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입성 [요 12:12-19]
 – 2026년 03월 12일
– 2026년 03월 12일 –
요 12:12-19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백성들의 환호를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는 위대한 왕이시지만 동시에 겸손히 십자가를 지시는 평화의 왕이시다. 고난을 통해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영광스러운 왕이시다. 나사로의 부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경계하게 된다.
    
    
    
1. 이스라엘 왕으로 찬양받으시는 예수님(12~13절)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온 무리가 예수님을 환대하며 열광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가 모두 증언하는 내용이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며, 소리를 지르면서 열광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 나귀를 구한 것을 상세히 설명한다. 아마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들을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설명하려 한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은 이 과정을 생략한다. 단지 예수님이 나귀를 찾아서 타셨다고만 기록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스가랴의 예언과 연결하는 것은 마태와 요한이다. 또한 요한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를 환대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이 언급을 생략하고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겉옷을 나귀 위와 길 위에 폈다고 한다.
    
요한복음이 스가랴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굳이 종려나무 가지를 왜 언급했을까? 먼저 ‘종려나무 가지'(13절)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승리의 왕,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해서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한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승리하는 왕이시라는 것을 상징한다. 물론 백성들의 환호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환호는 더 깊은 구속사적 의의를 담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사탄을 이기시는 하나님 나라 왕이시기 때문이다.
    
‘호산나(13절)’는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시편 118:25에서 왔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시편 118:26에서 인용한 것인데,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이신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담아 외치고 있다. 앞서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호칭했고(1:49), 오병이어 기적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6:15).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하셨으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십자가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 어린 나귀를 타시는 예수님(14~16절)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는 이유는 스가랴 9:9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시온의 딸(15절)’은 예루살렘 주민을 일컫는 말이다. 왕과 나귀 새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왕은 용맹스러운 전투마나 화려한 마차를 탈 것으로 기대되지만, 나귀 새끼를 타신다. 스가랴 9:9은 그 이유를 메시아의 겸손함에서 찾는다. 이렇게 겸손한 왕은 오셔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주신다(슥 9:10). 이러한 메시아의 겸손함과 평화 주심은 요한복음에서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다(13:1~20; 14:27).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이 일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16절)’에 예수님의 행동과 구약 예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표현은 이미 2:22에도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 당시에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 후에 성령의 조명을 통해 예수님의 계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한편, 사복음서 중에 스가랴서의 예언을 인용한 것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뿐이다. 두 복음서의 인용에는 차이가 있는데, 마태는 나귀에 대한 묘사를 강조하지만, 요한은 마태복음에 없는 ‘두려워하지 말라’를 언급한다. 이 표현은 스가랴 9:9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추측하기로 스가랴 9:9의 “크게 기뻐할지어다”가 “두려워하지 말라”로 표현된 것으로 본다. 두려움은 요한복음에서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적대적인 요소다 유대의 관리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했다(12:42).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6:19).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숨어서 지냈다(20:19). 그러나 예수님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6:20; 14:27). 그리고 그들에게 평화를 주려 하신다(20:19).
    
스가랴서 본문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이 오셔서 하시는 핵심 사역으로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슥 9:10). 그런데 이러한 사역은 언약의 피로 말미암는다. 언약의 피를 통해 갇힌 자들이 놓임을 얻게 된다(슥 9:11).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1:29; 8:31~32). 하나님 아들, 메시아로서 그를 믿는 자에게 참된 평화를 주신다.
    
    
    
3. 표적으로 인해 찬양 받으시는 예수님(17~19절)
예수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많은 무리를 열광케 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메시아가 이루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18절)이 가리키는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표적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관점에 따라 예수님을 판단하고 환영하였다. 표적이 가리키는 고난은 보지 않고 영광만을 바라보았다. 복음의 온전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통해,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셨다. 그러나 무리는 메시아의 영광만을 바라보았다.
    
    
    
나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에 큰 무리가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을 연호하며 환영한다. 아마 갈릴리에서부터 그의 행적을 보고 명성을 들었던 자들일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잡으려고 기다리거나 죽이려고 모의하던 이들을 낙심시킨 만큼(19절) 열렬한 환영이었다. 하지만 예수를 잘못 보았다. 그들이 보고 기대한 것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지도자였지, 참 생명을 위해 돌아가실 메시아는 아니었다.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파상적인 이해와 자기 유익만을 앞세운 열정은 십자가 앞에서 다 꼬리를 감추고 말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만 숭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제한이 없지만, 온 인류를 죄악에서 건지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음을 잊으면 안 된다. 힘으로 쟁취하는 나라는 힘에 의해 망한다. 사랑으로 얻은 나라는 사랑 안에 영원하다. 혹시 나도 주님을 향해 내 인생의 반전, 대박을 열망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흔들어야 할 종려나무 가지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기보다 순간순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위한 흔듦이어야 하겠다.
    
-백성들은 로마 대신에 자신들 위에 군림해 줄 왕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백성들을 섬길 겸허한 왕으로 오셨다.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그릇된 비전에 도전하고 환상을 깨는 모습으로 오셨다. 제자들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예수께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예수님을 향한 오늘의 내 지식에 만족하지도 낙심하지도 말고, 늘 겸허히 열린 마음으로 성령님의 조명을 의뢰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많은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는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듯하다. 이 땅에서 강력한 힘의 지도자를 추구하고 왜곡된 통치 방식이라도 경제만 잘 이끌어준다면야 하면서 머뭇거리지 않고 막무가내가 된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어떠해서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심을 분별하지 못하면, 교회는 언제든지 사회를 향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핑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의 교회 중에 일부는 이미 이런 행동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깨닫게 된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통치 방식이 아닌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공의와 구원, 겸손과 온유함으로 살아내어 “사랑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도 예수님처럼 겸손과 온유함으로 주님의 공의와 구원을 삶으로 드러내며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무리의 열렬한 환호를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던 자신들의 음모가 쓸데없는 일이 되었다고 낙심한다. 물론 거품이 잔뜩 낀 환호인 것은 몰랐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아니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정말 자신들이 한 일이 쓸데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어서 진정 쓸데없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 더 많은 무리들로 불어나 주님을 환영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새번역_19절)” 증언의 힘이 이토록 강력하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출교 포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언하였다. 이 증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각지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환영 인파에 속속 합류했다(17~18절).
    
-전통과 제도에 익숙하여 사망의 모의를 따르던 이들이 속속 생명과 빛 되신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으며 주님에게로 돌아선다. 내가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선택할 것인지 분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탄한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을 따라간다.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생명을 따라간다. 나와 공동체가 생명의 말씀에 귀가 열려 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도 힘, 능력, 성공, 인정, 평판…. 이런 말 참 좋아했다. 많이 갈급하기도 했다. 되돌아보니 주님은 내가 주님을 향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열렬히 흔들며 따라올 때 늘 “어린 나귀”에 앉아 계셨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겸손과 온유함을 보여주셨다. 사랑으로 대답해 주셨다. 그런데 나는 늘 종려나무 가지만 흔들어 댔다. 어리석었다.
    
*여전히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기도의 종려나무, 헌신의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며 따르는 이들이 여전하다. 그런 교회들이 여전하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아야겠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셨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기 욕망을 갈급해도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셨다. 말씀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시기 위해 늠름한 백마가 아니라 연약하고 어리숙한 어린 나귀를 타셨다….
    
*나도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힘, 성공, 명예)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꿋꿋하게 말씀을 알아가야지,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말씀대로 지켜야지…. 그래야지….
 
    
    
*주님, 주님처럼 섬기기 위해 말씀대로 말씀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이 나라의 지도자가 힘을 숭배하기보다 섬김의 의미를 잘 아는 지도자가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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