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8–30 + 가상칠언: 예수님의 죽음과 가상칠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극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셨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의 삶의 의미는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과업을 끝까지 완수하셨다는 선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를 외치고 죽음을 맞이하신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제 그 과업을 완수하신 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실 수 있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 복음서 전체를 종합하면 총 일곱 개다. 요한복음에 세 개, 누가복음에 세 개,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공통으로 한 개가 기록되어 있다. 각 복음서의 독특한 신학과 전후 문맥을 따라 말씀을 살피는 것이 기본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한눈에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1. 예수님의 죽음(28–30절)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아셨다(28절). “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적 고통을 드러낸 말씀이다. 채찍 아래에서 출혈은 점점 심해지고, 마침내 몸속 수분이 고갈되었다.
예수님의 “목마르다”는 외침은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시편 69:21의 말씀과 연결되며, 본문에 나오는 “우슬초”(29절)는 출애굽 당시 어린 양의 피를 찍어 문설주에 바를 때 사용되었다(출 12:22).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는 설명은 요한복음 19장의 죽음 기사에 계속 등장한다(19:14, 36).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며,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30절). “이루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텔레오”(28절에서는 “응하게”로 번역됨)가 30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요한이 성경의 성취를 나타내는 다른 구절에서는 “플레로오”(19:24, 36)를 사용했으나, 28절과 30절에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완성’ 혹은 ‘성취’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셨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다.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삶을 사셨다(4:34; 5:36; 17:4). 그 사명은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3:16).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계시가 곧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그 계시의 정점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밝히 드러남)되는 곳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속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1:29). 따라서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은 “죄 용서(속죄)”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은 그분의 교회에 의해 계승된다.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한다(17:21). 그리고 그 교회 사명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죄 용서)를 증언하는 것이다(20:23).
“영혼이 떠나가시다(30절)”에서 “떠나가시다(파라디도미)”라는 동사는 “넘겨주다”라는 의미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6:64; 12:4; 13:2; 18:2),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재판에 넘겨줄 때(18:30, 35; 19:11) 사용되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병사들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다(19:16).
그런데 이와 같은 구절들에서는 “파라디도미” 동사가 늘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주어’로 사용되어, 능동적으로 친히 자신의 영혼을 내어 주셨음을 증언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신 분(10:18)임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영혼)을 누구에게 넘기셨을까? 하나님 아버지일까? 그렇지 않다. 70인역(헬라어 번역)의 이미 예언된 구약에 따르면, 메시아의 죽음은 “파라디도미”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통해, 종의 영혼이 죽음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다(사 53:1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다(눅 23:46)고 했다.
이를 종합하면, 예수님은 주도적이면서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넘기시지만, 동시에 아버지께 맡기신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해 스스로 능동적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으셨다. 그 사랑 한이 없다.
2. 복음서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일곱 말씀이다. 시간 순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부터 마지막 운명까지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바닥에 누워 있는 십자가 가로틀에 양손이 못질 당하면, 몸무게를 어느 정도 지탱하도록 양팔뚝을 밧줄로 나무에 고정한다. 십자가 틀이 세워지면 중간에 엉덩이를 걸칠 수 있도록 약간 튀어나온 받침대가 제공된다. 이는 죄수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쉽게 죽지 않고 더 오래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한 고문 장치다. 그렇게 예수와 좌우편 죄수들의 십자가가 골고다에 세워졌다. 추측하기로, 누가는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사들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한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나무에 달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치부했고, 로마인들은 최악의 조롱과 수치를 안겼다. 그들의 무지가 하나님의 아들을 저주의 십자가에 달았다. 그럼에도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하나님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원수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신다(눅 6:27, 35).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보여준 원수 사랑에서도 드러난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원수 사랑의 본이 되었다(행 7:60).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예수님은 자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오른편의) 한 강도에게 낙원을 선포하셨다. 죽음을 앞둔 두 강도의 운명이 엇갈리는 이 드라마틱한 장면은 오직 누가만 들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강도)가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며 예수님을 비방한다. 이때 다른 행악자(강도)가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의 무죄를 변증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 오른편 강도에게 이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한 사람은 유기를, 다른 한 사람은 선택을 받은 것이다.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아버지께서 아들에게로 이끌어 주신) 영혼을 끝까지 구원하신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공생애 마지막 구원의 대상인 강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죽음 직전에 있던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은 예수님이 죽는 바로 그날이라기보다, 아주 가까운 시기를 가리킨다. 추측하건대, 이는 신앙을 고백하는 강도를 격려하기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낙원”은 마지막 부활이 있기 전, 신자의 영혼이 거하는 곳을 가리킨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두 번째 말씀이 공생애 마지막 영혼 구원의 사역이었다면, 세 번째 말씀은 십자가 아래 예수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 공동체인 교회를 창조하시는 마지막 사역이었다. 요한은 두 강도가 함께 좌우편에 못 박혔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이 세 번째 말씀을 더 자세하게 다룬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이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약 6시간이 경과한 오후 3시에 하신 말씀이다. 마가는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전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 두 번째와 세 번째 말씀을 하신 후 정오부터 3시까지 마치 무대 조명이 모두 꺼진 듯 온 땅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세 시간의 긴 침묵을 뚫고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가 울려 퍼졌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절규가 하늘을 갈랐다. 아들 예수에게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었기에,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다. 아들의 죽음을 허락한 아버지의 고통도 매한가지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셨다. 시편 22:1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편 22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21절은 고통 중에 있는 다윗이 자신의 상황을 탄식하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22–31절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하다.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의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의인을 건지시며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예수님께서 이런 다윗의 탄식을 인용하신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것이다. 둘째, 비록 고통스러운 탄식으로 자신의 아픔을 하소연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다윗이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본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고통을 맡기는 메시아의 고백이 담겨 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남은 힘을 쏟아부으신다. 이 말씀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시 69:21)”에 대한 성취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시 22:15)”도 연결된다. 이 두 구절은 모두 의인의 고난과 고통이 극한을 표현한 시편들이다.
스스로 생수가 되어 주시며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던 예수님이, 극한의 목마름으로 육체의 한계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공감하신 것이다. 이때 어떤 자들이 신 포도주가 담긴 그릇에서 해면을 적셔 우슬초에 매달아 예수의 입에 가져다 댄다. 이는 죄수에게 고통을 증폭시키는 매우 가학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바짝 마른 입술에 신 포도주가 닿자 곧바로 운명하신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고 표현한다. 잔칫집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최상급 포도주로 만들며 시작하신 예수님의 공생애가, 사람들이 강제로 가져다 댄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6) “다 이루었다(요 19:30).”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며,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30절). “이루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텔레오”(28절에서는 “응하게”로 번역됨)가 30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요한이 성경의 성취를 나타내는 다른 구절에서는 “플레로오”(19:24, 36)를 사용했으나, 28절과 30절에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완성’ 혹은 ‘성취’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셨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성경을 성취하시며, 그렇게 아버지의 모든 일과 뜻을 온전히 이루신 아들의 고백이다. 아버지를 향해서는 신실한 아들의 기쁨의 고백이며, 세상 목마른 자들을 향해서는 아버지께로 갈 유일한 길(생명과 진리)이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복음의 선포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고통스러운 절규가 세 시간의 긴 침묵을 뚫고 나올 때,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위에서 아래로(막 15:38) 찢어진다. 생명의 길이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시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신다. 이 말씀 또한 긴 침묵 끝에 큰 소리로 드려졌다. 시편 31:5의 성취였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 죽음이 이렇게 완성된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셨다. 비록 십자가 죽음이 잠시의 버림임이 틀림없으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끝까지 절대적으로 신뢰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 내시고, 버림받음으로 잠시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회복하실 것이다. 아들을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다(빌 2:9–10).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신뢰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긴다. 아버지의 버림까지 신뢰하는 아들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앙의 참된 본질을 접한다.
“아버지 손”은 아버지의 돌보심 혹은 아버지의 주권을 뜻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과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신다. 비록 자신이 지금 죽지만, 곧 부활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구속을 완성할 것을 기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신 후 숨지신다. 문자적인 뜻은 “(마지막) 숨을 내쉬다”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내뱉으시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셨다.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마저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이 용서받도록 기도하셨다. 이 기도로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무죄한 왕으로 인정하고 자비를 구한 한편의 행악자를 용서하시고, 낙원에 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는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맨 처음 구원받은 사람이었다.
-애굽에 임한 흑암의 재앙 같은 어둠이 세 시간 동안 엄습한 가운데, 예수님은 하늘을 찢을 듯한 고통으로 부르짖으신다. 이는 육체적 고통에서 나온 호소였고, 또한 하나님께 버림받은 아픔을 토해 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이것이 단지 절망이나 원망의 외침이 아니라 신뢰에 근거한 외침이며,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기로 순종하시겠다는 외침이었음을 보여 주신다(시 22편).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목마르다”고 하신다. 주님은 모든 일을 성취하려고 행동하셨고, 또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순순히 당하셨다. “다 이루었다” 하실 만큼 남김없는 순종의 삶이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가능했다. 저주의 흑암 속에 계시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의심치 않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여 숨을 거두시고 있지 않은가?죽음의 순간마저 신뢰의 때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을 만큼 가망 없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과 관계하여 말하면, 자신이 죽어 많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람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것은 힘이 없어 당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예수님은 줄곧 왕으로 묘사된다. 그는 그의 왕국의 왕이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도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가상칠언의 말씀 중에서, 누가를 통해 들려주신 “사람들에 대한 용서”가 돋보인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몰고 간 유대인 당국자들을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주님, 끝까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고분분투가 인상적입니다.
*주님의 목마름이 나의 목마름이며, 주님께서 성취하신 일이 곧 저의 사명임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