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28-38]
 – 2026년 03월 31일
– 2026년 03월 31일 –
요 18:28-38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과 빌라도가 재판정에서 만난다. 첫 번째 심문을 통해 예수님은 세상 나라와 다른 하늘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나라는 진리에 기초하는 나라다.
 
“유대인의 왕(33절)”이라는 타이틀은 “이스라엘의 임금(왕)”이라는 말로 앞서 사용되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때(1:49),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12:13) 이 호칭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첫 번째 심문은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것이었다(33, 37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고집한다(18:33, 39; 19:19).
 
 
 
1.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다(28~32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갔다(28절). 그러나 관정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방인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자신들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상은 가장 부정하고 악한 짓을 했으니, 곧 예수님을 거역할 뿐 아니라 죽이려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악을 행한다고 정죄한다(30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온 이유는 자기들에게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31절). 이는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예언하셨다(3:14; 12:32~33).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수치를 줄 작정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고(신 21:23), 빌라도는 자신의 권위로 예수님을 못 박는다고 생각했다(19:10).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귀결된다.
 
요한은 계속해서 구약성경의 성취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를 확인시켜준다. 이런 기록 형태는 결국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던 구약성경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2. 빌라도의 심문(33~38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질문을 한다(33, 37절). 그리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고집한다(33, 39절; 19:19). 군인들도 예수님에게 가시나무 왕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님을 부른다(19:2~3). 빌라도는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 한다(19:14~15).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작 자기들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다고 한다(19:15). 빌라도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러한 아이러니 기법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예수님의 출신 때문에 그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겠다는 유대인의 말을 통해, 오히려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7:27). 대제사장 가야바를 통해 예수님의 진정한 대제사장적 사역과 신분이 드러난다(11:49~52). 이제는 이방인 빌라도가 오히려 예수님의 왕적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신다(36절). 자신이 왕인 것은 분명하지만(37절), 그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구분된다고 하신다. 세상 나라를 초월하는 나라이기에 로마도 아니고, 민족적 이스라엘도 아니고, 전혀 다른 종말론적 나라라는 것을 암시한다. 공관복음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천국)’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직 두 번 사용되는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셨는데(3:3, 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거듭나다’는 ‘위로부터 태어나다’, 즉 ‘하늘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새 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 씻음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 창조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참조, 겔 36:25~27).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중생(거듭남)’과 관련 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셨다면, 빌라도의 심문에서는 진리를 통해서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37절).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칼과 창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세워지는 나라다.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빛이 되셔서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신다(8:12; 9:5).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이신 자신을 증언한다(14:6). 따라서 진리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가 그의 나라 백성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곧 진리를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반면,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8:44).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거짓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 나라가 그에게 없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라는 말은 예수님이 선한 목자 비유에서 말씀하신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10:3, 4, 16, 27).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라간다. 목자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한다(10:10).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0:11). 결국 본문을 통해 목자의 음성은 곧 진리의 음성이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이라는 빌라도의 말이 반복된다(19:4).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애썼다(19:12). 이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를 빌라도가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이 모습은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처한 로마 제국 환경에서 기독교 복음을 변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즉, 빌라도의 선언은 기독교 복음이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에 저항하거나, 그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무죄가 빌라도에 의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복음이 로마 제국에 자연스럽게 전파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는?
-산헤드린 회원들은 유월절 준수는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유월절을 완성하러 오신 어린 양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다. 무고한 줄 알았으나, 예수를 제거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제의적인 정결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메시아를 욕보이는 것만큼 부정한 일은 없다. 그들은 가장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없이는 어떤 종교적인 열심도 나를 정결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왕이시다. 하지만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3:3, 5), 즉 영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나라다. 하늘 백성은 이 세상에 두 발 딛고 살지만, 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지 않고, 눈에 보이는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참 주권자인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거나 혈통과 신분과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고개 돌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무력 저항을 만류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무기력하게 체포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싸움을 부추기는 이 세상 나라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사랑과 긍휼과 배려로 모두가 공생하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앞에 계신데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오지만(10:4), 빌라도는 어둠에 속했기에 예수님을 목자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모르는 맹인이 빛을 재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데도 총독이나 재판장 되었다고 해서 성공과 출세로 불러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새벽부터(28절) 총독 관저는 분주했다. 유월절 아침이기에 주님을 끌고 온 유대인들은 정결법을 지키느라 관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관례를 알고 있던 빌라도가 관저 밖으로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그들은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새번역_30절)”이라고 주님을 범죄자로 단정하고 사형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모습에서 가짜 뉴스,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보이는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결론을 정해 놓고 과정을 짜 맞추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광기 어린 행동들은 상식과 에티켓마저 무시하고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성경 속의 이런 모습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너무도 확연하고 보여지는 요즘이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죄에 얽매인 인생은 그래서 소망이 없다.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탐욕이 더 많은 죄로 이어진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이래서는 안 된다. 불법적인 행태를 자행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기막힌 인식이 우상 숭배조차도 정당화시키는 완악함으로 나타났다.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의 부화뇌동에 휩쓸리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해야 한다. 그들의 행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 복음에 더욱 시선을 고정해야 하지 않겠나!
 
-빌라도는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왕이냐?”는 질문을 반복한다. 유대인들이 “행악자”라고 표현한 주님의 죄목이 이것임을 짐작케 한다. 로마의 식민지 유다의 왕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데, 자칭 왕이라 하였으니 이는 로마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죽이기 위해 그의 죄목을 “정치적인 죄, 반란죄”로 둔갑시킨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검은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내가 왕이다”라고 대답했지만, 이어지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에 정치적인 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이해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
 
-총독, 당대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식견과 정세를 파악하는 안목, 유월절 특사를 제안하는 기민함 등은 갖추었을지 몰라도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주님은 한결같이 적극적으로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여 세상에 오셨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방향과 목적을 잃지 않으신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주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오셨는데, 나는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나는 주님의 진리의 증언에 목마른가? 주님께서 증언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드러낸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제대로 듣고 있을까?
 
 
 
*주님,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오신 걸음, 꿋꿋하게 걸어가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시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그렇게 증언하신 진리 따라 오늘도 살겠습니다.

댓글 남기기

매일성경 묵상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28-38]

요 18:28-38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과 빌라도가 재판정에서 만난다. 첫 번째 심문을 통해 예수님은 세상 나라와 다른 하늘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나라는 진리에 기초하는 나라다. “유대인의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 18:1-11]

요 18:1-11 기꺼이 잡혀 주시는 사랑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을 수치의 길이 아닌 영광과 승리의 길로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고뇌를 노출하며 모든 사람을 살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 [요 17:1-16]

요 17:1-16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다. 중보기도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리우는데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를 화목케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평화 [요 16:25-33]

요 16:25-33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평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하여 주신다(27절). 이런 이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주님의 이름으로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16-24]

요 16:16-24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무지한 제자들의 모습과 이를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자상한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예수님이 먼저 자신의 떠남을 말씀하시자(13:31~35), 베드로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13:36~38).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요 16:1-15]

요 16:1-15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세상에게 고난과 박해를 받을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 이어진다. 먼저 주님께서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한 이유를 알려 주신다(1-4절 상).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