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8-46]
 – 2026년 03월 09일
– 2026년 03월 09일 –
요 11:38-46 나사로야 나오라
    
마리아와 일행이 예수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안내한다. 슬픔과 비통을 다시 한번 내비치며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신다. 마르다는 죽은 지 벌써 나흘이 되었고 부패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예수가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돌문을 옮긴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와 앞에 선다.
    
예수님은 앞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제 본 단락에서 실제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증명하신다.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이 커지며, 예수님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1. 예수님의 명령(38~40절)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와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신다(39절).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덤은 동굴을 판 것이나, 때로는 자연 동굴이었다. 유가족들은 사람이 죽은 날, 그 시신을 동굴에 옮겨 놓고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았다. 예수님이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이유는 이 놀라운 기적을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 이루려 하신 것 같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그러나 인간의 순종으로 더 온전하게 하시려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좀저 생생한 부활의 체험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돌을 옮기는 순간 부패가 시작된 시체의 냄새가 코를 찔렀을 수 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것을 확실히 보게 하기 위해서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이 17절에 이어 다시 언급된다(29절). 그만큼 나사로 죽음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마르다는 만류한다. 이는 앞서 믿음을 고백했던 27절과 대조를 이룬다. 삶의 고백을 따라가지 못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믿음의 고백과 행실이 늘 일치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만류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 말씀하신다(40절).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그가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한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위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를 통해 우리가 부활,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인클루지오를 형성한다(4, 40절).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요한복음 전체도 ‘영광’으로 시작하여, ‘영광’으로 끝맺는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1:14)’에서 베드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21:19).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의 제자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암시한다.
    
    
    
2. 예수님의 살리심(41~44절)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감사 기도를 먼저 하시며(41절), 그가 기도하시는 목적도 말씀하신다(42절).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42a절).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고,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 생각나게 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항상 들으심을 얻는데, 이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이다(14:13). 따라서 나사로를 일으키는 기도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기도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다(42b 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일으키신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기도를 통해 드러내시며 그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이다(40절).
    
요약하자면,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전에 행한 예수님의 기도는 먼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인다. 또한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인지를 보여준다.
    
44절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얼굴을 싸던 ‘수건(수다리온)’은 예수님의 무덤에 남겨진 수건(20:7)을 연상하게 한다.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 죽음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곧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준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불멸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살리심에 대한 반응들(45~46절)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을 본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표적을 보고, 믿은 유대인들이 많았다(45절).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을 때로는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묘사하시기도 하지만, 표적은 결국 믿음을 위한 것이다.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표적을 보는 사람들이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2:11). 왕의 신하도 자기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그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4:53).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단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바리새인들에게 보고했다(46절). 물론 이 보고는 예수님의 표적을 긍정적으로, 의도로 전달한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보고는 부정적 보고일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많은 유대인이 믿었으나, 다른 한편, 부정적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도 있었다는 말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놀라운 표적을 직접 보고 경험했지만, 그들은 참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예들이 나와 있다. 또한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참믿음이 없는 거짓 믿음의 예도 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다(2:7~9).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언급은 없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고침 받은 병자의 이후 반응도 부정적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꼬투리 삼아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다. 9장에서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다음에,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도 마찬가지다. 제일 처음에는 안식일 문제로 트집을 잡더니, 이윽고 기적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표적을 믿지 않으려고 유대인들은 그가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 그의 부모를 불러 조사한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시하는 사람들까지 소개한다.
    
또한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믿음이 없는 거짓 신자들도 언급한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유대인들의 믿음은 참믿음이 아니었다(2:23~25). 오병이어 기적 이후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곧 실망하여 예수님을 떠났다(6:66).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이 영생에 관해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했다. 그들은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거짓 신자였다(8:30~31).
    
    
    
나는?
-조문객들처럼 마리아도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기 전에 도착하지 않으신 것을 아쉬워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마리아도 무덤을 가로막은 돌만큼이나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죽음일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상기시키신다. 자기 경험, 신학, 지식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축소하는 이런 잘못을 우리도 반복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무덤 앞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냄새까지 나는데 이미 늦었다고 만류한다. 앞서 오라비가 살아나리라는 말씀에 다시 살리실 줄 믿는다고 했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마르다가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는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 잘못된 지식과 믿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지식과 믿음도 아니다. 마르다만의 문제인가, 우리도 예수님을 내 수준으로 이해하는 데 그친 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라고 탄식하신다.
    
-돌을 옮겨 놓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 공개적으로 기도하신 것은 둘러선 무리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알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다. 그리고 기대하신 기쁨이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나온다. 이를 통해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명해 보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거친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던 주님의 음성이 죽음을 꾸짖어 생명을 깨운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불러내듯이 나사로는 자기 목숨까지 바쳐 양들을 살리실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 밖으로 나왔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리라(5:25)”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라 “던 말씀을 성취하셨다. 자신의 매임과 죽음을 통해 우리의 매임과 죽음이 영원하지 않게 하셨다. 이 사랑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 양분되었다. 믿는 자가 있고, 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겨 밀고하는 자가 있었다. 이 표적을 통해 빛과 생명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이해에 미칠 영향에만 민감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11:15)을 통해 믿는 자들이 생겼다.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백한 증거와 많은 증인이 있는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 믿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자신의 전부를 새로운 진리 앞에서 바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진리는 아무리 증거가 많아도 진리일 수 없고 진리여서도 안 된다. 나에게 복음은 내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만큼 나를 살리는 사건인가, 아니면 내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건인가?
 
*”냄새가 납니다”는 마르다의 말은 인간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녀는 부활이 미래의 일(24절)로 믿고 있었지만, 지금 일어날 일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주님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지 가늠하게 한다. 믿음은 현재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 신뢰다.
 
*적어도 제자들은 이렇게 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이미 경험했었다. 마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막 5:35~43)을 통해 나사로와 비슷한 ‘시간의 지체’를 통해 이미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늦었고’, ‘냄새가 난다’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었다.
 
*우리의 삶의 도전 앞에 습관처럼 되뇌이는 구태의연한 말이나, 현실의 벽이라는 인식들이 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실의 한계앞에 주님은 ‘돌을 치우라’고 하신다. 교회의 견고한 관행, 낡은 사고방식 등을 치우고 성령의 새로운 역사에 편승하라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린다. 일상의 “무력함”과 같은 냄새가 맡아질 때, “돌을 치우라”는 주님의 음성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주님의 선언이 곧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 마리아의 아쉬운 반응도 이해가 갑니다. 그만큼 주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이 크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럼에도 이를 통해 나의 기대와 소망, 나의 때에 맞춰진 주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주님의 때와 섭리를 신뢰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제 마음을 채워가겠습니다.
*주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보고도 자기 이해타산만 생각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악한 마음에 오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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