절),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양들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예수 안에 거하면서 예수가 말씀한 것을 따를 때 주어지는 것으로 현재적 의미가 많이 내포되고 있다. 여기에는 자신을 따르는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예수의 단호한 의지가 나타나 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29절)”라는 말 속에는 세상의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그 양들을 위임하셨기 때문에 그 양들은 확실한 구원이 보장됨을 나타낸다. 예수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호칭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하나님 상을 제시한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예수의 말씀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충분히 신성 모독의 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이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나타나시는 이러한 변화를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예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율법적 세계관 속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들은 알을 깨는 아픔을 거부하였기에 생명을 얻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1:1의 말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31~39절)
이 단락에서 유대인들의 거부를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완악함을 나타낸다. 31~33절은 신성 모독으로 오해받는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행하신 선한 일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1절)” 예수의 말을 듣고서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 함으로서 그들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불신을 드러낸다.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32절)”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자기를 방어하기보다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동을 좀 더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신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선한 일’이었지만, 유대 지도자들이 가졌던 예수에 대한 선입관은 그 좋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란은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졌다. 요한복음 9:22에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모두 회당에서 출교시키겠다는 유대인들의 결의가 나온다. 예수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34~36절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예수를 강조한다. 34절의 “너희 율법”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율법인데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사랑의 계명과 대조되지만,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위해서 예수는 시편 82:6을 인용하여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성품을 닮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35~36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인용한 말씀(시 82:6)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당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자들(이스라엘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칭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편 82:6에서는 사실상 ‘사사’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칭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사들을 신들로 칭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 예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37~39절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를 표현한다. 37절에서 예수가 언급한 “일들”은 곧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하사는 일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에게 맡겨준 일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조차 믿지 못한다는 논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는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연합을 시종일관 강조하신다(38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와 하나님의 하나 됨은 곧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의 하나 됨의 본보기가 된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예수는 한시적으로 물러나신 모습을 보여준다(39절).
3. 요단강 건너편에서 증거하시는 예수(40~42절)
40~42절에서 예수는 요단강으로 물러가셔서도 세례 요한의 증거가 진실하다는 점을 전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자였다. 그는 예수를 환영하고 기다렸던 자이였기에 예수가 세례요한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간 것은 자연스럽다. 이곳의 이름은 예루살렘 부근의 베다니와 같은 명칭이지만, 장소는 다른 곳이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41절)” “표적”은 기적에 대해서 저자 요한이 사용하는 용어다. 세례 요한과 대조되는 예수의 사역은 표적과 그 표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고, 반대로 예수의 반대자들은 더욱 예수를 위험인물로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반대했지만, 예수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요한의 사역이 사람들이 예수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42절).
나는?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여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수전절에 성전에서 참 성전인 예수께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하라고 요구한다.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겨울 날씨처럼 냉랭하였다. 말씀으로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나타나기까지는 믿을 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밝히 아는 날엔 메시아를 죽음에 매달 것이다. 메시아를 밝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메시아를 영접하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드러내놓고 밝히 말씀하셨고(7:26; 18:20) 또 각종 표적을 통해 눈으로 보게 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예수께 속한 양이 아니었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않았다. 듣고 싶은 말과 이루고 싶은 것을 해주는 목자가 나타날 때까지 예수를 참 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 예수의 손에서 그리고 만물보다 더 크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목자의 음성을 잘 따라가는 양들에게서 예수께서 주신 영생을 앗아갈 수 없다. 세상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더라도 결코 이 목자의 보호하심만은 의심하면 안 된다. 양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이 마음을 헤아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의 마음은 하나이다. 사탄이 하나님과 아들의 하나 된 관계를 깨뜨릴 수 없다면, 양과 하나님의 관계, 양과 예수님의 관계도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고 돌을 들어 치려 하였다. 예수님이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 것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하나 된 관계를 말한 것일 뿐, 자신이 인간인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한계였다. 예수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지 않은 어떤 주장도 다른 예수, 다른 메시아를 나오게 할 수밖에 없다. 그가 행한 일, 하신 말, 하신 약속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할 때, 참된 신앙은 시작된다.
-예수님은 선한 일 즉 자기 백성을 향한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내주하여 역사하시고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후엔 이 아버지의 사랑에 따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고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이 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 삶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보도록 사랑의 삶, 선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물리적인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율법(시편 82:6)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여 율법대로 판결하게 한 통치자들이 ‘신’으로 불렸듯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자기를 대표하여 세상에 보낸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출신을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나 행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심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장차 예수께서 이르신 신의 영역으로 가겠지만, 오늘 여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할 때 신적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자신들이 이해한 율법과 신념에 갇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는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불신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거짓 증거가 그들 안에 너무 많아서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 만큼이나 내가 가진 전제가 옳은지를 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들은 끝까지 책임져주신다.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앗아갈 수 없다. 그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신 분이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만물을 의지할 것인지 만물보다 크신 분을 의지할 것인지 선택이 놓여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들은 끝까지 책임져주신다.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앗아갈 수 없다. 그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신 분이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만물을 의지할 것인지 만물보다 크신 분을 의지할 것인지 선택이 놓여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도발적인 발언을 하신다. 돌에 맞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선언이었지만, 눈 하나 깜짝 안 하신다. 위협에 포기할 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그분을 위해서였고, 그분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위협에 포기할 정체라면 진정한 정체가 아니다.
*주님, 주님을 붙잡는 나의 연약한 손보다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손이 더 강함을 신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