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빈 무덤에서: 마리아, 베드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 20:1-18]
 – 2026년 04월 05일
– 2026년 04월 05일 –

요 20:1-18 빈 무덤에서: 마리아, 베드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여제자인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 모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했다. 이들은 요한복음에서 제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을 나타내심을 통해 제자들이 믿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보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사실을 열두 제자에게 증언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 빈 무덤 발견과 방문(1~10절)

1~2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보고하는 장면이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 부활 사건의 날짜를 십자가 사건 후 ‘제삼일’이 아니라 ‘그 주간의 첫날’로 기록하고 있다(마 28:1; 막 16:2; 눅 24:1). 그만큼 부활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이다.

여자(들)에 의해 빈 무덤이 먼저 발견되고, 그 내용이 사도들에게 통보되었다는 점도 사복음서 모두에서 확인된다(마 28:1~10; 막 16:1~8; 눅 24:1~11). 각 복음서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게 열거되지만, 요한복음은 다른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만을 빈 무덤의 증인으로 기록한다. 당시는 시체를 훔쳐 가는 일이 흔히 일어나던 때였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고 베드로와 사랑받던 제자에게 이를 급히 알린다.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19:25)과 부활하신 무덤에서만 등장한다(20:1, 18).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으나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았다고 소개된다(눅 8:2).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고 기록하고(마 28:1), 마가는 세 여인의 이름(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막 16:1)을 기록한다. 누가는 더 많은 여인들(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 눅 24:10)을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만 언급한다(1절).

마리아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확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주요 장치로 사용된다. 그래서 마리아의 보고 이후 본문은 곧바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초점이 옮겨 간다(3~10절).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갔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 되었으며(14절),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전한 사람도 되었다(18절).

빈 무덤을 확인한 마리아는 이 사실을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알렸다(1절). 이는 요한의 기록 의도로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21장에서도 예수님은 이 두 제자와 함께하시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를 볼 때 요한은 이 두 제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한편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도,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신이 옮겨졌다고 생각한다(2절).

3~7절은 빈 무덤에 들어가 확인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갔다(4절). 베드로는 사랑받던 제자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머뭇거린 제자와 달리 무덤 안으로 곧장 들어간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몸을 싸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를 싸던 수건은 따로 놓여 있었다(6~7절). ‘세마포가 싸던 대로’ 놓여 있었다는 표현(7절)은 원문에 없는 덧붙임으로 보이며, 원문은 세마포가 다른 곳에 따로 ‘말려 있다(rolling up)’는 뜻에 가깝다. 아마도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거나, 예수님의 머리를 싸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요한은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을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한다. 이는 확실한 부활의 증거를 묘사하는 것이다.

8~10절은 베드로에 이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도 빈 무덤에 들어가 확인하는 내용이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4~5절),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베드로가 들어가자 이내 따라 들어갔다(8절). 그리고 마침내 ‘보고 믿었다’(8절). 특이한 점은 원문에서 이 문장에는 ‘보다’와 ‘믿다’의 목적어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믿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문맥상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무덤 안의 상황을 보고 믿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어지는 9~10절은 이러한 견해와 충돌한다. 9절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성경이 말하는 구속사 안에서 충분하고 완전한 믿음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또 10절은, 만일 그들이 부활을 믿었다면 증언하고 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그렇지 않고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간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는 추론에 무게를 싣는다. 다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까지 신중하게 기다렸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혹은 집에 가서 자신이 모시고 있던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수도 있다(19:27).

 

2.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1~18절)

베드로와 사랑받던 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것과 달리, 마리아는 계속 예수님의 무덤 곁에 머물렀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슬픔 때문에 무덤 곁에 서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11절). 그리고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무덤 속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 두 천사가 있었다(12절). 마가는 이를 ‘청년’(막 16:5)으로, 마태는 ‘천사’(마 28:2~6)로,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눅 24:4)으로 각각 묘사한다.

부활을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천사는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들과 연결될 수 있다(창 3:24). 요한은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장소를 계속해서 ‘동산’으로 묘사한다(18:1; 19:41). 그리고 예수님은 ‘동산지기’로 묘사된다(20:15).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요한복음에서 천사는 시작 부분과 끝 부분에서 실제로 등장한다(1:51; 20:12). 1:51의 천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자, 그리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계시하는 데 사용된다. 20:12에 등장하는 천사는 하나님의 임재, 예수님의 새 창조, 예수님이 성전이심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넓은 의미로 1:51과 20:12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형성하여 예수님의 ‘성전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14~18절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 준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4절). 그녀는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을 것이라 생각했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말을 거시자 그분을 ‘동산지기’로 착각할 정도였다(15절). 예수님은 마리아의 영적 무지를 탓하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신다. 이러한 자상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후 두려워하는 제자들(19~23절), 의심하는 도마(24~29절), 그리고 낙담하는 제자들(21:1~4)에게도 계속 나타난다. 또한 울며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 십자가의 순간까지 함께했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올 정도로 예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보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마침내 예수님을 알아본다(16절). 이 모습은 10:3~4, 14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그의 음성을 알기에 그를 따른다고 하셨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친밀한 목양 관계를 확인시켜 준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마리아의 응답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선한 목자가 되시며, 마리아가 예수님의 참된 양임을 충분히 증명한다.

17절의 ‘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미 새로운 하늘 가족을 선포하셨다(19:26~27). 이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가 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이며(1:12), 십자가상에서 이미 예표되었다(19:26~27).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모습은 구원을 ‘출생’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설명한다(1:12~13; 3:3~7).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가족과 마귀의 가족으로 나뉜다(8:41~44).

그런데 예수님은 또한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구분하신다.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을 구분하여,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아들이시라는 점을 드러내신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독생자로서 예수님의 특별한 지위를 가리킨다(1:14, 18; 3:16, 18; 4:9). 예수님의 특별한 지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심판자이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며,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는 분이시다(5:19~29).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

마침내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한다(18절). 예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했던 마리아가 위대한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고, 동시에 부활의 첫 번째 전달자가 되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채 걷히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다. 이미 도망가 숨었던 제자들과 달리, 주의 곁을 끝까지 지킨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부활의 약속을 믿고 확인하러 간 걸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는 시신이 도둑맞았다고 단정하고 제자들에게 전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이 부활에 대해 첫 번째 거짓 증언과 자의적인 증언을 한 셈이다. 영적으로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상태였고, 순수한 열정이 영적 무지를 가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은 ‘몸’으로 부활하셨다. 무덤은 비어 있었고, 시신을 싸던 세마포와 머리를 싸던 수건은 무덤 안, 본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사로의 머리를 싸던 수건이 부활한 나사로의 머리에서 벗겨졌듯이(11:44),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서도 수건이 벗겨진 것이다. 이는 차분하고 침착한 도둑의 소행이 아니라,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다. 아들의 길을 따라 믿음으로 걷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몸으로, 영으로 이 부활의 영광을 주실 것이다(11:25~26).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스승의 무덤이 도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간다. 그리고 무덤 안까지 들어가 확인한다. 그러나 그것을 부활의 증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반면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가 ‘본’ 후에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그것이 성경에 이미 예언된 ‘부활’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구약의 엘리사에 의한 과부의 아들 소생이나 나사로의 소생처럼, 한 개인에게 일어난 기적으로만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전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로는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으면, 연일 벌어지는 흔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들의 참 뜻을 알아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믿은 이가 없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도,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빈 무덤을 보고도, 그들은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신다(1~10, 16~18절). 당시 여성은 법정에서 증인의 자격이 없을 정도로 무시받던 존재였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인이었다(눅 8:2).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그녀를 부활의 첫 목격자로 삼으셨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의 서사가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가장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고(19:26),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기(1절) 때문이다.

-그 마리아는 빈 무덤을 바라보며 홀로 하염없이 울었다.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보고 또 운다. 이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을 예수님께서 닦아 주신다(11, 13, 15절).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는 두 천사와 예수님의 질문은 마리아의 믿음 없음에 대한 부드러운 꾸짖음이면서, 더는 울지 말라는 정다운 격려였다.이처럼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여 애타게 구하는 우리의 눈물도 닦아 주실 것이다.

-하늘 가족 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신다(16~18절).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아버지’라 부르셨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내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이들을 새로운 하늘 가족으로 품고 있는가? 우리 더온누리교회는 하늘 가족이 되었는가?

-마리아와 두 제자의 모습 속에서 ‘알지 못해, 믿지 못하는’ 무지와 불신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 갔는지 알지 못해 답답해하며 ‘잘 모르겠다’는 말을 베드로와 두 천사, 예수님께 고백한다. 돌이 옮겨진 빈 무덤과 잘 개켜진 세마포를 보았을 때, 부활을 사전에 충분히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알아차렸어야 했다. 나는 더욱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담아, 그 말씀을 깨달아 알 때까지 되새김질하여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분별하고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야겠다.

 

*주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의 소망과 믿음으로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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