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47-57 산헤드린 공회의 교만과 오판
바리새인들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산헤드린 공회에 알리자, 공회원들이 긴급 소집된다.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안건이 상정되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지령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공회는 그 뜻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분위기를 감지한 예수가 베다니에서 에브라임으로 은밀하게 옮기신다. 유월절이 가까이 오고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이미 예수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다.
예수님의 표적을 알고 있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특히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 한 사람을 죽여서 민족 전체가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제사장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한 것으로, 그가 어린 양 속죄의 제물로 죽으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 공회원들의 반응(47~48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한다. ‘공회(쉬네드리온)’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일컫는다. 산헤드린은 당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유대의 종교적, 행정적 문제를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였다. 지방에도 약 23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단위의 산헤드린이 있었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71인의 회원(주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으로 구성된 최고 의결 산헤드린이 있었고, 그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다. 마태복음 5:22; 10:17은 지방 산헤드린을 일컫는 듯하고, 요한복음이 말하는 ‘공회(47절)’는 예루살렘 최고 의결 산헤드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산헤드린 안에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예수님을 처리하는 데에는 뜻을 같이하였다.
요한복음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나온다(7:32, 45; 18:3). 이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들’ 때문에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만이 이들에게 유일한 위협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걱정하고, 로마인들이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을 걱정한다(48절). ‘땅(토포스)’은 빈번하게 성전을 언급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4:20; 14:2~3). 그러나 산헤드린에 모인 성전 권력자들은 진정한 성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성전 정화 사건’을 언급한다(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여 유대 권력자들로부터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적대적인 생각이 폭발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한다(11:53). 물론 이전에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라 하여 죽이려 하였다(7:1, 19, 20; 8:37, 40, 59; 10:31).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이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심지어 그 위세에 로마인들까지 경계하여 다시 쳐들어오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공회 차원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계략을 본격적으로 꾸미게 된 것이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술의 차이는 저자의 저작 의도와 관련 있다. 공관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을 내러티브의 절정에 둠으로써 불충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내러티브의 절정에 위치시킨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표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핵심 표적이 된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미리 짐작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위대한 표적은 이를 알아보지 못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단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사건의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이들의 모략은 오히려 예수님의 원래 의도했던 십자가 사역을 성취하는 견인차가 된다.
2. 대제사장 가야바의 반응(49~53절)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언한다(49~50절).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을 것이라 한다. 예수님과 하나 됨의 모티프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문만큼 ‘하나 됨’이 예수님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곳은 없다. 구약에서부터 유대인들은 성전 제사를 통해 하나 됨을 지켰다(수 22:10~34). 이때 대제사장은 이 모든 예식을 지휘하고 주관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 되는 제사를 주관해야 할 대제사장 가야바는 아이러니하게 예수님이 그 하나로 만드는 사역을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진정한 성전이요 대제사장인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 된다는 것을 예언한다.
3. 유월절 순례자들의 반응들(54~57절)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한 ‘에브라임(54절)’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락에서 ‘유월절’이 요한복음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다(55절, 2:13, 23; 6:4).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3년째 되는 해였을 것이다.
유월절 전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성결케 할 필요가 있었다(레 7:21; 민 9:6; 대하 30:17~18). 보통 유월절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루살렘에 온 유대 순례자들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다(56절).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권력자들의 위협 속에 예수님이 과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지 궁금해하고 있었다(56~57절). 유대 권력자들과 달리, 이들이 적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찾았던 것 같다. 물론 이 호기심은 믿음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을 성결케 하실 수 있는 분을 알지 못했고, 믿지 않았다. 유월절을 완성하시는 분이 오셨는데, 옛 언약의 방식대로 유월절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보고서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나다나엘처럼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찾아가 경배하는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회는 이 예수님이 미칠 영적인 영향이 아닌, 세속적인 파장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진동과 전복, 변화와 갱신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견고한 지위와 혜택이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 아닌 자에만 관심이 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의 의미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고 다만 권력자와 민족에게 미칠 실익만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는 그들의 계산이 맞을 리 없다. 지금도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인생의 주인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탐욕스러운 계획을 예수님은 대제사장에 의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다. 그래서 자기 죽음으로 민족 전체를 망하지 않게 하시고(12:24) 흩어진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써(10:15~16) 대제사장의 말을 (다른 의미에서) 성취하셨다. 악이 승승장구할 때도 하나님의 의와 뜻은 조금도 어김없이 성취되고 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공회(47~53절)와 공회의 명령으로 예수님의 출현을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초조하고 급한 풍경(55~57절) 사이에 빈 들(광야) 가까운 곳 에브라임에 제자들과 머물러 계시는 예수님의 차분한 행보(54절)가 대조를 이루며 등장한다. 세상이 아무리 숨 가쁘게 돌아가고 교묘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다 해도 주님은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서 순종의 삶을 사셨다.
*나사로가 부활했다는 엄청난 보고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는 영적인 영향보다 정치적인 파장을 우려하며 정책을 제거하려고 모의한다. 대제사장도 민족적 명분과 실리를 내세워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이 ‘도모’를 얼마나 원하시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로마와 백성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성공적으로 자기 탐욕을 채울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믿고 의지해야 할 일이요, 멸망이 아니라 생명을, 로마의 속박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주는 일임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도 수없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주님의 크고 작은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면서도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내 관심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회개가 아닌 아무도 모를 합당한 이유를 지어내며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언제든 주님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위태로운 일이다.
*주님, 저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늘 잊지 않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줄 믿습니다.
*주님, 자기 유익과 기득권 구조의 유지를 위해 온 세상 구원의 역사를 거절하는 철저한 이기주의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이기주의에 언제든 저도 붙들릴 수 있음을 알기에 그저 오늘 하루만이라도 성령에 매인 바 되기를 구합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