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2-27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 vs 베드로의 “나는 아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신다. 이 와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수모를 당하시며 곤욕을 치르시는 예수님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이 체포될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일 때, 안나스는 그의 장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 부른다(18:19, 22). 추측하기로는 은퇴한 대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복수의 대제사장이 산헤드린 공의회를 움직였던 것 같다(마 16:21; 20:18; 막 8:31; 10:33; 행 9:14; 23:14). 사도행전 4:6에 대제사장들의 이름이 나열(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기를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때라고 밝힌다(눅 3:2). 비록 안나스가 은퇴한 대제사장이고 가야바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지만, 안나스가 여러 명의 대제사장들 중에서 실제 핵심 권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보인다.
1. 베드로의 부인 1(12~18절)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안나스에게 끌고 간다(12~13절). 당시 안나스는 은퇴한 대제사장이고, 가야바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지만, 아마도 여러 명의 대제사장 중 안나스가 실제 핵심 권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는 앞서 산헤드린에서 회원들이 예수 때문에 로마가 침입할 것을 걱정하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민족이 하나 될 것을 예언했었다(11:49~50). 그는 계시의 온전한 의미는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깊은 계시를 공회 앞에 드러낸 것이다. 이 계시는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 된다는 것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탄생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으나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간다(15절). ‘다른 한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다. 이 제자는 누굴까? “아는”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는 단순히 안면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친구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를 의미한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함께 등장하여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20:3~10; 21:1~23). 또한 대제사장과 아는 제자는 “그 다른 제자”로 불리는데(16절),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도 ‘그 다른 제자’로 종종 불리기 때문이다(20:2~4, 8).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둘 다 예수님을 좇아가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반면(17절), 그 다른 제자는 다만 예수님 가까이 있을 뿐이었다. 앞서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를 만큼 흥분했던 베드로였지만, 이제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가 되었다. 요한은 베드로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부정하게 묘사한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자를 때도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11절). 이제 예수님이 체포된 상태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베드로는 두 번,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나락으로까지 떨어진다(25~27절).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우실 것이다(21:15~19).
2. 대제사장의 심문(19~24절)
대제사장(안나스)이 계속해서 심문한다(19, 22절). 요한은 안나스의 이름보다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의도적으로 계속 사용하는데, 이는 인간 대제사장 안나스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대제사장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공관복음은 대제사장의 심문에 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적 조용하고 수동적으로 묘사하나, 요한복음의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적극적이고 당당하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질문은 간단하게 처리하고, 예수님의 대답은 거리낌도 없고 주저함도 없이 길게 묘사한다(20, 21, 23절).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치는 장면은 요한복음의 아이러니 기법이다. 그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고 지적하며 예수님을 손으로 친다(22절). ‘손으로 치다(라피스마)’는 이사야 50:6에서 고난 받는 종이 당한 수치와 모욕을 생각나게 한다.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은 예수님의 태도가 무례하다며 때렸다. 하지만 실상은 그가 진정 무례한 사람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은 이후의 빌라도의 재판 과정에서 반복된다. 빌라도는 진정한 재판관이신 예수님을 자신이 재판하여 놓아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19:10, 12). 유대인들은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가이사가 왕이라고 고백했다(19:15). 이러한 모습을 통해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님이 참 대제사장이시며, 참 왕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을 증명할 증인을 요구하신다(23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증인들의 증언이 거짓 증언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다(마 26:59~61; 막 14:55~5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증언 자체를 생략한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께 끊임없이 증인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세 증인의 증언이 효력이 있다고 한 율법에 따라(8:17; 신 19:15) 자신의 권위를 증명해 줄 세 가지 이상의 증언을 제시하셨다(5:30~39; 8:14~18; 15:26~27). 하지만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에는 전혀 증인이나 증언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요한은 의도적으로 대제사장의 심문이나 유대인들의 고소가 얼마나 신뢰성이 없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증인/증언’은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요한은 자신의 기록을 증언이라고 했고(21:24), 요한복음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고 밝힌다(20:30~31).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도 ‘증언’이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증언’ 사역을 한다(15:26~27).
3. 베드로의 부인 2, 3(25~27절)
공관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을 연속으로 기록했다(마 26:69~75; 막 14:66~72; 눅 22:56~62). 그런데 요한은 첫 번째 부인(15~18절)과 두 번째, 세 번째 부인(25~27절) 사이에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 받으시는 장면(19~24절)을 배치한다. 이는 공관복음이 베드로의 부인과 그에 따른 눈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뿐 아니라 예수님과 대제사장의 관계도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 형식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재판받는 장면과 연결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게 한다.
첫째, 예수님의 신실한 모습과 베드로의 실패한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베드로는 겁에 질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다(27절). 신실한 믿음의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고난의 길을 자발적이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신다.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으시고, 대제사장이나 그의 아랫사람의 위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둘째, 대제사장의 권위와 예수님의 권위가 비교된다. 재판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권위에 당당하게 맞서셨다. 참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인간 대제사장보다 더 적극적으로 위엄 있게 말씀하신다. 이에 반해 대제사장은 제일 처음에 질문을 던진 후, 그 이후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셋째, 요한복음에서는 심지어 대제사장의 예언과 예수님의 예언이 비교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예언한 가야바의 모습(11:50; 14절)과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한 예수님의 모습(13:38; 27절)이 비교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심으로 가야바의 예언은 성취되고, 베드로가 실제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된다.
나는?
-붙잡히신 예수님, 풀어주신 예수님… 자신의 결박을 통해 사망의 결박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시려고 순순히 결박당하셨다. 죽어서 수족을 결박당한 나사로를 살리시고 ‘풀어 놓아 가게 하라'(11:44) 하시고, 제자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18:8)고 하신 예수님이 자기 한 사람의 죽음으로 양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것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과 절차 하나까지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셨다.
-예수는 유대 법정에서 대제사장을 지낸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질문에 예수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고 당당하며,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안나스를 심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 심문받고 있을 뿐이다.
-시인하신 예수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예수께서 “내로다(I am)” 하심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고 자신은 당당히 십자가 앞에 나아가신 반면에, 목숨을 버리더라도 주를 따르겠다던 베드로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아니다(I am not)” 하며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안전한 곳에서는 인정하고 불리한 곳에서는 침묵하거나 부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가 참 제자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수하의 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로 의리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사랑해서 그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이다(요 13:38).
-공생애 내내 자신의 안위는 하나님께 맡기고 당당히, 거침없이, 숨김없이 어디서나 가르쳐야 할 말씀을 가르치셨다. 반대자들의 질문에 응수하셨고, 성공적으로 변호하셨다(5~10장). 늘은 모든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었다(21절). 그 결과 대제사장의 무리는 예수님의 발언 태도를 트집 잡아 폭력을 휘둘렀을 뿐, 단 한 가지도 예수님의 죄를 증명하지 못했고, 단 한 마디로도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양들을 살리기 위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이었지 결코 죄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대제사장의 심문에 담대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하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맞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으셨다. 지금 걷는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을 아셨으며,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스스로 그 길을 걷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도 능히 세상을 판단하며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 번이나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며 숨는다. 대제사장 앞에서 담대하게 진실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두려워하며 거짓을 진술한다. 이처럼 신앙의 걸음에서 어떤 두려움이, 혹은 어떤 희생의 대가가 사람들과 세상 앞에서 신앙을 감추게 만드는지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후 닭이 운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의 장담이 실패했고,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다. 또한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일순간 돌아보게 하는 경종의 역할을 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매일의 묵상이 나를 돌아보고 경종을 울리는 닭 울음소리가 되어야 하리라.
*주님,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앞에서도 감추지 않고 당당히 주님을 인정하며 믿음을 드러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