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십자가 아래 새 하늘 가족 [요 19:17-27]
 – 2026년 04월 02일
– 2026년 04월 02일 –
요 19:17-27 십자가 아래 새 하늘 가족
 
예수께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지상에서 보면 이것은 유대 당국자들의 모함과 심약하고 비겁한 빌라도의 판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이 된 것이다. 이때 요한은 예수님을 고난당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한다. 그의 십자가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이 만들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정치범의 처형이지만, 요한의 관점에서는 이는 만왕의 왕 등극식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왕으로 선포된다. 심판하는 빌라도조차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게 된다. 그 왕국에 시민이 될 사람들은 바로 진정한 제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라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1. 예수님의 못 박힘(17~22절)
공관복음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다고 말한다(17절). 이것은 예수님이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을 강조하기 위해, 구레네 시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참조, 1:29; 10:11, 15, 17; 15:13). 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 일반적으로 죄수가 십자가 전체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평 기둥만 옮긴다. 십자가 수직 기둥은 이미 처형 장소에 갖다 놓는다. 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침묵한다(18절). 이러한 기록 양상은 요한이 예수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십자가형 자체가 바로 죽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이 수단이 되어 심장마비, 질식, 쇼크 등으로 죽게 된다. 이 형벌은 반사회적 범죄자에게 가해졌다. 특히 노예나 반제국주의 범죄자들이 당하는 형벌이었는데, 예수님이 그런 범죄자로 취급받았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로마 제국을 어지럽게 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로 몰린 것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땡볕 속에서 예수님의 몸속 피가 점점 빠져나가고, 그의 몸에는 수분이 부족했을 것이다(28절). 그리고 마침내 산소가 부족하여 호흡 곤란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30절).
 
빌라도가 써 붙인 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의 이름과 칭호가 있었다(19절). 히브리어(아람어), 로마어(라틴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20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패에 왜 세 언어로 기록했을까? 이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라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요한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죄패의 제목대로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 곧 구원의 왕, 진리의 왕국의 왕으로 만방에 선포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당시 로마 세계의 공용어(헬라어)와 로마 제국의 언어(라틴어)와 현지어(히브리어)로 기록되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 셈이 되었다.
 
 
 
2. 예수님의 옷(23~24절)
군인들은 십자가형의 관례에 따라 죄수들의 옷을 벗긴다. 군인들이 옷의 네 깃을 각각 취한 다음에, 속옷의 경우는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가지려 한다. 왜냐하면 속옷은 통으로 짜여져 있어 나누기 곤란했기 때문이다(23절). 그런데 사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다른 복음서들도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았다고 기록한다(마 27:35; 막 15:24; 눅 23:34). 그러나 오직 요한복음만 이러한 군인들의 행동은 성경 말씀의 성취라고 기록한다.
 
구체적으로는 시편 22:18의 성취인데, 특히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이 깊다. 다윗이 고통 중에 외치는 간절한 부르짖음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를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 요한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그들의 행위를 설명하며, 그것이 곧 성경의 성취임을 알린다. 참고로 시편 22:1을 인용하든, 22:18을 인용하든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시편의 다윗과 비교된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체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가족(25~27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네 명의 여인이 소개된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25절)”다. 물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 제자를 ‘아들’이라 소개한다(26절). 그리고 이어서 제자에게도 어머니를 소개하여 그 제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서 모신다(27절).
 
일부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효도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데 그치지만, 예수님의 행동에는 이러한 윤리적 차원을 뛰어넘어, 구원 역사적 차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요한복음에서 그의 구원 사역의 정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30절). 십자가는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 기간에 말씀하신 그의 “때(호라)”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 계시의 핵심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기독론적 의미와 함께 그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성전으로 세우시는 교회론적 의미가 나타난다.
 
“여자여”라는 표현은 여자를 무시하는 말도, 그렇다고 극존칭의 표현도 아니다. 어느 정도 존중하지만, 어머니에게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도 아니다(4:21; 8:10; 20:13, 15). 이는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를 객관화할 때 사용하던 표현이었다(2:4). 예수님의 어머니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지금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와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객관화하여 그의 두 제자를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족으로 세우신 것이다.
 
요한복음 구원론과 교회론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개념이다. 요한복음은 구원을 생명의 출산, 그리고 가족 됨의 관계로 설명한다(1:12; 3:3, 5). 그리하여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한다(8:37~47). 하나님의 자녀가 거하게 될 하나님의 성전은 그 개념이 ‘아버지의 집(가족)’으로 발전한다(14:2~3).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의 가족 됨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며, 하나님의 가족이 실제로 성취된 것을 나타내신다(20:17). 즉,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교회의 새로운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를 지신 채 죽은 자들이 가득한 골고다로 오르시고, 거기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린 후 아버지와 창세전에 누리셨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거침없이 순종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려움이라면, 내게 맡기신 십자가로 알고 예수님처럼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서 붙이라고 명령한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였기에 “자칭 유대인”이라고 쓰라는 대제사장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죄목을 적은 팻말이 아니라 이름을 적은 팻말로 달게 한 셈이 됐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또 예수님 자신의 확신대로 십자가 위에서 구약에서 약속한 유대인의 진정한 왕으로 등극하셨다. 더구나 유대 민족만의 왕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그의 믿음을 좇는 모든 열국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원하실 인류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어머니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4)”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 위에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보다 어머니의 뜻을 앞세우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아들로 살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요한에게도 “보라 네 어머니라” 하면서 마리아를 부탁하신다. 이는 단순히 스승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 가족의 일원으로 마리아를 받아서 돌봐 달라는 당부일 것이다. 이처럼 내게 부탁하신 하나님 나라 새로운 가족인 더온누리공동체를 더욱더 예수님처럼 사랑하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왕위 등극식이다. 예수님이 온 만방에 영적인 왕국의 왕으로 선포된 사건으로 다룬다. 이 등극식은 성경의 성취로서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옷을 나누는 일조차도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는 어이없이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죽임을 당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혈연에 의하든지, 민족에 의한 가족이 아닌, 예수님을 신앙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시점이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누구나 새로운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주님께서 하늘 가족을 만들어 주신 장면이다. 십자가 곁에 서 있던 어머니와 여인들,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고 그 제자를 보며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새번역_26절)”,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새번역_27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 (새번역_28절)” 목마르다(28절) 말씀하신 후 “다 이루었다(30절)”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셨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가 형제, 자매, 곧 참된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2:50).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하늘 가족을 이루도록 부탁하신 후에야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끝까지 인내하셨던 의지를 내려놓으신다. 하늘 가족 공동체를 맡아 주시고 “다 이루었다” 고백하시고 운명하셨다.
 
*십자가 곁으로 나온 이들을 “하늘 가족”으로 칭하여 주셨다. 한 가족으로 묶으셨다. 주님의 이와 같은 모습을 따라 요한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1:13)이라고 했다. 십자가 곁에 서야 하늘 가족이다. 예수님 아래 모여야 하늘 가족이다.
 
*하늘 가족 삼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지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하늘 가족을 맡아 주셨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이로써 우리에게도 혈육, 민족,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십자가 곁에, 십자가 아래” 서 있기만 하면 하늘 가족의 은혜가 임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하늘 가족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이루어 주신 하늘 가족인 교회 공동체를 주님처럼, 주님과 같이 사랑하고 있을까? 감히 흉내 낼 수 없지만 추구해야 할 주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고 있을까? 해마다 반복되는 고난주간,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에 집중하기보다 이미 2천 년 전에 완전하게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의 정신을 따라 우리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그 사랑을 구현해 내야 하지 않을까! 순종해야 하지 않겠나!
 
*주님, 나를 위한 십자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 하늘 가족 되게 한 십자가 아래 함께 모여 있는 하늘 가족들과 십자가 사랑의 가치를 구현하는 공동체여야 하지 않겠나! 여전히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전쟁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더욱 돌아보는 교회 공동체가 곧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 주시며, “자, 너희 가족이다. 우리 가족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겠나!
 
 
 
*주님, 하늘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십자가 곁에 서서 하늘 가족으로 늘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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