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비통해 하시는 예수님, 그 와중에 자기 시선대로 바라보는 유대인들 [요 11:28-37]
 – 2026년 03월 08일
– 2026년 03월 08일 –
요 11:28-37 비통해하시는 예수님, 그 와중에 자기 시선대로 바라보는 유대인들
    
마르다가 돌아가서 마리아에게 예수가 오라는 명령을 전한다. 마리아가 뛰쳐나가자, 영문도 모르는 조문객들은 급히 뒤를 따라 동네 밖에 계신 예수를 만난다. 마리아도 마르다처럼 마음에 깊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예수는 나사로의 무덤 위치를 물으시고, 그들의 안내를 따라 무덤에 이른다. 예수는 나사로를 사망에 가둔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함께 따라간 유대인들은 예수의 우시는 모습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당시 장례 문화는 형편에 따라 방식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나사로의 경우처럼 사후 곧바로 염을 하고 무덤을 안장한다. 장례식은 전문적으로 피리 부는 자와 애곡하는 자를 고용하여 조문을 받으며 고인의 마지막을 정성껏 기린다.
    
    
    
1. 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님(28~31절)
예수님이 직접 마리아를 부르셨다는 기록은 없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통해,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28절). ‘가만히’라는 말은 다른 사람 몰래 비밀스럽게,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메시지를 전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만났던 곳에 계셨다(30절).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추측하기로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스스로 조심하셨는지, 아니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마르다의 시도는 실패했다. 많은 조문객이 마리아를 따라나섰다(31절). 그들은 마리아가 무덤에 곡하러 가는 줄 알고 그녀를 따라갔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이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마리아의 눈물(32~33절)
마리아도 예수님 앞에 와서 울고, 그를 따라오던 유대인들도 울었다(32절). 이에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33절). 예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33, 38절)’라는 표현은 번역의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헬라어 동사 “엠브리마오마이”는 원뜻이 ‘경고하다’ 혹은 ‘화내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온 두 번의 용례 외에, 세 번이 더 쓰였는데, 모두 ‘경고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마 9:30; 막 1:43; 14:5).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 학자들은 대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예수님이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화가 나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들의 부활 능력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셨다는 의미다. 이는 38절의 “엠브리마오마이” 용례에서 더 분명해지는데, 37절에서 예수님을 원망하는 듯한 유대인의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을 슬프게 만든 죄와 죽음의 권세에 대하여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 수도 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슬퍼한 것은 장례식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화를 내시기보다, 그들을 슬프게 한 죄와 죽음의 권세에 대해 분노하셨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영생의 현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셨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을 근원적으로 그렇게 만든 죽음의 권세에 대해서 분노하셨을 수도 있다. ‘불쌍히 여기사(33절)’에는 헬라어 동사 “타라쏘”가 쓰였는데, 재귀대명사가 목적어로 쓰여, 문자적인 뜻은 ‘그 자신을 괴롭히다’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히 괴로우셨다. 한편으로 분노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괴로울 정도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이 된다.
    
    
    
3. 예수님의 눈물(34~37절)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표현이 나온다(35절). 예수님의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표현이 약 세 번 정도 기록되어 있다(눅 19:41; 요 11:35; 히 5:7).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세 번만 우셨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세상에 계실 때 예수께서 우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세 번 정도 언급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다시 말하면 그 성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우셨다(눅 19:41~42). 그들이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셨다고 언급한다(히 5:7). 이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죄와 사망 때문에 하나님과의 분리를 두려워하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이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그 또한 눈물을 보이신다(35절). 예수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슬퍼할 때,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다음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였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으리라 추측한다(36절). 물론 유대인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의 일관된 진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3, 5절).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친구 나사로의 고통을 슬퍼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지인의 사망으로 슬퍼하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33절), 눈물을 흘리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사로는 곧 부활할 것인데, 예수께서 과연 나사로와 그 친지들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예수님의 치유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다(막 7:34). 치유와 회복의 때가 임박했을지라도 사람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안타까워하며 우셨을 거로 추측한다. 자신과 그토록 가까운 마리아가 영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구약과 그렇게 가까운 유대인들이 메시아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자, 매우 안타까우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을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33절에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고 나온다. ‘비통히 여기셨다’라는 헬라어 동사 ‘엠브리마오마이’가 분노의 뜻을 함축한다고 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인 무지에 대해서 화가 나실 정도로 답답해하셨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다’를 가리키는 헬라어 ‘타라쏘’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암시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감정 표현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적 무지에 대해 얼마나 답답해하셨는지를 보여준다.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슬퍼하셨다. 이 슬픔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과 일맥상통한다(눅 19:41~42; 막 8:12).
    
또 한편,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는 주장도 있다. 나사로의 죽음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지하게 하고, 그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엄청난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볼 수도 있다(12:27). 실제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표적의 역할을 한다(47절). 이런 주장은 히브리서 5:7에 나오는 예수님의 눈물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어느 하나에 제한하기보다는 친구의 고통에 대한 슬픔, 백성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이별에 대한 고뇌 등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마르다에게 부활이요 생명임을 일깨워주신 예수님이 이젠 마리아를 불러 위로하신다. 조문객들은 그녀가 무덤으로 곡하러 가는 줄 알았지만, 마리아는 지금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할 수 없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인생은 무덤을 향해 곡하러 달려가는가, 생명의 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예수님이 상가가 있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마리아를 애곡하는 무리 가운데서 불러내어 위로하신 것은 다른 조문객들처럼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주 앞에 급히 나아왔다. 절망 중에 우리가 찾아야 할 곳, 엎드려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목자이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며 그때 절망은 소망으로 바뀔 것이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현장에서 위로의 주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오라비의 죽음의 슬픔 속에서도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죽음이 가져온 이별은 쓰라리고 잔인하다. 죽음이 주는 절망과 슬픔의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알고 있다면 생명의 주님께서 열어주실 부활의 소망은 그만큼 간절해질 것이다.
    
*생명의 주님과 함께 있음에도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창조의 주님이시기에 슬픔을 공감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그 앞에서 울기만 하면 안 된다. 울기만 하지 말고 생명의 주님께 맡기라. 더욱 의지하여야 한다. 살아나게 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물음을 보시고 또 무덤에서 자신도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쏟으신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나 혹은 자기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슬픔의 원인인 사망이 다스리는 현실을 향한 슬픔이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사 53:4) 메시아의 눈물이고 분노다.
    
-예수님의 눈물을 본 유대인들은 그것을 나사로를 향한 사랑으로 보기도 했고, 속히 와서 살려주지 않은 것을 거론하면서 그 사랑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해주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내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면서 더 큰 경이와 기쁨의 자리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도 마르다처럼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죽음의 현실 앞에 굴복하고 만다. 눈앞의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죽음 앞에 무릎 꿇는 것이고 더 참담한 것은 죽음 앞에서 주님을 무기력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죽음을 슬퍼해야 하지만 다시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슬퍼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의 눈물을 지켜본 사람들 속에 그 눈물을 나사로를 향한 사랑으로 본 시선과 그 사랑을 의심하는 시선이 교차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는 눈먼 자는 고쳐도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는 불신과 사랑하는 자를 죽게 내버려둔 상황에서 그 사랑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스며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하기에 지체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몰랐다. 나사로의 죽음을 기쁨이 되게 하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 나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로 보건대 문제는 늘 우리의 시선이고 해석이다. 믿을 수 없는 역사가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바램 만으로 주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나사로가 살아 있을 때 병을 고치지 않으셨는지 아쉬워하고 있다. 
    
*이들은 주님을 자기 편견대로 바라보았다. 주님이 이제껏 행하셨던 기적과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고, 경험도 했겠지만” 결국 주님이 깨우쳐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이해한 대로 바라본다. 맹인을 치유해 주신 분이신데, 좀 더 일찍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오셔서 고쳐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지 이런 아쉬움의 마음뿐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생명에 대한 기대는 아예 없다. 당연하다. 그들은 아직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신 주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경험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 자기들 생각의 편견에 갇힌 그들에게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새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 이셨고, 계획 이셨다. 주님은 온전히 그 길을 순종하며 나아가셨다. 사람들이 이해 못 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걸음은 이런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을 헤치고 나아가셔야 할 길이었다.
    
*주님이 공감해 주심이 위로된다. 하나님이신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셨고, 희로애락을 경험하셨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생의 쓰라린 마음을 잘 아셨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리신다.
    
*요즘 공감 없는 사람, 슬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난다. 자기 욕심에 빠져 이웃의 고통을 이해조차 못 한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의 불감과 불통은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맞나 싶기도 하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정되어 점점 그 차이가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주님의 공감과 슬픔이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은 아시고 함께 공감해 주시는 것 자체가 위로된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주님, 죽음을 직면하는 아픔을 알아주시는 그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비통해하시며 불쌍히 여겨 주시는 주님의 긍휼도 감사가 됩니다. 슬픔을 당한 이웃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늘 본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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