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보고도 믿지 못하는, 믿으나 두려워하는 사람들 [요 12:34-43]
 – 2026년 03월 14일
– 2026년 03월 14일 –

요 12:34-43 보고도 믿지 못하는, 믿으나 두려워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불신은 그들의 잘못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낸다.

 

1. 빛을 믿으라(34~36절)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율법은 어디를 말하는가?(34절).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봐야 하는데, 이사야 9:6이나 시편 110:4는 메시아의 영원성에 대해 언급한다. 무리는 이러한 율법의 언급과 인자의 들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인자가 누구인지 질문한다(34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예수님은 ‘아직 빛이 너희 중에 있다’고 말씀하신다(35절). ‘빛’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사역 혹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락은 인자의 죽음과 인자의 계시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자는 들림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런데 인자는 또한 세상의 빛으로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 예수님의 계시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빛의 아들이 되고, 어둠에 잡히지 않는다(35b~36절). 여기서 ‘어둠’이라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죄와 무지,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을 종합하는 말이다(1:4~9; 3:19~21; 8:12). 따라서 어둠에 다니는 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며, 죄 가운데 행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길로 가지 말고, 빛을 믿고, 빛의 길로 가라 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예수께서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35절)’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그의 죽음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의 임박성과 함께, 복음을 들을 때 즉시 믿음으로 반응하라는 촉구다.

 

2. 표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37~4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요한은 두 개의 이사야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불신을 설명한다. 먼저 이사야 53:1을 인용하여, 고난받는 종에 대한 사람들의 거절이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는 일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임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능히 믿지 못했다(38~39절). 37절에서는 믿지 않은 사람들의 행위가 강조되었고, 38~39절에서는 사람들의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40절에서 이사야 6:10의 인용을 통해 더 강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들이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게 하신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마음은 더 완악해져서, 회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선지자의 선포는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며, 동시에 심판에 이르도록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지 못하게 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과 주권의 메시지가 잘 녹아 있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한다.

41절에서 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이사야가 본 영광(사 6:1, 3, 5)은 여호와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이 곧 예수님의 영광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함께 나타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 안에서 아들을 보는 것이고,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시로 그와 아버지의 친밀한 연합을 표현하신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놀라셨다(14:9). 왜냐하면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신다(14:10).

 

3. 표적을 믿으나, 두려워하는 사람들(42~43절)
유대인 관리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42절). 원문에는 ‘두려워하다’라는 표현이 없다. 다만 출교를 당하지 않기 위해, 바리새인들 때문에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유대 관리자들이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편, 출교를 두려워하는 유대 관리자들의 모습은 9:22에 나오는 맹인의 부모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다(42절).

요한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다고 한다(43절). 그렇다면 이것은 참 믿음인가, 아니면 거짓 믿음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거짓 믿음으로 본다. 왜냐하면 다른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을 사랑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의해 책망을 받기 때문이다(3:19; 5:44).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일종의 변덕스러운 믿음이다. 애매모호하다. 그 자체로는 참 믿음인지, 거짓 믿음인지 구분할 수 없다. 결국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용기 있게 고백하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의 제자 됨을 알 수 있다(19:38).

 

나는?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지만, 유대인이 기대한 대로 인간적인 왕국을 세워서 영원히 다스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가 오면 더 이상 빛이신 예수님을 육신으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기회는 지금이다. 지금이 세상적인 자신들의 메시아 기대를 버리고 빛이신 주님의 나라로 들어올 때다. 지금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어둠이 덮쳐 그들을 영원히 사로잡을 것이다. 주의 말씀을 내 인생길의 등불로 삼고 있는 동안만 빛의 자녀다.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빛이 비쳤을 때 빛과 그림자를 모두 만들듯이, 이런 불신은 예상 밖의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였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처럼,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강한 팔의 권능을 보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도 믿지 않았다. 그의 예언처럼, 표적을 볼수록 돌아오라는 호소를 들을수록 더욱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완고해지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고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고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는 것에 더 격렬하게 저항하고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는 것이다. 말씀이 내 마음을 쪼개고 양심을 아프게 할 때는 소망이 있다. 혹시 변하지 않는 내 모습이 화가 날 정도로 밉다면 나는 돌아오고 있는 중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사회적인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관리들이 있었다. 그것은 비둘기 같아 지저분한 신중함(박해 지역의 은밀한 그리스도인들처럼)과는 달리,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히 여긴 데서 나온 결정이었다. 잠시뿐인 사람의 칭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 주시는 축복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그대로다.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믿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믿어서 잃을 것만 생각했다. 출교를 당할까 두려웠고, 신앙의 자유보다 익숙한 구조에 머물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구했다. 하나님이 주실 영광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렇게 있다가 사라질 영광을 위해 영원한 영광을 버린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도(36절) 유대인들은 어둠에 사로잡힌 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수많은 표적과 말씀을 듣고 봤음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참 빛을 외면하고 거부했다(37~41절).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예수님은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데도 그들은 자신의 신앙조차 분명히 고백하지 못했다. 주님을 저버리고 세상의 영광을 버리지 못한 채, 위태로워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숨은 그리스도인으로 처신했다. 성도로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처신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 알고 있는 지식만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을 깨우쳐 주심으로 역사하는 은혜를 누릴 수 없다. 결국 이런 신앙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우상숭배에 취하게 한다.

*결국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역사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성경에 예언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만도 아니다. 자가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보려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일방적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다.

*주님이 계실 때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날의 빛은 말씀이신 주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단연코 “말씀”이다. 말씀이 이끌어가고 말씀이 결정짓도록 빛 되신 말씀안에 더욱 순종해야 한다.

*빛 되신 주님, 진리 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결단과 모험이 없다면 빛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말보다 주님의 말을 더욱 진실하게 신뢰해야 한다. 빛 되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지…

 

*주님, 말씀을 외면하지 않고, 순종을 통해 참된 지식과 교제, 영생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혹시 세상 속에서 숨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당당히 드러나는 빛된 존재로 서겠습니다.
*주님, 빛 가운데 거하겠습니다. 사랑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안에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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