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1-16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원하시는 뜻대로, 그때를 따라
예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곧장 가지 않고 지체하신다. 결국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를 찾아가신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고 그것은 다시 깨어날 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다. 남은 살리고 자신은 죽게 된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은 요한복음의 일곱 개의 표적(2:1~11; 4:46~54; 5:2~9; 6:1~14, 16~21; 9:1~12; 11:1~44)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사건이 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이 나사로 사건이 그 역할을 한다. 죽은 사람을 살린 예수의 능력은 예수를 생명을 주는 분으로 묘사하는데 적당하며, 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다”라는 말과도 혼용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의 시작(1~4절)
1~3절은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를 찾는 장면이다. 이 단락(1~4절)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과 예수의 예상치 못한 계획이 시작된다. 먼저 요한은 이 사건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1절)”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대략 3km 떨어진 마을로 올리브 산(감람산) 동편 기슭 하단부에 있었다. ‘나사로(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또는 남동생)이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2절).” 마리아는 누가복음 7:37~38의 창녀로서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로 닦았던 여인임을 연상하게 되지만 당시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기에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예수는 나사로와 두 자매를 사랑하였다. “사랑하시는 자(3절)”는 요한복음에서 애제자들에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13:23에 등장하는 애제자가 나사로라는 주장도 있지만, 논란거리다. 그만큼 예수와 나사로의 관계가 아주 가까웠음을 나타낸다.
4절은 두 자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를 청했을 때 예수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라고 대답한다. 9:3에서도 보여주듯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나사로의 병에는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의 일은 아들인 예수가 받을 영광도 포함된다. 요한복음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은 늘 긴밀하게 연결되어 표현된다.
2. 갈 길을 밝히는 세상의 빛(5~10절)
이 단락에서 예수는 다시 위험한 유대 지역으로 돌아가려 한다. 예수는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5절)”하였다. 이때 예수가 사용한 헬라어는 “아가파이”로 이타적이고 고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예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문다(6절). 마음으로는 곧 달려가서 고쳐주고 싶었으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원문을 보면 6절의 문장 맨 앞에 접속사 ‘그러므로(우운)’가 있는데, 이는 예수가 계시던 곳에 이틀간 더 머물러 계신 행동이 세 남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부연한다. 즉, 나사로 병 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그들에게 가지 않은 것이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7~10절은 예수께서 유대로 돌아가시면서 준 말씀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7절)”고 한다. 사실 유대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장소다. 바로 이곳은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예루살렘을 포함한다. 10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두 번이나 돌로 치려 했던 곳으로,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제자들도 그 위험한 곳으로 가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8절).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9절)“ 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낮”에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빛인 예수를 보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낮 동안에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다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사고 속에서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예수의 공개적인 사역을 불법적으로 방해할 수 없다는 예수의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반면 그 공개적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없다.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10절)”는 말씀은 그 사람에게 내적인 빛이 없다는 것은 믿음으로 이끄는 동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 내적인 빛은 “빛”인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이끌어주는 예수를 가리킨다.
3.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예수(11~16절)
이 단락은 예수께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제자들과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는 장면이다. 예수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라고 말씀하신다. “잠들었다”라는 말은 죽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라고 반응하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인 “깨우러 가노라”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3~16절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13절)” 예수는 잠자는 것을 죽음으로 말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쉬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잠자는 것은 죽었다는 말의 비유적인 말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준다(14절). 또한 예수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예수가 당할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 부분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의 오해를 교정해 주시면서 예수는 자신이 그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예수의 지체와 부재가 하나님의 영광과 나사로를 향한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을 잠이 되게 하시는 부활의 능력이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는 말은 예수께서 애써 설명하신 것에 비추어볼 때 다소 엉뚱하기 짝이 없다. 예수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낮에 행하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9절)”라고 하셨는데, 도마가 이렇게 반응한 것은 여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요한이 도마의 이 말을 기록한 것은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독자들에게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도마는 예수를 신뢰하면 예수가 가는 길에 동참해야 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결단을 드러내며, 다른 제자들도 같이 가자고 권유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병을 주신다.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준 헌신의 사람 마리아의 오라비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였다. 하지만 어떤 병이나 재앙이나 실패도 그 사랑을 지울 수 없고 무효로 돌릴 수 없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궂은일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신다면서 즉각 가시지 않고 지체하신 것이다.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린 듯 보일 정도다. 사람의 때였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기대와 어긋나더라도, 그 결과가 내 맘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때를 좇아 사는 삶은 결코 정체나 낭비가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유대로 가는 것이 제자들 눈에 죽음을 향해 가는 무모한 걸음이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아무도 예수님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와 함께하는 이들을 실족하게 할 수 없다. 지금은 빛인 예수님이 활동하실 대낮이니 어둠이 그 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 ‘잠’이 되게 하실 것이다. 당장에는 오라비를 잃은 큰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결코 영원한 슬픔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도리어 오라비의 죽음이 더 큰 기쁨과 더 큰 믿음을 안겨주는 축복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죽음을 ‘잠’이 되게 하실 수 있는 이 하나님께 구하지 못할 간구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 나를 엄습한 그 어떤 시련과 아픔이라도 그분의 손에서는 나를 위한 기쁨과 믿음을 빚으실 원자재가 될 것이다.
*나사로는 죽을병에 걸렸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하지만 죽을 병이 죽을병이 되지 못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것이기에 그 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병은 삶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 생에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결국 ‘생명’으로 끝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한다(1~3절).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었다고 호소한다. 비록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예수님이 지금도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일로 주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저울질하지 않는다. 나의 삶에 엄습한 시련의 이유를 항상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어떤 질병이나 상실이나 실패도 양을 위한 목자의 참사랑을 지울 수 없고 무위로 돌릴 수 없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도 사랑하셨다. 사랑하셨는데도 죽을병에 걸린 나사로를 고치러 가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셨기에 가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때에 이뤄진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진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에도 지체하신다(4~6절). 예수님은 응답의 ‘때’보다 이 병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영광)’에 주목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 사랑을 확신하며 기도했다면 주님의 침묵과 지체마저 사랑의 대답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사랑하는 성도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든 선을 이루고(롬 8:28),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이다.
*유대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만류했다(7~10절). 돌을 치려고 하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잘 봤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신다. 하지만 죽어야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 자신이 죽어야 나사로의 죽음이 잠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때를 따른 그분의 목숨을 건 순종이 우리를 살리셨다.
*제자들은 ‘배척의 땅’인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의 걸음이 나사로의 소생을 넘어 흑암 아래에 있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큰 행보임을 알지 못한다. 제자들이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세상의 배척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무지였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더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여 노력해야겠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 도리어 더 큰 기쁨과 더 큰 믿음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게 하신다(11~15절). 이것은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며, 영적 어둠과 사망 가운데서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실(구원) 것을 내다보게 한다.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처분과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 아니겠나!
*주님, 주님과의 동행이 가장 안전한 길임을 믿으면 빛인 주님과 늘 동행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자의 긴급함도 하나님의 때와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기 위한 걸음을 우선하신 주님의 걸음이 큰 울림이 됩니다. 말씀 사역자로 불러 주신 저의 걸음이 주님의 행보를 닮기에 한참 뒤처져있음을 봅니다. 더예수님처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