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부활이요 생명이니, 죽음이 아니라 잠이다 [요 11:17-27]
 – 2026년 03월 07일
– 2026년 03월 07일 –
요 11:17-27 부활이요 생명이니, 죽음이 아니라 잠이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신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믿는 자의 죽음은 잠시 자다가 깨는 ‘잠’과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르다의 고백은 그녀의 이해 수준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가족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신약에서 총 세 번 등장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섬기는 일에 분주한 마르다 이야기(눅 10:38~42)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두 번의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 있다(11:1~44; 12:1~8). 이 가족은 죽음과 부활을 직접 경험하거나 봄으로써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동참한다. 나사로는 직접 경험하였고, 마르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으며(11:27), 마리아는 향유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다(12:7).
    
    
    
1. 많은 유대인의 위문(17~19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사로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한다(17절). 나사로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거나, 죽은 것을 위장했다는 이견에 대한 확실한 반박이다. 유대인은 죽은 당일 시체를 무덤에 안치한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죽은 지 나흘 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장례와 관련하여 탈무드는 7일 동안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갖고 30일 동안은 가볍게 애도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조문하러 왔다는 것은, 나사로의 가족이 유대 사회에서 꽤 알려져 있으며,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19절). 이는 결과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무덤(메네메이온)’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된다. 나사로의 무덤 외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19~20장). 이를 배경으로 나사로와 예수님의 죽음을 연관하여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므로 그의 부활을 예표 하셨다. 그 외에 무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용례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키는 5:28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을 믿는 자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도 계시하신다.
    
    
    
2. 마르다의 하소연(20~22절)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오지만, 마리아는 집에 계속 앉아 있다(20절). 유대 관습에 따르면 장례에서 유족들은 집 안에 머물며 방문객들의 조문 인사를 받는다. 따라서 마리아는 전통적인 유대 장례식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집 밖으로 나온다. 이런 행동은 예수님을 특별하게 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오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들었어도 계속 집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한다(22절). 마치 나사로가 이미 죽었음에도, 당장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역사로 나사로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이는 얼핏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만을 믿는, 이어지는 마르다의 고백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24절). 또한 예수께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자, 마르다는 당장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39절). 하지만,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이는 꼭 지금 당장의 부활을 기대한다기보다는, 예수의 능력을 여전히 신뢰한다는 일반적인 신앙고백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은 가족을 잃었지만,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 같다.
    
    
    
3. 예수님의 계시(23~27절)
예수님이 나사로의 부활을 말씀하시자(23절),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로 이해한다(24절). 추측하기로 마르다는 종말론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관용구를 사용하셔서, 부활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표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술어가 없는 절대적 용법의 ‘나는 ~이다’ 말씀이다.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4:20),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6:20)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새 언약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내신다.
    
둘째, 술어가 분명한 ‘나는 ~이다’는 표현이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과 생명(11:25), 길과 진리와 생명(14:6), 포도나무(15:5)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술어가 나타나는 ‘나는 ~이다’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약 하나님의 정체성을 반향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겔 34:11~16; 사 40:11),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되신다(시 18:29). 결국,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나는 ~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으로 드러내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시던 역할을 이제 새 언약에서 아들 예수님이 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자기 계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구약에서 사람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제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셔서 마르다가 부활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하도록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신다(25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부활한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지금부터 영생을 누리기 때문이다(26절). 이러한 현재적 영생의 개념은 요한복음 종말론의 큰 특징 중 하나다. 부활이라는 내세의 개념이 현재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5:24).
    
이 단락은 마르다의 신앙고백으로 끝난다. 그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인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27절).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요한복음이 밝히는 예수님의 두 가지 정체성이 함께 나타난다(20:30~31절). 앞서 안드레도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한다(1:41; 4:29). 또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1:49). 이 두 고백이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 함께 나타난다. 이는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시편 118:26과 연결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메시아가 주의 이름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마 11:3; 요 12:13).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 바로 이러한 메시아의 구원에 관한 신앙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하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죽음의 현실이 뒤바뀔 수 없는 지금 어떤 말도 참되고 궁극적인 위로는 되지 못한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고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뿐이면,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었던 우리는 더욱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고전 15:16~19).
    
-마르다는 예수님을 즐거이 나가 마중할 만큼 사랑했고 그분께는 나사로를 충분히 살릴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도 믿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때에 ‘여기 계시지 않은’ 이유는 헤아리지 못했다. 참믿음은 그분의 능력뿐 아니라 내 기대와 예측을 뛰어넘는 그분의 지혜와 선한 섭리까지도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 계시지 않았지만 동시에 여기 계시면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원망 섞인 아쉬움을 토로하고 싶지 않은가? 내가 몰랐을 뿐 한순간도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굳게 신뢰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 죽은 자도 살리고 산 자도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니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다.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니다.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잠시 잠들 뿐이다. 이를 믿는다면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탄에게, 세상의 불의한 요구에, 더러운 이익에 내 생명을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무기인 사망을 그리스도께서 무력하게 하셨으니(고전 15:55~57),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도착하셨다. 아무도 죽음의 현실을 뒤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인간적인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오신 것이다. 완전한 죽음만이 완전한 부활을 가능하게 하고 부활의 능력을 전적으로 증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죽고 남은 자는 슬픔에 잠겨 있지만, 그 순간 예수님은 앞에 있을 ‘기쁨’을 미리 보고 계셨다(15절). 세상은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그저 낙담하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신뢰하라고, 믿음은 죽음마저 이긴다고 말씀하신다. 믿음만이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탄에게 굴복하는 대신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고, 죽음 같은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맛보게 할 것이다.
    
-당장의 고통과 실패, 한계와 무능, 실의와 슬픔에 빠진 채 원망섞인 아쉬움만 토로할 수 있다. 그럴 때 마르다처럼 내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해도 주님마저 무정한 분으로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르다는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이라고만 여겼다. 오늘 당장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한 병’은 고치실 수 있어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죽음을 이긴 부활은 교리가 아닌 현실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능하기만 한 사랑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랑이다. 내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나의 이해와 수용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에 눈감는, 기대 없는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완전한 죽음만이 부활의 능력을 전적으로 증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전히 죽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나의 방법, 나의 시간, 나의 자원을 모두 내려놓고 완전히 죽어야 하나님이 완전히 영광을 받으신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믿음은 죽음을 죽음되지 못 하게 하고 잠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의 부활에도 동참하게 된다. 주님에게 죽음이 잠이었듯, 믿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믿음이 날마다 담대하게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부활이 현재 경험되게 할 것이다. 그 믿음이 오늘 죽음 같은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맛보게 하실 것이다.
    
    
*유대로 다시 가자(17절)는 주님의 최종 목적지는 베다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골고다 십자가였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18절)’ 베다니의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께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17~19절). 요한복음에서 마지막 표적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생명으로, 애통을 기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이자 최후의 표적이다.
    
*마르다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20~21절) 토로는 불평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부재(不在)와 지체(遲滯)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다. 마르다는 가정(假定)을 통해 냉혹한 현실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은 이유(15절)’와 ‘죽음’을 통해 의도하신 더 깊은 뜻을 보지 못했다. 깊은 고통 때문에 그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도 얼마든지 마르다와 다를 바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25~27절). 어떤 시련이나 불행이든 그 가운데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또한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부르심에 순복하지 않고서는 사망과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주 안에서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듯 우리의 부활 또한 견고하고 확실한 약속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죽음 같은 현실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뒷걸음치지 않는 믿음을 구합니다.
*주님, 마르다 믿음의 한계가 저의 한계일 수도 있음을 알기에 더욱 겸손히 하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죽음이 잠이 되게 하심으로, 죽음이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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