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16-24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무지한 제자들의 모습과 이를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자상한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예수님이 먼저 자신의 떠남을 말씀하시자(13:31~35), 베드로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13:36~38).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시자(14:4), 도마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14:5).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시고(14:6~7), 빌립은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14:8).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언급하시지만(14:9~21), 가롯이 아닌 유다는 그의 언급을 이해하지 못한다(14:22).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무지한 제자들에게 다시금 자신의 예정에 대해 말씀하신다(16:19~28).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복된 근심과 기쁨을 말씀하시며 계속 그들을 격려하신다. 주님께서 떠나시겠다고 하자 제자들의 근심과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제자들의 근심은 곧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일어나게 될 변화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1. 조금 있으면… 또 조금 있으면(16절)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새번역_16절).”
15장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도중에 포도나무 밭을 지나며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조금 있으면”이란 앞으로 3~4일 동안 일어나게 될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과 제자들을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제자들은 근심에 휩싸였다. 그리고 실제로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주님을 붙잡아 갈 때 제자들은 하나같이 두려움과 근심으로 모두 흩어져 도망친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주님을 바라보다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모진 채찍질과 십자가의 고통 끝에 운명하신다. 하지만 3일 후에 부활하신다.
“조금 후에”는 붙잡히심, 고난당하심,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키지만, “또 조금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때를 가리킨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은 제자들에게 큰 고난을 가져오지만, 이것은 잠시일 뿐, 주님은 곧 부활하시고 근심과 슬픔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만나 주실 것이다. 그때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칠 것이다.
*주님을 구원주로 믿는 나에게도 이와 같은 “조금 후에”의 복음은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믿는다. 주님을 믿기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잠시의 고난이 있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것을 보증하고 약속하는 실제적인 사건이 바로 “부활”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날 근심과 걱정 중에서 회복될 기쁨의 부활을 믿는다.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나의 영혼도 주님을 이어 부활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부활 신앙은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는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다. 신비다!
2. 근심이 기쁨으로(20절)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16절)을 이해할 수 없었다(17-18절). “무슨 말씀이냐?”를 반복하며 어려워한다. 당황스러움과 근심(슬픔)이 역력하다. 지금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제자들은 서로 대화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찾고자 했다(19절).
주님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여인의 해산할 때를 비유로 말씀하시며(21절) 지금은 근심(슬퍼)하겠지만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하신다(20, 22절). 주님께서는 “지금은 근심이거니와,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볼 때는 기쁨”이 될 것이고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22절)이라 하신다. 이것이 너무도 확실하여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23절 상).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근심(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 때문에 더 깊은 한숨이 나오고, 고통이 일어날 수도 있다. 특히 세상의 적대는 늘 있을 것도 알아야 한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와 개선의 입성이었다. 로마에 맞서 해방을 시작할 출정식이었다. 변방 갈릴리에서의 삶이 예루살렘 중심지로의 삶의 시작이었다. 제자들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입성이었다. 세상 지도자들의 적대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이렇게 해야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완성이 되고 구원이 완성이 된다. 제자들은 한껏 높아짐의 기대였지만, 주님은 한없이 낮아지심, 죽음까지 떨어지시는 여정이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이 미워할 것을 말씀하시고, 고난, 박해가 뒤따를 것을 알려 주셨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신다. 가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는 하지만, 고난, 박해, 죽음 등 세상의 적대감을 말씀해 주시는 주님 앞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께서는 당황해 하고 근심하며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 묻고 싶겠지만 그날에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주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하심은 확실하다!
3. 기쁨이 넘치도록(23-24절)
주님은 지금의 근심이 조금 후면 기쁨이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진실로 진실로(진정으로 진정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23절).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또는 ‘요구하지’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새번역_23-24절).”
근심이 기쁨이 되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주실 것이다. 주님은 매우 간절하게 부탁하셨다.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늘 함께하여 주셔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직접 가르쳐 주셨고, 보여 주셨고, 이뤄 주시며, 인도해 주셨지만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여야 한다.”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신 성령께서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처럼 반응해 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 함께 계실 때처럼 제자들의 기도를 아버지께 전달하여 응답되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은 기도 응답의 기쁨이 넘치게 될 때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여야 근심과 고통, 세상의 적대 속에서 응답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조금 후에” 누리는 기쁨은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누리는 기쁨이고, 더 이상 근심하고 염려하여 서로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확신에서 오는 기쁨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받는 기쁨도 약속하셨다.
*주님의 부활의 기쁨은 근심과 슬픔, 세상의 적대 속에서 막 모르고 주어졌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은 세상의 적대함을 충분히 이기는 기쁨을 가져왔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주님의 돌보심을 늘 확인하는 기쁨이 넘칠 것을 약속하셨다.
*기도는 주님과 함께함을, 주님께서 근심이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을 “넘치도록” 누리게 하는 주님의 약속이다. 기도, 붙잡아야 할 분명한 주님의 은혜의 약속이다.
나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믿은 이전과 이후 삶을 비교하라면 단연코 “기쁨(평안)”일 것이다. 세상 근심과 염려는 홀로 감당하는 것 같은 삶이었지만, 주님을 믿은 후 점차 기쁨이 채워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 성령님의 돌보심을 누리는 기쁨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다(22절).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쁨은 주님을 믿으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참되고 영원한 기쁨은 치열한 의심과 근심, 슬픔이라는 과정을 극복해야 누리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근심하고 슬픈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고민이 되고, 그 의심 때문에 더 믿기 힘들고 슬퍼서 주님께 토로하면,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알게 해 주시는 과정을 거쳐야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하여 근심되지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한다. “조금 후에”… “내 이름으로 구하면 주시리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는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기도할 수 없었고 응답하시지도 않았던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직접적인 혜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구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와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 이와 같은 질문들을 기록된 말씀으로 충실히 대답해 주신다. 그때마다 느끼는 기쁨은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은 분명히 있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이런 답답함과 의문, 근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근심, 슬픔은 지나고 나면 더 큰 기쁨, 더 확실한 신뢰, 더 명확한 이해들로 채워질 때가 많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요구하지) 않을 것이다…(새번역_23절 상)” 이 정도로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상이 된다는 의미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지금은 답답할 수 있지만, 성령님께서 “그 날에” 풀어 주실 때는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 넘친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더라도 “조금 후에” 깨닫게 해 주실 성령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기다려 보자. “그 날에는” 조금도 답답함 없이 당연하게 기쁨을 누릴 성령님의 은혜를 의심하지 말자.
*지금 주님을 다 알지 못해 답답하더라도 그저 뒤따라 가 보자… 조금만 있으면, 조금 후에는 근심이 물러가고 기쁨이 밀려온다.
*주님, 답답하더라도, 다 알지 못해도 “조금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답답하여 의심과 근심이 생기더라도, “그 날에” 밀려올 기쁨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주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