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 18:1-11]
 – 2026년 03월 29일
– 2026년 03월 29일 –
요 18:1-11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을 수치의 길이 아닌 영광과 승리의 길로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고뇌를 노출하며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대속자의 길을 기꺼이 걸아가는 예수님의 고뇌를 전달해준다. 본문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으로 단지 수동적으로 어쩔수 없이 체포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18~19장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다. 공관복음은 수난의 관점으로 자세하게 기록했고, 요한은 수난을 묘사하며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이야기로 기록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수난의 사건이 아닌 영광의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정해진 시간을 말씀하실 때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높이 들리는 영광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공관복음과의 기록 초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관복음은 예수가 체포당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로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이 모습이 없다. 둘째, 공관복음은 제자들이 예수가 체포되자 도망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자신이 체포되는 대신 제자들을 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셋째, 공관복음은 가룟 유다가 배반의 키스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를 노출시키는데, 요한은 이 모습을 묘사하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었음을 기록한다. 넷째,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꼐서 ‘나다(I am)’라고 말할 때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 나자빠진 사실을 기록한다. 다섯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정식 재판 장면이 없다. 증인도, 선고도 없다. 재판 받고 있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도리어 빌라도로 묘사된다. 여섯째, 공관복음은 재판 중에 예수가 자신의 정체에 관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나, 요한복음에는 잠잠하지 않고 당당하고 여유롭게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한다. 일곱째, 공관복음의 재판의 초점은 예수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왕권에 관해 초점을 맞춘다. 마지마긍로 요한복음에는 십자가 위의 절규가 없다.
 
이런 차이점들을 통해 요한이 강조하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피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죽음 앞에서 근심도,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이 성경말씀을 서취해나가시는 모습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의 왕권과 관련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이 곧 그의 왕권의 행사임을 보여준다. 
 
 
 
1.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1~3절)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기도하며 체포딘 곳을 ‘겟세마네’ 혹은 ‘감람산’으로 밝히지만, 요한은 정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고 ‘동산’으로 표현한다(1, 26절). 또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체포되신 것 외에, 그가 이곳에서 기도하신 것을 강조하지만, 요한은 체포되는 장면만을 묘사한다(1~11절). ‘동산’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실 뿐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며(19:41), 나중에 ‘동산지기(20:15)’로 오해받는다. 전통적으로 본문은 예수님이 새 창조를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하시는 장면으로 본다.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위해, 새 성전을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 놓으신다.
 
3절은 유다의 배신을 언급한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과 추측하기로 빌라도에게 요청한 로마 군대의 병사들을 예수께 인도한다. 그들은 참 빛이신 예수님(8:12)을 잡기 위해, 등과 햇불과 무기를 가지고 온다(3절). 요한은 공관복음과 달리 그들이 무기뿐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등과 횃불을 들고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당연히 밤에 잡으로 오는 것이기에 등과 횃불을 들고 오는 것이지만, 요한은 상징적인 의미를 의도했을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겨우 자신들의 작은 빛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나마 등과 횟불을 가지고 있으나 여전히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요한은 1:5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어둠에 있지만, 결국 빛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먼저 언급했었다. 또, 유다는 첫 사람 아담이 동산에서 하나님을 배신한 것처럼, 타락한 인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어둠의 유혹에 넘어가 빛을 잃은 것처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은 눈에 보이는 등과 횃불만 부여잡고 있다.
 
 
 
2.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줌(4~9절)
병사들이 “나사렛 예수(5, 7절)”를 찾는다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5, 6, 8절)”라고 대답하신다. 이 모습에는 예수님의 두 가지 정체성이 묘사되었다. 첫째,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묘사된다. 1:45과 19:19에도 예수님을 이렇게 언급하며 예수님의 출신지를 밝히며 예수께서 허구의 존재가 아닌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적 정체성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둘째,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5, 6, 8절)”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기독론적 계시인 ‘에고 에이미(내가 그다)’를 드러낸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일곱 개의 에고 에이미 표현이 등장한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과 생명(11:25), 길과 진리와 생명(14:6), 포도나무(15:5)”다. 그리고 술어가 없는 절대적 용법으로 9회(4:26; 6:20; 8:24, 28, 58; 13:19; 18:5, 6, 8) 등장한다. ‘에고 에이미’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표현(예, 출 3:14; 사 43:10)이었고, 요한은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그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며 땅에 엎드린다(6절). 일차적으로 그들이 엎드린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능력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기에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엎드렸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할 쭌 아니라 그의 대적자들의 실패도 암시적으로 묘사되는 기능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잡혀가는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자신의 제자들은 그냥 가게 하라고 하신다(8절). 자신이 체포되는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을 돌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자기 백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앞선 말씀들(6:39; 10:28; 17:12)을 성취하기 위해서다(9절). 물론 앞선 말씀들과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중심 의도가 성취된 것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온 말씀(14:24)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의 자발적 죽음 암시(10~11절)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장면은 다른 복음서의 기술보다 더 상세하다. 마태복음은 베드로의 이름도,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마 26:51~56). 다만 예수님이 이렇게 체포되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을 강조한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대제사장 종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막 14:47~50). 다만 예수님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잡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체포되신다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참으라고 말씀하신 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치유하셨다고 기록한다(눅 22:50~53).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만 베드로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이름을 밝힌다(10절).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 역사적 사실임을 변증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신다.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때에 따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시기 때문이다(17:1).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시기 위함이다.
 
또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때에 따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시기 때문이다(17:1). 즉,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께서 주신 잔”으로 비유하신 것을 기록한다(11절). ‘잔’은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되었고(마 20:22; 26:39; 막 10:38; 14:36; 눅 22:42), 예수님이 이 잔을 되도록 피할 수 있기를 기도하신다(마 26:39; 막 10:18; 눅 22:42).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기꺼이 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말씀만 나온다(11절).
 
요한은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1:29), 아버지의 뜻을 따라(3:16; 17:1),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유다는 스승과 동료들과 하나 됨의 친교를 나누던 공간을 배반의 장소로 둔갑시켰다. 메시아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경배해야 마땅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무장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메시아를 잡으로 왔다. 십자가의 예수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주님이 잡히셨다. 가룟 유다는 가끔 제자들과 모이시던 곳을 알고 있었다(2절). 유다가 … 데리고 … 그리로 왔다(3절). 주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4절) 물으셨다. 주님을 팔아 넘길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지만(5절), 주님께서 먼저 “내가 그니라” 말씀 하셨다(6절). 이때 사람들이 쓰러졌고, 주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7절)” 물으셨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8절)”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찾고 있기에 이 사람들(제자들)은 물러가게 하라(8절)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새번역_9절).”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쳐서 잘라 버렸다(10절). 주님께서는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하여 마시지 않겠느냐?(새번역_11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마지 못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 나섰다. 주님을 찾으러 온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 하시며 당당하게 나서셨다. 출애굽기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출 3:14_에고 에이미)이 울려 퍼지자 그들은 땅에 엎드려졌다.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군사들은 주님의 이름의 권위 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절대 순종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며 아버지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 하신다.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거두시고 그들 앞에 나아가 붙잡히셨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신의 사명 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한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한편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어디에 계실지 알고 있었다(2절). 어쩌면 주님과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올라 오실 때 마다 함께 거닐었던 겟세마네 동산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과의 함께 한 시간과 흔적이 있는 곳에서 주님을 팔아 넘겼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 7절)”며 먼저 물으시는 주님은 “내가 그니라(5, 6, 8절)”라고 또 대답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주님은 함께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이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신경 쓰신 것이다. 세상이 적대하여 고난과 환난을 주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새번역_8-9절).”
 
*그렇다. 주님께서 예전에 말씀 하신 대로 이루시기 위해서 였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이루셨다.
 
*또 한 가지는 “…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새번역_11절)” 이라고도 하셨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 하시려고 “내가 그니라”라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셨다. 
 
*말씀을 이루시려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자신을 붙잡으러 온 대제사장들의 부하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내가 그다!” 드러내셨다.
 
*주님은 잡히신 것이 아니라 잡혀 주셨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 잡혀 주셨다. 십자가의 길을 잡혀주심으로 문이 열렸다. 
 
 
*베드로는 주님의 잡혀주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칼을 빼어 들고 휘두른다. 주님께서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절)” 라고 말씀 하셨다. 주님이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끌려 가시는 것을 참지 못했다. 진리 되신 주님이 무시 당하는 것을 칼을 빼들어 몸부림 치며 막고 싶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한다며 칼을 칼집에 넣으라 하신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나도 칼을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나의 칼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순종 해야 하는 길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혈기가 올라와도 예수님처럼 이다. 십자가의 길로 스스로 나아가신 걸음을 생각해야지… 먼저 칼을 휘두를 일이 아니다.
 
 
 
*주님, 우리 위한 십자가의 길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신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잡혀주신 사랑”을 본 받겠습니다.
*주님, 먼저 칼을 빼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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